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메오, 가롤로 (1538~1584)

Borromaeus Caro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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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롤로 보로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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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롤로 보로메오.


성인. 추기경. 밀라노의 대주교.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혁의 공로자. 축일은 11월 4일. 1538년 10월 2일 이 탈리아 북부 마죠레 호수 근처의 아로나(Arona) 성(城) 에서 지베르토(Giberto Borromeo) 백작과 교황 비오 4세 의 여동생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e Medici) 사이의 차 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 12세 때 산 그라시니아노(San Gratiniano) 수도원 에서 삭발례를 받았다. 그 후 밀라노로 가서 알치아티 (Francesco Alciati)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1552년 파비 아 대학교에 진학하여 1559년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 위를 취득하였다. 1559년 12월 25일, 그의 외삼촌인 지 안 안젤로(Gian Angelo de Medici) 추기경이 바오로 4세의 뒤를 이어 비오 4세(1559~1565)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새 교황은 그의 조카인 보로메오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보로메오는 뛰어난 교회 지도자로서 빠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활동과 업적〕 로마에서의 활동 : 1560년에 추기경으 로 서임된 보로메오가 가장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열심 히 일했던 분야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으로서의 직무였 다. 특히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 제3 회기(1562~1563) 동 안, 그의 외삼촌인 교황에게는 가장 열성적이고 믿음직 한 협력자이자 지원자였다. 1562년 11월 19일 그의 형 페데리고(Federigo)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고 난 후, 보로메오는 1563년 7월 17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 자로서의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더욱 분발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결성된 '바티칸의 밤' (Noctes Vaticanae)이 라는 문학적인 사교 단체는, 설립 초기 문학적이고 철학 적인 주제들을 다루던 사교와 토론 형식의 모임에서 탈 피하여 영성(靈性)에 관한 주제들을 다루는 모임으로 발 전하였다. 그는 '로마 교리서' 로 알려진 《본당 신부들을 위한 로마 교리서》(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의 편 찬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로마 신학교의 혁신, 미사 경 본과 성무 일도 및 교회 음악의 개정과 개혁, 교부들의 저술 출판 등을 통해 로마인들을 신앙과 윤리 생활의 쇄 신으로 인도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공식 교리서가 출판되어야 한다는 트리 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황 비오 4세는 1564년 1 월에 교리서 편찬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의 조카 인 보로메오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보로메오 추기경은 그의 힘찬 지도력과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자기가 맡은 일을 추진시켜 나갔다. 즉 그는 위원회의 위 원들을 '신경' , '성사' , '십계명' , '기도' 분야로 나누어 분담해서 다루도록 지도함으로써 교리서의 편찬 작업을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끌어 나갔으며, 그로 인해 자 신에게 맡겨진 막중한 소임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 었다. 1565년 4월 13일 보로메오 추기경은 교리서의 완 성을 교황에게 보고하였는데, 이 일에 얼마나 열성을 기 울였던지 나중에 그는 눈병을 앓기까지 하였다. 