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쉬에, 자크 베니뉴 (1627~17704)
Bossuet, Jacques Bénig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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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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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베니뉴 보쉬에 주교.
프랑스의 주교. 신학자. 교회 정책가. 설교가이자 저술 가. 1627년 9월 27일 프랑스 디종(Dijon)의 고급 행정관 가정에서 태어나 163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성직자가 되기를 원하여 8세 때 삭발례를 받았고, 15세 때인 1642년에 파리의 나바 르(Navarre) 학교에 진학하여 1652년까지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파리에서 신학 · 성서학 · 교부학 등의 공부 를 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특히 빈 천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o, 1580?~1660)와 그가 설립한 생 라자르회의 분위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활동과 저술〕 1652년 사제 서품과 함께 신학 박사 학 위를 받은 보쉬에 신부는 자신이 참사회원으로 있던 메 츠(Metz)에 정착하였는데, 전쟁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종교적 논쟁이 활발한 이곳에서 자선 활동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들이나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였다. 1656년부터 설교가로서의 명성을 얻으면서 점점 자주 파리를 오가며 일하였고, 1660년 이후부터는 파리에 거 주하였다. 1660년에는 르와얄 광장(place Royale)의 미님 (Minimes) 수도원에서 사순절 설교를 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는 가르멜 수도원에서, 그리고 1662년에는 루브르 궁에서 루이 14세가 참석한 가운데 설교를 하였다. 그는 1670년까지 지속적으로 궁정 설교가의 역할을 계속하였 지만, 궁정 신하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러 신 학적 문제들에도 관여하여 얀센주의 논쟁에 참여하였으 며, 프로테스탄트들과 논쟁을 하기도 하여 루이 14세의 장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칼뱅주의자였던 튀렌느(H. de Turenne)가 가톨릭으로 돌아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669년에는 프랑스 남서부의 콩돔(Condom)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9세였던 프랑스 왕태자의 가정 교 사로 임명되어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그때부터 왕태자가 결혼한 1680년까지 궁정에서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교육에 할애하였다. 그리고 왕실 가족의 생활에 자주 간 여하면서 루이 14세의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보 쉬에 주교가 왕태자의 교육을 위해 저술한 책 중에서 널 리 알려진 것은 《세계사 이야기》(Disours sur I'histoire universelle, 1681), 《성서의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이끌어 낸 정치학》(Polinique tirée des propres paroles de I'Ecriture sainte, 1679), , 《하느님 인식과 자아 인식에 관한 논설》(Traité de la connaissance de Dieu et de soi-meme, 1677) 등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유가 생기면 연구와 토론에 할애했는데, 이때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하는 내용으로 집필한 《논쟁점 에 관한 가톨릭 교회 교의의 설명》(Exposition de la doctrine el'église catholique sur les matières de controverse, 1671)은 인 노천시오 11세 교황(1676~1689)으로부터 특별한 칭찬을 받기까지 하였다. 1681년 모(Meaux) 교구장으로 임명된 보쉬에 주교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교구 신자들과 보내며 설교하 고, 자선 단체들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성직자들을 지도 하였다. 그러면서 당시의 성직자와 신학에 관련된 논쟁 에도 개입하였다. 교황 (ultramontanismus)와 갈 리아주의(Gallicanismus)와의 대립에서 갈리아주의적 견 해를 지지하려고 노력하였던 그는, 1682년 성직자 총회 에서 자신이 작성한 <4개 항 선언>(Déclaration des quatre articles)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세속 문제에서 왕은 교황으로부터 독립하며, 신앙에 대한 교황의 판단도 전 체 교회의 동의 없이는 무류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회의에서 모두에게 받아들여졌 다. 프로테스탄트와의 논쟁에도 관여하였던 그는 1685년 낭트 칙령의 폐지를 지지하였지만, 그들에 대한 박해보 다는 개종을 유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변천사》(Historie des variations des églises protestantes, 1688)와 《프로테스탄트에게 주는 조언》 (Avertissements aux protestants, 1689~1691)을 출판하였다. 보쉬에 주교는 갈리아주의와 프로테스탄트와의 논쟁에서는 중도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다른 경우에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는데, 특히 연극을 비도덕적인 것이라 규정 하고 연극의 금지 입장을 표명한 《연극에 관한 원칙과 반성》 (Maximes et réflexions sur la comédie, 1694)을 발표하였 다. 또 성서 주석학자인 시몽(R. Simon, 1638~1722)의 견 해에 반대하여 이를 비난하는 내용의 《교부들과 성전에 대한 옹호》(Défense de la tradition et des saints pères)를 출판 하기도 하였다. 보쉬에 주교가 가장 완고한 자세를 견지하였던 논쟁은 1696~1699년에 정적주의(quietism)와 관련하여 캉브레 의 대주교였던 페늘롱(F. Fénelon)과의 사이에서 이루어 졌는데, 이 논쟁은 결국 페늘롱이 1699년에 단죄를 받 음으로써 끝났다. 그는 정적주의에 반대하는 많은 저서 와 소논문을 집필하였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기도의 상태에 관한 개설》(Instrucion sur les états d'oraison, 1697), 《정적주의와의 관계》(Relation sur le quiétisme, 1698) 등이 다. 