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인대학

輔仁大學

[영]Fu Jen Catholic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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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대학 전경.

보인대학 전경.

1925년 미국의 베네딕도 수도회(The American CassineseCongregation)가 중국 북경에 설립한 가톨릭 대학. 처음에는 '보인 아카데미' 였으나 1927년에 '보인 가톨릭대학'으로 개칭되었고, 1933년부터 신언회(神言會, Society ofDivine Word)에서 대학의 운영을 맡았다. 그 후 중국의 공산화로 1952년에 폐교되었다가 대만의 보인 교우회(輔仁校友會)와 신자들의 설립 요청에 따라 1963년에 대북현 신장시(臺北縣 新莊市) 현재의 위치에서 복교되었다.
〔북경의 보인대학] 20세기 초 중국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대학은 상해(上海)의 진단대학(震旦大學)과 천 진(天津)의 공상학원(工商學院) 두 곳뿐이었으므로, 영검지(英歛之) 등 천주교 신자들은 중국 문화의 발양과세계의 지식을 수용하고자 1911년에 대학 설립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더 이상 논의되지 못하다가 종전 후인 1919년에 교황청이 조사한 중국의 교육 실태 보고서에서 천주교 고등 교육 기관의 부족이 지적되었고, 그 이듬해 입국한 미국인 오툴(O' Toole) 신부도 천주교 대학의 설립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오툴 신부는 영검지와 이 문제를 의논한 후 교황청을 방문하였으며, 동시에 베네딕도회의 피델리스(Fidelis) 총장을 설득함으로써 대학 설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1922년 즉위 직후 베네딕도회에 대학 설립을 촉구하였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국의 베네딕도회가 중국의 대학 설립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베네딕도회는 몇 년 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25년 1월 중국에 입국하였고, 같은 해 10월 1일 옛 도패특부(濤貝勒府)에 '보인 아카데미' 라는 이름으로 예과 한 반을 개설하고 영검지를 책임자로 임명하였 다. 영검지가 이듬해 1월 과로로 사망하면서 그를 대신해 교무를 맡게 된 진원(陳垣)은, 취임 후 적극적으로 설 비를 확충하는 한편, 이사회를 조직하여 오툴 신부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교명 도 '보인 가톨릭대학' 으로 개칭한 뒤 1927년 중국 정부로부터 임시 허가를 받았다. 1931년 남경(南京) 정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보인대학은 설립 초기에는 문학원(文學院)만 두었으나, 1929년에 이학원(理學院)과 교육학원(敎育學院)이 증설되면서 학과도 12개로 늘어났다. 같은 해 다시 교장으로 취임한 진원은 도패륵부 남쪽에 새 교사(校舍)를 건립하여 대학을 옮기고, 이전 자리에는 남자 중학교를 개설하였으며, 1932년에는 태평창(太平倉)에 여자 중학교를 설립하여 성령 동정회(聖靈童貞會, 즉 聖神會)에 운영을 맡겼다.
한편 1929년에 시작된 경제 공황으로 베네딕도회에서는 더 이상 대학을 운영할 수 없었다. 이에 교황청에
서는 1933년에 신언회에 대학 운영을 맡김으로써 신언회 회원인 요셉 머피(Joseph Murphy)가 교무장(校務長)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교무장은 1935년부터 1946년까지 루 돌프 라만(Rudolf Rahamann)이 맡았고, 교장은 1929년 이래로 진원이 계속해서 맡았으나, 경제 공황과 함께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보인대학은 운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 1941년에는 미 · 일 관계 의 악화로 미국인 교직원들이 본국으로 떠나야만 하였으 며, 1942~1944년에는 항일 운동과 관련하여 비서장 (秘書長) 영천리(英千里), 훈도장(訓導長) 복개붕(伏開 鵬), 장회(張懷), 동세범(董洗凡), 영순량(英純良) 등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인대학은 제2 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도 발전을 계속하여 1937년에는 대학원 및 발진티푸스 연구를 위한 연구소와 중국 문학 연구소, 역사 연구소를 개설하였다. 또 이듬해에는 여학 생도 받아들여 중국인 사제 연수 기구인 '사제 서원(書 院)' 을 공왕부(恭王府) 북부의 새 건물로 옮기고 그 자 리에 여학생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종전 후인 1946년에 는 리니(Harold Rigney)가 새로운 교무장에 임명되면서 농학원(農學院)을 증설하였다. 그리하여 보인대학은 1949년 1월 중국이 공산화될 때 까지 문학원(중국어학 및 중국 문학, 서양 제국어학 및 서양 문 학,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이학원(수학, 화학, 생물학, 가정 학), 교육학원(교육학, 철학, 미술), 농학원이 있었고, 대학 원에는 문학원(역사학, 민속학, 경제학)과 이학원(물리학, 화 학, 생물학)이 있었으며, 학생수는 3,000여 명에 이르렀 다. 