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9월 8일 트라피스트회(Trappist)의 판너(FranzPfanner, 1825~1909) 아빠스가 아프리카 선교를 목적으로남아프리카 공화국 나탈(Natal) 주 마리안힐(Mariannhill)에 설립한 선교 수녀회. '마리안힐의 자매들' 로도 널리알려져 있는 보혈 선교 수녀회는 초창기에는 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나, 곧 선교의 범위를 확대하여 현재 전세계에서 특수 교육과 간호 사업에 투신하고있다. 총본부는 로마에 있으며, 모원은 네덜란드의 알레릭스텔(Aarle Rixtel)에 있고, 한국 본원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상삼리 164번지에 있다.
〔설립자〕 1825년 9월 21일 오스트리아 보랄베르크(Voralberg) 지방의 량겐(Langen)에서 태어나 11세 때 삼촌 신부가 있는 곳으로 보내진 프란츠 판너는, 고등학교과정을 마친 후 1842년 인스브루크(Innsbruck) 대학교에입학하여 철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파도바(Padova) 대학에 편입하였으나, 그곳의 자유 분방한 생활에 실망한 나머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브릭슨(Brixen) 신학교로 편입한 후 1850년에 교구 사제로 서품되어 하셀스타우덴(Haselstaud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859년부터는 크로아티아자그레브(Zagreb)에 있는 자비의 수녀회(Sisters ofMercy)에서 영성을 지도하였으며, 이후 교정(矯正) 사목을 담당하였으나, 차츰 일선 사목에 임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자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성지 순례길에 올랐다. 그리고 골고타 언덕에서 성주간을 보내면서 인류 구원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내어 놓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의 신비를 깊이 묵상한 끝에 여생을 고행과 기도 속에서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판너 신부는 1863년에 교구 사제로서의 생활을마치고 독일 아이펠(Eifel)에 있는 마리아발트(Mariawald)의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규칙적인생활을 통해 1년여 만에 건강을 회복하고 수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천하기 힘든 고행의 삶을 살아가는 판너신부를 다른 수련자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판너 신부는 수도회를 떠나야만 하는 위기에 처하였으나, 다행히 총회의 결정에 의해 새로운 소임지인 보스니아로 파견되었다. 그곳의 바냐루카(Banjaluka)에서 그는 마리아스테른(Mariastern) 수도원을 세워 대수도원으로 승격되도록 힘썼는데 10년 만에 대수도원으로 승격된 공로를 인정받아 수도원의 첫 아빠스로 지명되었다.판너 신부는 아빠스 임명권을 받기 위해 1879년 9월에프랑스 세풍(Septfon)에서 개최된 총회에 참석하였다가,이 총회에서 우연히 아프리카 지역의 복음화에 기여할선교사를 찾고 있던 리카르드(J.D. Recards) 주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만남으로 그는 아빠스직 대신에 불모지였던 아프리카 선교를 자원하면서 생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설립과 정착〕 1880년 판너 신부는 31명의 트라피스트회 회원들과 함께 남아프리카 케이프(Cape) 주 둔브로디(Dunbrody)에 정착하여 3년 동안 생활하다가, 1882년12월에 졸리벳(C.Jolivet) 주교의 초청으로 더반(Durban)시 인근의 농장을 매입한 후 수도원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이 농장 이름을 성모 마리아와 그 어머니인안나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마리아와 안나의 언덕' 즉'마리안힐' 로 명명하였다.
당시 아프리카는 유럽에서 이주해 온 수많은 백인들에 의해 사회적 · 경제적인 수준은 날로 향상되어 갔지만, 원주민들은 모든 혜택으로부터 제외되었다. 수도원을 찾 아오는 원주민들을 통해 이러한 실상을 알게 된 판너 신 부는 이들도 그리스도의 성혈로 구원된 귀중한 인격체로 서 동등한 삶을 누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보다 나 은 경작지, 보다 나은 집,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 (Better Field, Better Home, Better Chinstian)이라는 모토 아래 원주민 들의 고유한 생활 방식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욕구를 충 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수도원 내에 빵집, 대장간, 철공소, 목공소, 양복점, 구두방, 정비소, 출판사, 인쇄소, 사진 스튜디오 등 다양한 작업장을 갖추 어 원주민들이 수사들과 함께 일을 배우게 하였고, 다종 족 학교(多種族學校)를 설립하여 백인과 아프리카 어린 이들을 함께 가르쳤다. 그 결과 사하라 사막 남단의 유일 한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인 마리안힐의 명성은 곧 유럽 각지에 널리 알려졌으며,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방문하 는 유럽의 지원자들로 3년 만에 수사가 90명에 달하는 등 빠르게 성장하여 1885년 4월에 대수도원으로 승격되 었고, 동시에 판너 신부는 초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한편 트라피스트회 규칙상 수사들은 원주민들의 거주 지 내로 들어가서 생활할 수가 없었다. 이에 판너 아빠스 는 선교 잡지 《나를 잊지 마세요》를 발간하여 아프리카 선교에 동참할 뜻 있는 젊은 여성들을 초청하였다. 그 결과 1885년에 독일 여성 5명이 지원하였는데, 이들이 바 로 보혈 선교 수녀회의 첫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줄루 (Zulu)족 어린이들에게 읽기와 쓰기, 가사, 재봉과 위생 문제 등에 대해 가르치면서 복음도 함께 전파하였다. 더 욱이 원주민들이 선호하는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생활하 여 '빨간 수녀' 라는 애칭으로 불리울 정도로 그들과 철 저히 동화된 삶을 살아갔으며,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0 년 후에는 250명의 회원들이 자이레, 탄자니아, 짐바브 웨 등지에서 활동할 만큼 성장하였다. 