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뒤앵, 랑베르 (1873~1960)
Beauduin, Lam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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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랑베르 보뒤앵 신부.
신부. 벨기에 출신의 대표적인 전례학자. 베네딕도 수 도회 회원. 1873년 8월 5일 벨기에에서 공장 주인의 아 들로 태어나 생 트롱(SaintTrond)의 소신학교에서 공부 한 후 리에주(Liège)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리 에주 사회 학원' (École Sociale de Liège)을 창설한 포티에 (Pottier) 수도원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97년에 사 제 서품을 받고 1899년에 노동 사목을 하는 성직자들의 모임인 '노동 사제회' (Aumôniers du Travail) 에 가입하여 노동자들 을 보호하기 위해 노 력하던 그는, 교구 사 제로 활동한 지 9년 만인 1906년에 루뱅 (Louvain)에 있는 몽 세자르(Mont-César)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 회하였다. 이곳에서 보뒤앵 신부는 수도원 장 마르미옹(J.C. Marmion, 1858~1923)으로 부터 전례를 배웠는데, 그는 수도 서원 후 신학을 가르치 는 동안 교회 내에서 전례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편, 19세기에 시작된 솔렘 수도원의 원장 게랑제 (P.L.P.Guéranger, 1805~1875) 신부의 전례 운동은 20세기 들어 저명한 지식층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는데, 이로써 20세기 전례 운동의 기초가 놓여 지게 되었다.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1903년 11 월 22일에 발표한 자의 교서 <여러 염려 중에서>(Tra le Sollecitudini)를 통해 거룩한 신비인 미사와 교회의 공적 이고 장엄한 기도에서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권고하 였는데, 이는 고전 전례 운동' 이라 불리는 전례 운동의 사목적인 측면을 위한 기초를 놓은 것이었다. 이러한 교 황의 '전례에 있어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 란 표현을 보뒤앵 신부는 자신의 사목적인 전례 과업의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다. 교황 비오 10세의 정신을 따라 20세기 전례 운동의 새로운 방안을 모색한 보뒤앵 신부는, 먼저 "전례는 단 순한 이에서부터 지성인에 이르기까지 생활화되어야 한 다" 고 하면서 전례의 민주화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 다. 여기서 전례의 민주화란 수세기 동안 성직자의 전용 물이 되었던 전례가 하느님의 전 백성과 관련되어야 한 다는 것이다. 보뒤앵 신부는 1909년 9월 벨기에 말린 (Malines) 대교구의 가톨릭 신자 모임에서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발표하였는데, 이때 그는 전례에 대한 주제를 발 표하면서 전례는 교회의 참된 기도이며 사제와 백성 사 이의 일치를 이어 주는 고리이며, 교회 가르침의 크나큰 도구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벨기에 가톨릭 교회의 지 도자들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 모임의 제1차적 주제가 교회와 교육이지 전례에 대한 문 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뒤앵 신부는 당시 평신도 중에 가장 연장자이며 지 식층에 널리 알려진 쿠르트(G. Kurth, 1847~1916) 교수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고, 쿠르트 교수는 1909 년 11월 23일의 발표를 통해 보뒤앵 신부의 사상을 전 달하였다. 그는 여기서 미사 경본에 대한 신자들의 고충 을 설명하였는데, 이로 인해 보뒤앵 신부의 '전례의 민 주화' 운동은 새롭게 발전하게 되었다. 보뒤앵 신부의 사상은 주일 미사 경본과 주일 저녁 기도를 소수의 지식 층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모국어로 번역하여 전파 하고, 가능한 한 신심의 바탕을 전례 생활로부터 시작하 도록 하며, 연차 모임과 피정을 통하여 교회 안에 성가대 를 강화 · 육성하고, 하느님 백성에 대한 전례 교육을 실 시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으 로 그는 주일 미사 경본을 골자로 한 월간 잡지를 발행하 여 전례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으로 1909년에는 '전례 주말 모임' (Liturgical Weeks) 이 창립되었고, 《전례 생활》(La Vie Liturgique, 1911년부터 Les questions liturgiques로 개칭)이라는 잡지도 출판되었다. 1921년부터 로마의 성 안셀모 대학교 신학 교수로 활 동하게 된 보뒤앵 신부는, 이때 동방 전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황 비오 11세(1922~1939)가 1924년 3월 21 일에 발표한 교서 <에귀템 베르바>(Equidem Verba)를 통 해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한 기도를 베네딕도회에서 해 줄 것을 요청하자, 보뒤앵 신부는 이듬해 9월 리에주의 아메(Amay)에 '연합' (De I'Union) 수도원이라고 불린 '슈브토뉴(Chevetogne) 수도원' 을 설립했다. 그는 또한 말 린 회담(Conversatio Mechliniensis, 1921~1925)에 참석하여 여기에서 메르시에(RJ. Mercier, 1851~1926) 추기경을 만 났는데, 1925년 5월 25일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영국 교회는 로마 교회에 흡수가 아닌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1928 년에 아메를 떠나야 했던 그는, 1930년 교황청 법원으 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고 앙칼카(En-Calcat)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한편 1942년에 그가 행한 설교는 파리에 '전례 사목 센터' (Centre de Pastorale liturgique)가 설립될 수 있는 원인이 되었는데, 이를 위해 그는 프랑스에서 많 은 유력한 인물들로 이 센터를 조직했다. 1950년에 자 신이 설립한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온 보뒤앵 신부는, 그 의 80회 생일인 1954년 8월에 제자들로부터 2권으로 된 《교회와 교회들》(L'Église et les Eglises)이라는 책을 헌 정받았다. 전례 개혁과 교회 재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던 보뒤앵 신부는 1960년 1월 11일 슈브토뉴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평 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보여 주었던 보뒤앵 신부 의 노력은 프랑스 교황 대사를 역임하였던 교황 요한 23 세(1958~1963)에 의해 가시화되었는데, 그는 "교회 재일 치를 위한 올바른 방법은 보뒤앵 신부의 방법"이라고 천 명하였다. 그리고 보뒤앵 신부가 주장하였던 전례의 민 주화와 교회 일치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심도 있게 다루어지도록 함으로써 그의 사상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 전례 운동) ※ 참고문헌 E. Cattaneo, Il culto cristiano en Occidente, Roma, 1978/ B. Neunheuser, Storia della liturgia attrcverso le epoche culturali, Roma, 1983/ N. Huyghebaert, 2, pp. 199~200/ F.L. Cross · E.A. Livingstone, 《ODCC》 1,p. 147. 〔鄭義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