이 교리 서 출간을 명하여 《로마 교리서》를 탄생시킨 비오 5세 교황(1566~1572)은 보로메오 추기경과 위원회 위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로마 교리서》의 탄생은 그 상당 부 분이 보로메오 추기경이 이 일에 쏟아 부은 열정과 노력 의 덕분" 이라고 하였다. 밀라노 대교구에서의 활동 : 보로메오 추기경은 로마 에서 맡아 추진하였던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오르 마네토(Niccolo Ormaneto)를 주교 대리로 임명하여 교구 의 일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는 교구에서 일어 나는 중요 사안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전달 하여 교구장의 직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특별히 신학교와 관련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지나치게 꼼 꼼할 정도로 모든 문제를 소상하게 살펴서 자질을 갖춘 훌륭한 사목자를 양성해 내는 데 주력하였다. 1565년 10월 밀라노 교구로 귀임한 보로메오 추기경 은 제1차 관구 공의회를 주재하고, 이듬해 4월부터는 밀 라노에 상주하면서 교구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 는 주로 설교 활동에 종사하면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침입 을 저지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타락한 신자들을 다시 교 회로 불러들이는 데 진력하였다. 이 시기 동안 그가 밀라 노에서 전개하였던 사목 활동은 가톨릭 교회는 물론, 트 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교회에 여러 면으로 크나큰 영향 을 미쳤는데, 그중에서 뛰어난 공적은 다음과 같다. 첫 째, 교구의 행정 체계를 재조직하여 기능을 발전시켰으 며, 둘째로는 6회의 관구 공의회와 11회의 교구 공의회 를 소집하였고, 셋째는 교구 내의 모든 곳에 대한 사목 방문을 정례화하고 체계화시켰다. 넷째, 신학교의 개설 을 예수회에 맡겼다가(1564~1579) 사제직을 지망하는 후 보자들을 위한 단체(Collegio Helevetico)의 성격을 지닌 "성 암브로시오의 헌신회(獻身會)"에 일임하였으며, 다 섯째로는 예수회나 카푸친 수도회 등과 같은 기존의 수 도 단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재속 사제들을 위한 "성 가롤로의 헌신회" (Oblates ofSt. Charles)를 새로 설립 하였으며(1578), 자신이 직접 그 수도회의 회헌을 작성 하였고(1581), 여섯째는 파비아의 보로메오 대학(1564~ 1568), 밀라노의 브레라(Brera) 대학교(1572), 유랑자들 과 가정 파탄으로 고통을 겪는 부녀자들을 위한 구호 시 설(Casa del Soccorso), 고아들을 위한 보호 시설(Montes Pietatis) , 병원 등과 같이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단체들을 설립하였고, 일곱째는 교리 교육을 위해 1595년에 '그 리스도교 교리 신심회' (Confraternity of Christian Doctrine) 를 조직하여 많은 어린이들과 성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가르치게 하였으며, 여덟째는 1576년에 페스트 와 기근으로 밀라노 인근의 주민들이 큰 고난을 겪게 되 었을 때, 한 달 동안 매일 3,000여 명의 주민들에게 음 식물을 제공하여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는 데 혼신의 힘 을 다 쏟았다. '그리스도교 교리 신심회' 결성을 통한 활동 :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조직되어 교리 교육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 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교리 신심회' (C.C.D.)-우리 나 라에서는 이 신심회를 '명도회' (明道會)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그가 초석을 닦아 놓은 단체이다. 보로메오가 1565년에 밀라노 대교구로 돌아왔을 때, 밀라노 교구 내에는 이미 카스텔리노 다 카스텔리(Castellino da Castelli, 1476~1566)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여러 곳에 교리 학교들이 세워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보로 메오는 즉시 자신의 역량과 열정을 교리 교육 프로그램 을 지원하고 장려하는 데 쏟았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은 그 자신이 "밀라노 지방에서 사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 교리 신심회와 교리 학교들에 관한 헌장과 규정"의 기초 를 잡아 놓는 일에서 나타났다. 4만 단어 이상으로 된 방 대한 분량의 이 초안은 그리스도교 교리 신심회' 의 목 적과 외적인 조직을 설명해 놓은 것으로서, 보로메오는 그 신심회가 추진하려던 계획들 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이 고 중요한 작업으로 여겨 이 초안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 다. 