수사들 역시 원주 민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배울 수 밖에 없었기에 점차 수도회의 규칙이 완화되었는데 결 국 이 사실이 로마의 장상들에게 알려지면서 판너 아빠 스는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고 남아프리카의 엠마우스(Emmaus)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서 15년 간 기도와 보속과 고행으로 여생을 정화하면서 끝까지 트라피스트회의 회원으로 남았다. 그 후 판너 아 빠스는 관절염으로 고생하다가 1909년 5월 24일 84세 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세계 진출과 영성〕 보혈 선교 수녀회는 설립 이래 "하 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의 선교 지역은 국경 을 초월합니다"라는 판너 아빠스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 해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이를 따르기 위해 아프리카로 향하는 회원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가 운데 일부가 선교지의 기후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여 열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1892년에는 마리안힐에 있던 수련소를 네덜란드의 헬든 페닝겐(Helden Penningen)으로 옮겼고, 이후에도 증가하는 지원자들을 위하여 1903년 에는 다시 알레 릭스텔로 이전했다. 그리고 1906년 10 월 2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하여 트라피스트회로부터 독 립된 수도회로 인가를 받았다. 이후 그 회원들은 아프리 카뿐만 아니라 유럽 · 북아메리카 · 오세아니아 · 아시아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1997년 9월 현 재 22개 국에서 1,00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기도하고 일하라' 는 베네딕도회의 규칙에 따라 생활 하는 보혈 선교 수녀회는 날마다 드리는 미사를 통해 파 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세상사의 어려움들을 극복하 고 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다. 또 회원들 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불이 이미 타올 랐다면야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루가 12, 49)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선교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업이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이에 대응하면서 예수 성 혈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한국 진출과 현황〕 1979년 여름 '청주 보육원' 원생이 암매장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태 수습을 위해
자문 위원으로 위촉된 신경 정신과 의사 강홍조(글레멘스)는 원생들의 참상을 목격하고서 이 보육원을 인수하 였는데, 이것이 현재의 '충북 재활원' 이다. 그러나 충북재활원이 특수 교사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 자 1984년에 청주교구장 정진석(鄭鎭奭, 니콜라오) 주교는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보혈 선교 수녀회를 초청 하였고, 이 요청에 따라 이듬해 11월 24일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한국인 수녀 3명이 입국하였다. 이들은 곧 바로 청주시 흥덕구의 운천 주공 아파트에 임시 수녀원을 마련한 후, 충북 재활원에서 원생들의 전인적 성장과 인지 발달을 통한 재활을 위해 종사자(보모)들에게 전문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중증 장애아들의 신변 처리 교육을 비롯하여 20세 이상의 원생들에게는 직업 재활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정서 장애아(자폐아 등)들을 위한 특수학교로 '청주성신학교' 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5년 간봉사하였다. 이어 수녀회에서는 1989년 5월, 부강(芙江) 성당 내의 한옥을 수리하여 본원을 이곳으로 잠시옮겼다가 이듬해 10월 6일 현 소재지에 수녀원, 수련소,엠마우스 피정의 집을 각각 신축 · 이전하였다.
현재의 사도직 활동으로는 우선 영구 임대 주택 단지내에 설립된 산남 종합 사회 복지관에서 지역 주민들로 부터 요청받은 제반 사회 복지 사업에 헌신하고 있다. 그리고 1996년 2월에 개원한 혜원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서는 의료(물리 치료, 언어 치료) · 교육 · 직업(취업 알선과사후 지도 등) · 심리(심리 치료, 사회 적응 훈련) 재활 사업을실시하여 장애인들의 잠재 능력 계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그 부설로 정신 지체 및 정서 장애인, 교통 사고나 산업 재해를 당한 중도 장애인들의 재활과 자립을 돕는 장애인 재가(在家) 복지 봉사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또 1993년 7월에는 수녀원 내에 '은혜의 집' (양로원)을 건 립하여 성직자나 수도자의 어머니와 식복사, 무의탁 노 인들의 쉼터로 제공하고 있으며, '믿음과 빛' 이라는 프 로그램을 통해 재가 장애인들에게 신앙과 의지를 북돋워 주는 한편, 장애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올바른 인식 보급 에 힘쓰고 있다. 그 밖에 교구 신학생 및 예비 신학생 지 도, 가정 사목을 비롯하여 청주교구 모충동 본당과 서울 대교구 신림4동 본당 사목에 참여하고 있다. 1997년 9 월 현재 종신 서원자 5명, 유기 서원자 14명, 수련자 3 명, 청원자 2명 등 총 24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판너, 프란츠)
※ 참고문헌 한국 남녀 수도자 장상 협의회 양성위원회 편, 《오늘의 수도자들》, 분도출판사, 1992/ 《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천주교 청주교구청, 《청주교구 연감》, 1995/《천주교 사회 복지 편람》,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사회 복지위원회,1996/ 《레지오 마리애》 109호(1997. 8), 한국 세나무스 협의회/ E.M.Kremer, 9, p. 9231 J.E. Brady, 《NCE》 11, p. 249/ 7, p. 220/《Carh》 9, p. 369. 〔金成喜〕
보혈 선교 수녀회
寶血宣敎修女會
〔라〕Missionarii Pretiosissimi Sanguinis · 〔영〕Missionary Sisters of the Precious Blood
글자 크기
5권

1 / 11
설립자 판너 아빠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