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주교회의 창설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 신부와 그의 뒤를 이어 중국 전교에 참여한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유교 문화권인 중국 사회 에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내세운 문화 적응주의(適應 主義, accommodatio) 이론. '보유' 란 명(明)나라의 유명한 봉교사인(奉敎士人) 서광계(徐光啓, 바오로, 1562~1633) 가 사용한 '벽불보유' (闢佛補儒)라는 용어에서 나온 것 으로, 불교 교리의 부당성을 지적하여 비판하고 그 대신 천주교 교리로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준다는 뜻이 다. 이를 통해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질적인 가치 체계요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 신앙을 명나라에 성공적으로 전파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보유론은 훗날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조선 사회의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천주교 신앙 이 수용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는 배경이 되기 도 하였다.
〔기원과 형성 과정〕 보유론은 예수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으로 동양 선교에 앞장섰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Xavier, 1506~1552)의 경험적 권고와 이에 기초를 둔 동양순찰사(巡察使) 발리냐노(A. Valignano, 范禮安, 1539~1606)의 적응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적응주의는 가능한 한 선교 지역의 언어와 풍습, 전통 문화에 영합하려는 선교 방법으로, 발리냐노 이후에는 노빌리(Roberto deNobili, 1577~1656)에 의해 유 · 불(儒佛) 사회이던 중국과인도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리치는 1582년(萬曆10) 마카오에 도착한 이래 중국인들에게 혐오감을 주지않기 위해 불교식 복장과 삭발을 한 서방의 승려로 행동하였으며, 1583년 조경(肇慶)에 정착한 이후 최초로 세운 천주교회의 이름을 '선화사' (僊化寺)로 명명하였다. 그러다가 1589년 소주(韶州)에 진출하면서 문인 구태소(瞿太素)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 시킨 뒤에는 그의 제안에 따라 1594년부터 승복을 벗고 유학자의 복장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리치는 한자 성명 을 가졌으며, 호를 서태(西泰)라고 칭한 뒤 서방에서 온 선비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적응주의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여 온 리치는 한편으로 중국 문화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한문 습득에 노력하였고, 조경에 있을 때인 1584년 이후 <기인십규> (畸人十規)를 비롯하여 한문으로 된 교리서를 저술하고 <산해 여지 전도>(山海輿地全圖)를 제작하였다. 뿐만 아 니라 구태소를 만난 이후에는 그로부터 사서오경(四書五 經)을 배우고 그 내용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리치는 점차 불교를 배척하면서 유 학의 미비점을 보완해 준다는 보유론 즉 역불 보유론의 이론을 정립해 나갔으며, 이때 선진 유학(先秦儒學)의 내용을 자주 원용하였다. 그리고 1595년에는 소주 생활 을 청산하고, 남경(南京)으로 갔다가 추방되어 남창(南 昌)에서 약 3년을 지내게 되었는데, 이 기간에 수학과 기예 등의 학문을 바탕으로 지식인들과 교유하였으며, 유명한 《교우론》(交友論)을 저술하고 1596년에는 《천주 성교 실록》(天主聖敎實錄)을 완성함으로써 서양 선비로 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리치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보유론은 1597년과 1599년 발리냐노에 의하여 중국 선교단에 포함된 롱고 바르디(N.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 판토하(D. Pantoja, 龐迪我, 1571~1618) 등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1598년에 북경으로 갔다가 남경에 거처를 잡은 리 치는 불교계의 논객 삼유(三維) 화상과 토론을 벌이고, 양명(陽明) 좌파의 태주학(泰奏學)을 이은 이지(李贄, 1527~1602)를 만나 학문을 논의하면서 독창적인 보유론 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은 《사행논략》(四行論略, 1598)과 <산해 여지 전도>(1600, 增訂王泮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601년(만력 29) 1월 24일 북경에 도착한 리치는 만력제(萬曆帝)의 허락을 얻어 자금성(紫禁城) 안에 거주하면서 마침내 북경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후 그는 철저하게 보유론에 입각한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들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천주 성교 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 2권)는보유론이 가장 잘 적용된 교리서였다. 