보두네, 프랑수아 사비에 (1859~1915)

Baudounet, François Xa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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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네 신부(왼쪽)와 1891년 6월에 그가 매입하여 개조한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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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네 신부(왼쪽)와 1891년 6월에 그가 매입하여 개조한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신자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한국명은 윤사물(尹沙勿). 1859년 9월 25일 프랑스 아베롱(Aveyron) 지방 로데(Rodez) 교구 내 모스튀에(Mostuéjouls)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 나 벨몽(Belmont) 소신학교와 로데 대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84년 9월 20일 사 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보두네 신 부는, 같은 해 11월 19일 동료 2명과 함께 파리를 출발 하여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으나 아직 박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니 우선 두 명만 입국하라는 제7 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의 지시에 따라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쇄 일로 건 너온 조선의 부주교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를 도와 일하다가 1885년 10월 26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임시로 서울의 주교관에 머무르던 보두네 신부는 며칠 후 충청도의 숭선(崇善, 현 충남 중원군 신니면 문숭리) 교 우촌에 파견되어 약 6개월 동안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전라도에서 사목하던 조스(Josse, 趙) 신부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자 1886년 5월 경상도 여진이(현 경북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의 옹기점 교우촌으로 부임하여 로 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와 함께 전라도 일부 지역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감시를 피해 전교 활동을 전개하 면서 틈틈이 한국어 공부에 몰두함으로써 얼마 후에는 신자들이 감탄할 만큼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갖추었다. 이에 그는 로베르 신부와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 등과 함께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가 쓴 《한국 천주 교회사》(Histoire de I'Eglise en Corée)를 번역하였는데, 이 내용은 후에 〈보감〉(寶鑑)과 (경향잡지》(京鄕雜誌)에 "조선 성교 사기" (朝鮮聖教史記)라는 제목으로 연재되 었다. 이어 보두네 신부는 전라도 고산(高山)에서 사목하던 라푸르카드(Lafourcade, 羅亨默) 신부가 사망하면서 그 후임으로 베르모렐(Vemorel, 張若瑟) 신부가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되자 그를 돕기 위해 1889년 봄 전주(全州)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곳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었 으므로 배경집(裴敬執, 베드로) 회장의 안내를 받아 전 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大成洞, 일명 대승리)에 정착하 였고, 이후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북쪽 지역의 사목을 담 당하였다. 이것이 전주 본당, 즉 지금의 전동(殿洞) 본당 의 시작이었다. 이때 그는 본당 내에 여학당(女學堂)을 개설하고자 하였으나 법적 인가 문제 및 학교 운영 기금 의 분실 등으로 인해 계속 곤란을 겪다가 1891년 4월 개교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또 그 해 봄에는 베르모렐 신부와 함께 피정차 상경하다가 화 적 떼를 만나 재물을 약탈당하고 부상을 입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 후 전주 읍내로 본당을 이전할 것을 계획한 보두네 신부는, 1891년 6월 23일 남문 밖에 있는 구례 (求禮) 영저리(營低吏)의 집을 매입하고 성당과 사제관 으로 개조하는 한편, 그 해 말에는 본당의 연령회 사업을 추진하였다. 보두네 신부가 정착할 당시 그곳에는 신자 가정이 겨우 한 집뿐이었지만, 그의 전교 활동에 힘입어 점차 입교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부 관원들도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보수적 성 향이 강한 유생(儒生)과 주민들의 비방도 많았기에, 그 는 천주교를 이해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1892년 4월 초 예비자 교리 학습장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매입하였 고, 계속 활발한 전교 활동을 벌임으로써 교세가 크게 신 장되었다. 1894년 동학란이 발발하자 보두네 신부를 비롯하여 전라도 지방에서 사목하던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 부,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 등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비에모 신부와 함께 서울로 피신 한 보두네 신부는 평정을 되찾은 후 임지로 복귀하여 폐 허가 된 교회 재건에 힘썼다. 그 결과 관할 구역의 교세 가 꾸준히 성장하여 1897년에는 임실(任實), 남원(南 原), 구례, 보성(寶城), 김제(金堤) 등지에 새로운 공소 를 설립하였으며, 1900년 9월 22일에는 진안 어은동(현 진안) 본당을 분리 설정하여 11개 공소를 이관시키는 등 활발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무렵 기존의 협소한 성당으로는 증가하는 신자들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 자 성당 신축을 계획한 보두네 신부는, 재임 중에 절약한 비용을 모두 성당 건립 기금으로 충당하여 1908년 5월 5일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다. 공사 도중 두 차례나 비용을 도난당해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 으나, 보두네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1914년에 전동 성당(1981년 9월 24일 사적 제288호로 지정)이 완공되 었다. 한편 성당 건립에 앞서 보두네 신부는 1912년 3 월에 완주 재남리(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던 순교자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의 가족 묘를 전주 치명자 산으로 이장하였다. 이처럼 사제 서품 후 즉시 한국 선교사로 파견된 보두 네 신부는 약 31년 동안 이 땅에서 사목하였고, 그중 26 년 간을 전동 본당 주임으로 재임하면서 주로 전라도 일 대의 전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전주 일대의 교회 터전을 확고하게 마련한 그는 57세 때인 1915년 5월 27일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여 치명자산 성 지 내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전동 본당) ※ 참고문헌  <경향잡지> 327호(1945. 6), pp. 5~71 《서울대교구 교 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김구정 · 김영구, 天主教湖南發展 史》, 천주교 전주교구, 1964/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텔 주교 일 기》 Ⅰ~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86~1993/ 崔奭祐, 《韓國天主教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김진소, 《신바람 사는 보람》, 한국 교회사연구소, pp. 250~2521 전동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사업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전동 본당 100년사 자료집 제1집》, 천주교 전동 교회, 1992/ 호남교회사연구소, 《전주교구사 연표》, 1993/ MEP., Compte Rendu 1915, nécrologie, Baudounet.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