보쉬에 주교는 자신의 건강이 1700년경부터 급격히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04년 4월 12일 파리에서 사망하기까지 자신의 원칙들을 주장하는 저술을 하였다. 보쉬에 주교가 발표한 강론집은 1669년부터 1687년 에 걸쳐 발표된 6권의 추도문집과 유일하게 한 권의 강 론집이 있다. 그러나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된 비강론집 은 1861~1864년에 걸쳐 모두 31권으로 발간될 만큼 아주 풍부하다. 이것은 왕태자의 교육을 위해 저술한 것 뿐만 아니라, 반프로테스탄티즘 논쟁, 페늘롱에 반대하 는 논쟁, 영성적 저술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한 그의 서간문은 상당히 풍부할 뿐만 아니라 교육적이 어서 17세기 프랑스 종교사와 정치사 연구를 위해 귀중 한 참고 자료가 되는데, 이 서간들은 1909~ 1926년에 전 15권으로 발간되었다. 〔사상과 논쟁〕 배경과 주제 : 보쉬에 주교의 저서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그가 데카르트 철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나바르 학교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데카르트 철학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인데, 왕태자를 교육할 때에도 그는 17세기 후반 지적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데카르트 철학에 자연 스럽게 인접해 있었다. 그의 신학적 사고는 절충적이며 확고하다. 절충적이라는 의미는 그가 다양한 자료를 활 용하였다는 것으로,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노 철학에 친숙하였으며, 교황이나 공의회의 결정에 관한 자료를 섭렵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스콜라 학파의 철학을 배제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얀센주의의 교 의에 관한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 다. 이러한 그의 절충주의가 모호함이나 나약함을 뜻하 는 것은 아니며, '끈의 양쪽 끝처럼 항상 강하게 잡고'있어야만 하는 원칙에서 출발하고 있다. 보쉬에 주교는 항상 확고하게 자신의 주장을 갖고 있었으며, 근본적인 것을 존중하였다. 그의 신학적 주제들은 하느님의 섭리, 육화 신비, 죄 개념과 고해성사, 은총과 유일하고 확실한 중재자인 그 리스도 등이었다. 이러한 주제들이 독창적이거나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원칙에 기초하여 이 주 제들을 확장 · 응집하고 엄밀하게 분석하였다는 데 그의 독창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신학자였던 그는 역사에 많 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판적인 시각에서 연구하였 다. 역사가로서 그는 정확한 탐구와 과거를 인상적으로 복원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추도문집 과 《세계사 이야기》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논쟁 : 보쉬에 신부는 프로테스탄트와의 논쟁에 관련 되어서는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대화를 선호하였으 며, 독창적인 방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프로테 스탄트의 오류를 강조하기보다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합치점을 추구하였으며, 또한 필요할 경우 가 톨릭의 오류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별 히 메츠의 목사였던 페리(P.Ferry)와의 대화나 라이프니 츠(G.W. vonLeibniz)와의 서신 왕래는 '양교회의 일치' 를 구축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대화들로 그는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또 그 는 <4개 항 선언>에서 신앙의 문제들에 관한 교황의 결 정은 "전체 교회의 동의 없이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고 주장함으로써 갈리아주의자라고 간주되었으며, 이러 한 인상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 무류성을 선언할 때까지 강조되었다. 정치적 관념 : 보쉬에 주교는 비록 많은 기회가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정치적 직책도 맡지 않았다. 그 가 왕태자의 가정 교사로 있었을 때 정치적 영향력을 발 휘할 수도 있었지만, 단지 루이 14세의 조언자 역할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오직 왕태자를 교육하고 정직한 인 간이 되게 하는 데만 전념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정치에 대한 관념은 반마키아벨리주의적 절대주의처럼 특징지 워질 수 있다. 사실상 그는 통치자들을 모든 인간적 통제 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하였으나, 만약 통 치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강제권 있는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종교와 모든 법들은 그들에게 지도적인 영향력 을 행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 보쉬에 주 교의 체계는 '신권' (神權)의 이론에 있는데, 이는 '모든 권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는 원칙을 강조한 것이었으 므로, 결국 그의 정치적 사고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이었 다고 말할 수 있다. 〔영 향〕 일반적으로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은 보쉬에 주교 특유의 방식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칭찬 하였으나, 나머지 부분 특히 그의 저서는 자주 논쟁 거리 가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는 칭찬을 받고 반교회적인 인 물로부터는 비난을 받았지만, 교회 내에서도 특히 19세 기에는 교황 지상주의자들에 의해, 1900년경에는 근대 주의자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그러나 일반적으 로는 최근까지 대다수의 프랑스 성직자들에 의해 자주 인용될 정도로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 가톨릭 문학, 프랑스의 ; 갈리아주의 ; 설교 ; 프랑스) ※ 참고문헌 J. Truchet, 《EU》4, pp. 362~365/ F. Ferrier, Dictiomaire des philosophes, Paris, P.U.F. 1991, pp. 402~404/P. Doudon, S.J. 《Dsp》 1, pp. 1874~ 1883/ A. Largent, 《DTC》 2, pp. 362~365/ F. Houang, 《NCE》 2, pp. 717~718/E.J. Maguire, 《CE》2, pp. 42~43. 〔琪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