풍응경(馮應京,1555~1626)의 도움을 얻어 1601년에 완성하고 1603년에간행한 이 책의 첫 이름은 《천학실의》(天學實義)였고,원명은 '신에 대한 참된 토론' (De Deo Verax Disputatio)이었다. 당시 리치는 북경에서 명나라 말의 유명한 봉교사인 풍응경, 서광계, 이지조(李之藻, 1565~1630) 등과 교유하는 동안 그들에게 보유론을 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그들의 도움을 받거나 그들로부터 새로운 이론을 배웠다. 또 그 뒤를 이어 중국 선교에 가담한 우르시스(S. deUrsis, 熊三拔, 1575~1620), 디아즈(E. Diaz, 李瑪諾,1559~1639), 페레이라(G.Ferreira, 費奇觀, 1571~1649), 알
레니(J. Aleni, 艾儒略, 1582~1649) 삼비아시(F. Sambiasi,畢方濟, 1582~1649) 등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보유론과 한역 서학서의 영역은 계속 넓혀져 가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리치에게 있어 천주교의 교리는 결코 유교적 세계관이나 윤리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인 관념을 더욱 완전하게 보완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천주를 선진 유학에서 말하는 상제(上帝)로 보면서도 태극(太極)이나 리(理)의 개념을 상제 즉 천주와 동일시하지는 않았고, 주자학(朱子學)이나 성리학(性理學) 대신 고경(古經) 즉 선진 유학의 내용을 원용하였다. 또 의뢰자(依賴者)나 자립자(自立者), 소이연(所以然)등 스콜라 철학에 입각하여 《천주실의》를 저술했으면서도 스콜라 철학의 개념보다는 천주교 교리를
더 중시하 였다. 이러한 리치의 보유론은 마침내 역불론(易佛論)으 로 전개되었으며, 불교는 도교와 함께 배척의 대상이 되 었다. 아울러 그것은 도가나 승려들에 대한 비판에서 시 작되어 허(虛)와 공(空)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 다. 특히 그는 중국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 였는데, 이때 가장 먼저 윤회론(輪廻論)과 우상 숭배가 그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요지는, 남경에서 있은 삼유 화상과의 논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상제가 창 조주요 주재자가 된다' 는 천주교 호교론과 연결되는 것 이었다. 이후 보유론을 내세우는 예수회 회원들은 공자(孔子) 를 종교가로 보지 않고 위대한 철학자로 여겼으며, 유교 가르침은 현세에서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하고 할 현세 당위적(現世當爲的)인 실천 윤리로 의 실천 해야 보았 다. 다시 말해 공자는 인(仁)의 사상에 터전하여 윤리 · 도덕상의 진리를 폈지만, 사후 문제나 내세(來世) 등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 점에서 유교는 종 교가 아니라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원리를 제시한 현세의 가르침으로 이해되었다. 또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교는 천(天)의 당위적인 가르침으로, 천주가 부여해 준 본성에 따라 조물주인 신을 경외하고 천리(天理)에 순응하는 본성 종교인 성교(性敎)라고 하 였다. 따라서 유교는 천주의 십계명(十誡命)에 준한 구 약 시대의 고교(古敎)에도 미치지 못하며, 예수 그리스 도의 강생 구속 사업 이후에 시작된 신교(新敎)인 천주 교에 의해 보완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천주교로 귀 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신념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리치와 마 찬가지로 천주 즉 상제의 창조성(創造性)과 주재성(主宰性)과는 달리 이 · 기(理氣) 묘합(妙合)에 터전하여 만물의 조성(造成)을 설명하는 주자학이나 성리학을 부정하 는 대신, 선진 유학의 소사상제(昭事上帝), 조상 숭배, 상선 벌악(賞善罰惡)과 공자의 인(仁)의 사상을 긍정적 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선진 유학의 내용을 토대로 천 주 존재, 천주 속성, 영혼 불멸, 사후 상벌, 천당 지옥, 애주 애인(愛主愛人) 등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하고 자 하였다. 그들에게는 같은 유학이라도 주자학(성리학) 은 선진 유학의 순수한 종교 개념을 변질 왜곡시킨 것이 었고, 따라서 주자학의 근거가 되는 태극 이기설(太極理 氣說)을 비롯하여 만수 일체설(萬殊一體說), 혼백 산화 설(魂魄散化說)과 현세 중심적인 인생관은 전면 비판되었다. 이처럼 그들은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선진 유학 안에 들어 있는 유교 사상이나 유학이 지니는 학문 가치와 사 회적 의의를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철학으로서의 유 교 논리를 종교로서의 천주교 신앙을 이해시키는 데 활 용하였다. 즉 그들은 보유론적 천주 신앙의 이론을 정립 하여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이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고, 다시 이를 한역 교리서(漢譯敎理書)에 담아 중국 사회에 널리 유포시켰다.