그는 이 초안에서 신심회가 추진하고자 하는 교육의 목표를 점진적인 영적 발전 및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윤리적 생활 태도의 배양에 두었다. 그가 이 신심회의 육성과 발전을 위해 기울인 열성적 인 노력 덕분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1584년에는 4만여 명 이상의 어린이와 성인들이 이 학교에서 영적 쇄신과 윤리적 삶의 길을 닦는 교육을 받았으며, 대략 3,000여 명 정도의 교리 교사, 지도자 그리고 사무원들을 양성해 낼 수 있었다. 〔사목자로서의 정신〕 보로메오의 사목자로서의 의식은 주교로서의 직무 수행에 대한 그의 투철한 책임감에 서 비롯되었다. 그는 육신의 피곤함을 돌보지 않고 열성 을 다해 사목 활동을 펴 나갔으며, 교계적이고 체계적이 며 복음 선포적이고 성사적인 사목 활동을 끊임없이 전 개해 나갔다. 보로메오의 사목 활동의 놀라운 결실들은 1582년 이래 계속 출판된 <밀라노 교회 기록>(Acta ecclesiae Mediolanensis)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는데, 이 문헌에 는 보로메오가 주관하였던 관구 공의회와 교구 공의회에 관한 각종 기록들, 그들 공의회가 내놓은 수많은 지침과 교령과 선언 및 사목 서한들, 그리고 그가 설립하였거나 후원하였던 수도회와 형제회, 자선 단체와 문화 단체 및 신심 단체들을 위한 규정과 회헌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들은 보로메오가 생각 하기로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노선에 따라서 자기 교구 내에서의 신앙 쇄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가장 적합하고 유용하다고 여겨졌던 문제들이었다. 이 문헌들에는 또한 설교, 성사 배령, 미사 참례, 전례적인 축제들의 거행, 장례식 거행, 성체 신심의 실천, 성직자의 올바른 품행, 교회의 건립과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 교구 성직자 들의 모임, 사순절의 규정, 이교도들과의 관계, 본당 운 영에 관한 문제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 문헌 가운데 대 부분은 이탈리아어로 쓰여졌으며, 어떤 규정들은 일 년 에 적어도 한 번은 설교대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명시되 어 있다. 한편, 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개혁 규정 은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의 모든 주교들의 개혁 활동을 촉진하였고, 그 표준이 되었다. 〔마지막 생애〕 보로메오 추기경은 그의 교구 밖인 크 레모나 교구(1575), 베르가모 교구(1575), 브레시아 교구 (1580)를 방문하여 개혁을 촉구하였으며, 돌보지 않고 방치해 두었던 알프스 계곡 지역으로 네 차례나 선교 여 행을 하여 프로테스탄트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또 그는 스위스의 독일어권 지역으로 세 차례 나 여행을 하여 교황 사절로서 그의 영향력을 발휘함으 로써 프로테스탄트의 강렬한 물결을 가라앉히는 데도 열 성을 바쳤다. 보로메오는 그 밖에도 로마, 로레토, 토리 노(Torino)의 쉬루드(Shroud) 성지를 방문하였고, 그가 즐겨 찾아가곤 하던 바랄로(Varallo)의 성산(聖山)으로 순례를 다녔다. 1584년 10월 말, 영신 수련을 마친 후 부터 심한 고열로 앓기 시작한 그는 마침내 들것에 실려 다시 밀라노로 돌아갔으나, 11월 3일 사망하여 밀라노 주교좌 성당의 중앙 제대 아래 묻혔다. 그리고 교황 바오 로 5세(1605~1621)에 의해 1610년 11월 1일 시성되었 다. 성인에 대한 개인적인 공경은 빠르게 퍼져 나갔는데, 특별히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의 스페인계 사 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다. 그가 태어난 곳의 인근 언덕 에는 100피트 높이에 이르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많은 미술 작품들 속에는 개혁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 의 생애에 얽힌 소재들이 담겨졌다. 그 밖에도 몇몇 문화 적인 단체와 종교적인 단체들이 그를 수호자로 삼아 설 립되었다. (⇦ 가롤로 보로메오 ; → 《로마 교리서》 ; 트 리엔트 공의회 ; 비오 4세) ※ 참고문헌  Charles Baumgartner, S.J. ed., Dictiomaire de Spiritualie, vol. 2-1, Paris, Beauchesne, 1953/ R. Mols, 《NCE》 2, pp. 710~712/ Michael Wammnd.,Source Book for modern Catechetics,Saint Mary's Press Christian Brothers Publications, 1983/ Pietro Braido, Lineamenti di storia della catechesi e dei catechismi, Leumann, Torino, Elle Di Ci, 1991. 〔李相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