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본당
寶城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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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광주대교구 소속 본당. 전남 보성군 보성읍 동윤동 200 소재. 1939년 12월 순천(順天, 현 저전동) 본당 관 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일제 말기에 공소로 환원된 후 1954년 12월 7일에 다시 본당이 되었다. 주 보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관할 구역은 보성읍, 문덕 면, 북내면, 겸백면, 미력면, 득량면, 회천면, 웅치면, 노 동면 일대. 〔교 세〕 1964년 565명, 1971년 666명, 1978년 553명, 1983년 805명, 1987년 1,084명, 1991년 1,222명, 1995년 1,338명. 〔역대 신부〕 초대 김창현(金昌鉉) 바오로(1941.9~1944.3), 2대 모리시(M.Morrissiy, 모) 미카엘(1954. 12~1957. 9), 3대 로한(P.Lohan, 한) 파트리치오(1957. 9~1958. 8), 4대 케네디(O.Kennedy, 윤) 올리비에(1958. 8~1960. 8), 5대 라반(L. Lavan, 심) 라우렌시오(1960. 8~1965. 11), 임시 캄피온(L. Compion, 파) 라흘린(1965. 11~12), 6대 캐롤(V. Carroll, 노) 빈천시오(1965. 12~1968. 8), 7대 오르테가(Estaban Ortega, 한) 스테파노(1968. 8~1970. 8), 8대 프랑코(M. Franco, 김) 마우릴리오(1970.8-1972.9), 9대 알바레즈(P.Alvarez, 안) 바오로(1972. 9~1973. 12), 10대 김용배(金容 培) 안드레아(1973. 12~1976. 11), 11대 장지권(張志權) 요한(1976. 11~1980. 2), 12대 이종희(李鍾熙) 요한(1980.2~1981. 1), 13대 전종복(全鍾福) 사도 요한(1981. 1~1982. 2), 14대 윤용남(尹勇男) 가리노(1982. 2~1985. 6), 15대 백용수(白龍洙) 마태오(1985.6~1986.5), 16대 이재휘(李 載輝)시메온(1986. 5~1988. 2), 17대 표재현(表宰玄) 토 마스(1988. 2~1989. 4), 18대 장홍빈(張洪彬) 알로이시오 (1989. 4~1992. 2) , 19대 박상선(朴相善) 헨리코(1992. 2~ 1996. 1) , 20대 서상채(徐相彩) 유스티노(1996. 1~현재). 〔공소와 본당의 설립〕 보성 지방에 최초로 복음이 전파된 것은 적어도 1898년 이전이었다. 1889년에 전주 (현 殿洞)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는 1898년에 새로운 지역을 전교하기 위해 임실(任實), 남원(南原), 구례(求禮) 등지를 순회하였는 데, 이때 보성 지방도 함께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때 공 소가 설립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는 소수 의 신자들만이 거주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934 년에 이르러서였다. 대구에서 이주해 온 이경철(안드레아)과 그의 손자 이성열(스테파노)의 노력으로 영세자가 증가하면서 순천 본당의 넬리간(J.Neligan) 신부는 1938 년에 보성 공소를 설립하고 25평 규모의 강당을 건립한 데 이어, 이듬해 11월에는 순천 본당의 황호연(알베르 토)이 전교 회장으로 부임해 전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 다. 이러한 노력으로 1939년 12월에 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김창현 신부가 부임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12월, 일제의 교회 탄압으 로 김창현 신부는 목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44년 3월에 장성(長城) 본당으로 전임됨으로써 본당은 목자 없는 공소가 되고 말았다. 그 후 한국 전쟁이 끝나고 난 1954년 12월 7일에 2대 주임으로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모리시 신부가 부임하면서 다시 본당이 되었다. 〔정착과 변모〕 모리시 신부는 본당 신부의 오랜 부재로 한동안 방치되었던 성당이 너무 낡아 많은 불편이 뒤 따르자 1955년에 70여 평의 새 성당을 완공하였으며, 4 대 케네디 신부는 1959년에 사제관(21평)을 신축하였 다. 그리고 라반 신부 재임시인 1962년에는 강당(29평) 과 성모상을 건립하는 등 점차 본당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68년 8월부터는 과 달루페 외방선교회에서 보성 본당 사목을 맡게 됨에 따라 오르테가 신부가 7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미사 전례를 한국식 으로 변경하는 등 전례의 토착화에 기여하였다. 1973년 12월에 본당은 다시 교구로 이관되어 한국인 김용배 신부가 10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다소 침 체 상태에 놓여 있었던 본당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하여 평신도 활동의 활성화에 주력하였는데, 이때부터 본당에는 성모회, 안나회, 인성회, 요셉회, 마르타회, 청년 회, 교리 교사회 등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들이 조직되었 다. 한편 1981년 1월 15일에 13대 주임으로 부임한 전 종복 신부는 유치원 설립을 계획하고 건물을 신축하였으나, 열악한 재정 상태로 인해 개원을 보지는 못하였다. 1983년 12월 4일에 수녀원 건물을 신축한 14대 주임 윤용남 신부는 이듬해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들을 초청하였고, 이재휘 신부 때인 1986년 9월 7일에는 예당 공 소를 설립하였으며, 1987년 3월 7일에는 '별밭유치원'을 개원하여 첫 입학식을 가졌다. 또 1988년 5월에는 성당, 사제관, 유치원 건물의 개축과 성당 조경 공사를 실시하였지만, 부속 시설들이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낡은 상태였기 때문에 1994년 4월 16일 또다 시 유치원과 사제관 건물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12월 23일 완공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6년 1월 20대 주임으로 부임한 서상채 신부는 신자들의 대도시 전출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자, 전교의 활성화 · 냉담자 회두 · 반 모임 활동 강화 등을 통해 본당을 안정시키는 데 노력 해 오고 있다. (-> 광주대교구 ; 저전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광주대교구 편, 《광주대교구 50년사》, 빛고을출판사, 1990/ 韓國敎會史研究所 역편, 《서 울敎區年 報》 Ⅰ , 明洞天主敎會, 1984/ 《교회와 역사》 206호(1992. 7), 한국교회 사연구소. 〔金成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