〔영 향〕 보유론적 입장을 지닌 예수회 회원들은 중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서사(西士) 또는 서유(西儒)로 불리 게 되었다. 이처럼 그들은 서양인이기는 하지만 유가 경 전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유교와 천주교의 교리를 보완 설명해 주는 선비로 인정을 받음으로써 천주교 신앙을 중국 사회에 널리 전파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벽사론자(闢邪論者)들은 보유론에 반기를 들 고 천주교 교리를 사학(邪學)이라고 배척하였다. 특히 1616년에 남경(南京)박해를 일으킨 예부 시랑 심확(沈 淮)은 불교 신자의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를 비판하였고, 만력제의 허락을 얻어 예수회 선교사들을 마카오로 추방 하였다. 이후 박해는 그치게 되었지만 벽사론은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다. 1639년에 서창치(徐昌治)가 편찬한《성조 파사집》(聖朝破邪集)에는 그때까지 나온 벽사론이 망라되어 있는데, 여기에 들어 있는 33인 50종의 저술들은 대부분 리치의 저서를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데서시작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으로는 심확의 《참원이소》(參遠夷疏), , 왕계원(王啓元)의 《청서경담》(淸署經談), 황정(黃貞)의 《존유극경》(尊儒丞鏡)과 《파사집》(破邪集), 진후광(陳侯光)의 《변학추언》(辨學葡言), 허대수(許大受)의 《성조좌벽》(聖朝左闢) 등을 들 수 있다.이 밖에도 1643년에 종시성(鍾始聲)의 《벽사집》(闢邪集)이 나왔으며, 양광선(陽光先)은 1644년에 《부득이》(不得已)를, 1659년에는 《벽사론》을 저술하여 서양의천문 · 과학 이론까지도 배척하였다.
한편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교에 이용하였던 보유론은 1631년 이후 도미니코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중국에 진출하면서 갈등의 소지가 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영합주의(syncretism)라고 비난하였고, 중국의 조상 숭배와 공자 의식을 미신 행위로판단하여 배척하였다. 그 결과 선교 단체들 사이에서는의례 논쟁(rites controversy)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보유론은 이 논쟁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교황청에서는 이후 오랜 토론 끝에 1715년 3월 19일 교황 글레멘스 11세의 칙서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를 통해 의례금지령을 내렸다. 동시에 천주 이외의 용어 사용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 금지령은 1742년 7월 11일에 반포된 교황 베네딕도 14세의 칙서 <엑스 구오 싱굴라리〉(Exquo singulari)에 의해 재천명되었다.