또 부설 기관으로는 외국어 도서 4만 권을 포함하여 14만 4,000권 이상의 서적을 소장한 대학 도서관과 민 속 박물관인 '동방 박물원' (東方博物院)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간행한 《보인학지》(輔仁學誌), <화예학지》(華裔學誌), 《민속학지》(民(俗學誌) 등은 국제 학술계에서도 유명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되자 1950년 10월 12일부로 신언회는 모든 경비 지출을 중단했고, 이에 보인대학은 얼마간 중국 정부에 접수되었다가 1952년 5월 19일 정식 폐쇄되었다. 〔복교 및 현황] 1956년 7월 대만에서 성립된 '재대보인 교우회' (在臺輔仁校友會)는 교황청에 보인대학의 복교를 지속적으로 청원하였다. 이에 교황 요한 23세는 1959년 6월 21일 예수회 · 신언회 · 중국 주교단과 상의하여 보인대학의 설립을 결정하고, 유핀(于斌) 대주교에게 대학 설립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러한 과
정에 서 미국으로부터 10만 달러의 후원금이 모금되어 보인대 학의 설립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고, 국내에서도 대학 설 립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59 년 11월 30일 유핀 대주교가 보인대학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4월에는 학교 운영을 위한 이사회가 조직되면서 전경신(田耕莘) 추기경이 이사장으로 추대 되었으며, 4월 25일에는 정식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보인대학은 본격적인 대학의 모습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므로, 유핀 대주교는 우선 1961년 9 월 8일 대북시(臺北市) 길림로(吉林路)에 문학원 철학 연구소를 개설하여 운영하다가, 1963년 2월 대북현 신 장시에 75에이커의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3월부터 건물 5동을 짓기 시작하여 가을에 이를 완공하였다. 동시에 6 월에는 법학원(法學院)과 이학원(理學院) 증설 허가를 받아 10월에 464명의 학생을 입학시킴으로써 본격적인 대학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과목 교수는 참여 한 단체들이 일정하게 나누어 담당하였는데, 중국의 재속 사제들은 문학원을 담당하였고, 예수회 수사들은 법 학원과 공과(工科)를, 신언회의 선교사들은 이학원(수학, 물리, 화학, 생물, 가정 경제)과 외국어 과목을 맡았으며, 성 령 동정회는 가정 경제과와 여자 기숙사를 담당하였다.
이후 여러 학과와 연구소들을 증설해 나간 보인대학 은, 기숙사 · 도서관 · 체육관 · 강의실 등도 계속 건립하 였으며, 1967년 12월 8일에는 서회신학원(徐匯神學院) 을 부설 기관으로, 1969년 가을에는 상학원(商學院)과 야간부(夜間部)를 신설하였다. 또한 1980년에는 외어학 원(外語學院)의 설립 승인을 받았고, 1982년에는 상학 원을 관리학원(管理學院)으로 변경하였으며, 1984년에 는 예술학원(藝術學院)을, 1989년에는 의학원(醫學院) 을 증설하여 명실상부한 종합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 었다.
1992년 현재 보인대학은 주 · 야간 2부로 나뉘어져 있 으며, 주간부는 7개 학부에 36개 학과가 있고, 야간부는 14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22개 연구소 와 부설 기관으로 신학원과 어학 센터가 있다. 학생수는 17,000여 명에 이르며, 100여 개의 학생 단체에 출판물 도 100여 종에 달하고, 복교 이후 졸업생수는 5만 명이 넘는다. 역대 총장으로는 1959년부터 총장으로 재직하 면서 대학의 기틀을 마련한 유핀 대주교가 1978년 6월 사직함과 동시에 나광(羅光) 대주교가 2대 총장에 취임 하였고, 1992년 2월에는 이진영(李振英) 몬시놀이 3대 총장에 임명되어 재직하고 있다.
[신학원] 예수회에서 맡고 있는 보인대학의 부설 기관 으로, 본래 이름은 서회신학원이다. 1842년 예수회에 의해 상해(上海) 서가회(徐家匯)에 세워졌고, 18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폐쇄되었다가, 1929년 다시 서가회에 설립되었다. 이후 서회신학원은 1952년 공산 정권을 피 해 필리핀으로 이전되었다가 1967년에 대만으로 옮기면 서 그 해 12월 8일 정식으로 보인대학의 부설 기관이 되었다.
이 신학원이 한국 교회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849 년 서품 직전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가 이 신학 원에서 마지막으로 신학 공부를 한 뒤에 여기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였다. 또 1985년에 신학원 도서관에서 <신미년(1811)의 서한>이 발견되면서 한국 교회의 주목 을 받게 되었는데, 이 서한은 조선 신자들이 북경의 주교 와 교황에게 보낸 서한과 북경 교회의 답신 등 모두 네 통이 들어 있는 서한철(書翰綴)로, 1801년의 신유박해 와 이후 1811년 사이에 전개된 조선 교회 재건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이외에도 신학원 도서관에는 상해에서 가져온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소장 되어 있다.
※ 참고문헌  상지대학 편, 《カ 卜 リ ソ 7 大辭典》 4, 東京, 富山房,1954/ R. Arens, 《NCE》 13, pp. 915~916/ 史式徽 《江南傳敎史》, 上海譯文出版社, 1983/ 輔仁大學公共關係室 編, 《輔仁大學概況》, 1992/ 조광, <동국교우상교황서>, <교회와 역사》 179호(1990. 4), 한국교회사연구소, pp. 19~25.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