그 동안 천주교 전교에 관용을 보이던 강희제(康熙帝) 는 의례 논쟁에 분노하여 1706년의 칙령을 통해 중국 의례를 용인하지 않는 선교사를 추방하도록 하는 급표 (給表) 정책을 시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황청의 의례 금지령이 내려지자마자 1717년 4월 16일 중국 내에서 의 선교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중국에서는 1844년 황 포조약(黃浦條約)이 체결될 때까지 박해와 금교령이 간 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결국 의례 논쟁과 국가, 선교 단체 사이의 알력으로 인한 천주교 박해는 중국 선교의 쇠퇴 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이것은 한편으로 리치 이래 예수 회 선교사들이 고수해 온 적응주의와 이에 입각한 보유 론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보유론〕 리치 이래 예수회 선교사들이 저술한 한역 서학서들은 17~18세기에 걸쳐 꾸준히 조선에 전 래되면서 중국과 같은 유교 문화권이던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중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뒤인 1603년(선조 36)에는 이수광(李晬光, 1563~1628) 등에 의해 《천주실의》, 《교우론》에 들어 있는 보유론의 내용이 이미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천주실의》 8편의 내용을 소개하고 "천주는 상제(上帝)를 말함이고, 실(實)이라는 것은 불공(不空)의 뜻이니, 유 · 불 · 도의 공(空)과 무(無)를 배격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이 보유론에 입각한 천주교 교리를 수용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필요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한역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보유론의 입장에서 이해한 학자는 이익(李瀷, 1681~1763)이었다. 그는 천주교의 상제설이 유교 경전에 수록 되어 있는 상제설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였으 며, 서양의 삼혼설(三魂說)과 유교의 심성론(心性論)이 다른 것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칠극》(七克)의 내용을 유 가의 극기설(克己說)로 이해하였다. 그러면서도 천당 지 옥설과 영혼 불멸설은 불교의 윤회설과 같다고 배척하였 고,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끝내 는 서양의 삼혼설도 비판했다. 그러나 실학자로서 이익 이 보여 준 서학 탐구와 이해는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영 향을 주게 되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권철신(權哲身, 1736~ 1801)을 중심으로 하는 녹암계(鹿菴系)의 젊은 학자들 중에서 보유론을 이해하고 천주교를 신앙으로 이해하려 는 경우가 나타나게 되었다.
권철신의 제자로 훗날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이벽(李檗, 1754~1786)은 가장 먼저 유 교 경전의 상제와 천주교의 천주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 하고, 유교와 천주교의 교리를 조화시키면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수용하였다. 우선 그는 현세 당위론적인 유학 의 이론보다 사후의 영생과 영혼 불멸을 제시한 천주교 교리의 보유론적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러면서도 현세에 서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의 관계를 중시하였으며, 따 라서 효도와 천주 공경, 인륜 도덕과 신앙 생활, 현세와 내세를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깊은 상관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 결과 보유론의 입장에서 인륜을 중시하는 유교와 신앙을 중시하는 천주교를 자신의 사상 안에서 자연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경학(經學) 사상 안에서 엿볼 수 있는 서학의 요소들은 그의 서학 접촉 내지는 교 리 연구 과정을 잘 설명해 준다. 또 그 배경에는 녹암계 의 학문 성향과 이벽의 영향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서학 이해는 보유론의 입장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우선 천 주교 교리에서처럼 상제의 유일성을 중시하였고, 상제천 (上帝天)을 영명한 것으로 설명하면서 조물주로서의 창 조성과 인격성을 부여하였다. 다음으로 서양의 우주 만 물론이나 4원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태극 대신에 무형(無形)의 궁극자인 주재지천(主宰之天)을 설정하였 다. 뿐만 아니라 심성론에서는 하늘이 인간에게 인성을 품부해 준 것으로 인정하였고, 도심(道心)을 통해 인심 과 천명이 연결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삼혼설과 같은 인 간 · 금수 · 초목의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수양론에서는 《천주실의》의 영향을 받아 수신 사천(修身事天)과 소사상제(昭事上帝)를 제시하였다. 이후 보유론은 천주교회 창설 이후 신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은 《천주실의》에서와 같이 유학의 윤리관에 입각하여 천주를 대군대부(大君大父)로 설명하면서 천주 존재, 강생 구속,영혼 불멸, 인성과 신성, 구원과 내세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그의 《주교요지》(主敎要旨)에 잘 나타나 있다. 또 그의 아들 정하상(丁夏祥, 1795~1839)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통해 만물의 주재자가 있음을 주장하고, 옛 성현들도 만물의 주재자인 상제와 천(天)을 받들어 섬긴 사실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윤리관을 제시하면서 불교의 교리를 배척하였으며,보유론에 입각하여 천주 존재, 영혼 불멸, 천당 지옥 등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보유론적 천주 신앙은 그 후에 지어진 천주 가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중국에서처럼 조선에서도 보유론은 척사론자(斥邪論者)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아야만 하였다. 우선 신후담(愼後聃)은 《서학변》(西學辨)을 통해 서양의 영혼 설이나 천주 속성 같은 보유론의 논리, 천주교 교리들을 논리적으로 비판하였으며, 특히 삼비아시의 《영언려작》(靈言蠡勻)에 나타난 서학의 영혼론(anima)을 조목에 따라 논평하면서 그 불합리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안정복(安鼎福) 또한 <천학고>(天學考)나 <천학문답>(天學問答)을 통해 이기론(理氣論)에 바탕을 두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제시한 천학의 이론, 천당 지옥설과 창조 · 예언 · 상제설 등 천주의 속성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척사론은 그 후 이헌경(李獻慶)의 〈천학문답〉, 홍정하(洪正河)의 《증의요지》(證疑要旨)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더나아가 공서계(攻西系)가 신서계(信西系)를 비판하는이론적 뒷받침이 되었다.
물론 보유론에 바탕을 둔 천주 신앙의 이해는 1790년의 조상 제사 금지령과 1791년의 진산 사건(珍山事件)으로 제사 문제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한계성을 드러내게되었다. 그 결과 유교적 체질을 청산하지 못한 지식인 신자들은 천주교에 등을 돌리게 되었고, 반대로 천주교 신앙을 지키려는 신자들은 전통 유교의 가르침을 버려야하는 선택이 강요되었다. 여기에서 전자는 당위(윤리)를,후자는 존재(천주)를 선택해야만 하였다. 또 이 문제는위정자들로 하여금 천주교 신자들을 유교의 근본을 어기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패륜지도(敗倫之徒)로 몰아가도록 하였으며, 마침내는 천주교 박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 리치 ; 척사론)
※ 참고문헌 金玉姬, 《廣菴 李檗의 西學思想》, 가톨릭출판사,1975/ 琴章泰, 《東西交涉과 近代韓國思想》, 成均館大學校 出版部,1984/ 李元淳, 《朝鮮西學史研究》, 一志社, 1986/ 崔東熙, 《西學에 대 한 韓國實學의 反應》,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研究所, 1988/ 羅光, 《利瑪竇傳》, 臺灣 : 學生書局, 1968/ 平川祐弘, 《マ シ テ 才 . リ ツ 千傳》,東京 : 平凡社, 1981/ 劉俊與 · 王玉川 譯 《利瑪竇中國傳教史》, 臺灣: 光啓 · 輔仁大學出版社, 1986/ M. Ricci, J. Gallagher tr. China in the16th Century : The Journal of Matteo Ricci (中國誌), New York, 1953/ V.Cronin, The Wise Manfrom the West, London, 1955(이기반 역, 《서방에서 온 현자》, 분도출판사, 1989)/ J. Gernet, Chine et Christianisme, Paris,1982(J. Lloyd tr,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Cambridge, 1985)/ 崔基福, <儒敎와 西學의 思想的 葛藤과 相和的 理解에 관한 연구>, 成均館大學校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89/ 金基協, <마테오 리치의 中國觀과 補儒易佛論〉, 延世大學校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3/ 車基真,<星湖學派의 西學 認識과 斥邪論에 대한 연구>, 韓國精神文化研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6. 〔李元淳〕
보유론
補儒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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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보유론에 입각하여 많은 한역 서학서들을 편찬한 마테오 리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