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권

保護權

〔포〕padroado · 〔라〕ius patronatus · 〔영〕royal patro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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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강력한 함대로 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에게 선교상의 보호권을 부여하였다.

교황은 강력한 함대로 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에게 선교상의 보호권을 부여하였다.

교황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에게 부여한 권한. 이는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의 교회 설립권과 주교 후보자 제청권 및 십일조를 징수할 수있는 권한이었다.
〔설정과 폐단〕 강력한 함대를
가지고 항로 개척에 앞 장을 섰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1492년에 콜럼버스(C. Columbus, 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하자 식민지 정복 에 몰두하였는데, 당시 교황인 알렉산델 6세(1492~1503) 는 신대륙에 선교사를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에게 보 급 물자를 수송하고 그들의 신변을 보호할 함대가 없었 으므로 1493년 5월 3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왕에게 식민지 개척의 독점권을 인정해 주는 동시에, 그 식민지 의 선교 활동도 병행할 권한과 임무인 '보호권' 을 부여 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은 브라질, 아프리카 전역 및 인 도, 중국, 일본 등지에서 보호권에 따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고, 1533년에는 인도의 고아, 1576년에는 중 국의 마카오에 교구를 설립하였다. 반면에 스페인은 아 메리카와 필리핀에서 보호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초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국왕들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하 였다. 교황의 훈령이나 국왕의 명령으로도 그들의 만행 을 바로잡지 못할 정도로 식민지 지배자들은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착취하였다. 특히 스페인 식민지의 경우 왕권 에 의하여 주교 후보자가 제청되었으므로, 식민지의 주 교는 왕의 관리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주교들은 성직자 와 수도자 양성을 소홀히 하였고, 교황청으로부터 임명 되는 주교들을 배척하였다. 또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 의 분쟁으로 국력은 쇠퇴해졌고, 포르투갈은 1580년부 터 1640년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 더욱 국력이 쇠퇴 했다. 그 결과 1649년에는 포르투갈과 인도에 각각 1명 의 대주교가 있을 뿐,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과 아프리카에는 한 명의 주교도 없었으며, 인도차이나 반도의 코친차이나(Coachinchia), 말라카(Malacca, 현 말레이시아), 마카오, 일본의 주교좌는 공석이었다. 또한, 17세 기 중엽부터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양의 무역권을 차지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개척 한 식민지를 점령하여, 결국 스페인과포르투갈은 그곳에 설립한 교회와 선교사들을 보호할 능력을 잃게 되었다.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19세기에도 필리핀,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지에서 보호권을 행사하였다.
〔수도회의 선교 활동〕 16세기부터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수도회의 회원 들이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 Xavier, 1506~1552)는 1542년에 인도에 도착 한 이래 일본에까지 복음을 전한 후 중국 전교에 나섰다가 1552년에 사 망하였는데, 그는 유럽의 정신과 동 양의 문화를 접목하려 시도하였고, 이 시도를 이어받은 후속 선교사들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의 선교사들은 성사와 준성사 의 집전에 관하여 특전과 특별 권한을 받았다. 미신자들 의 입교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여기는 한도만큼 내적 법 정에서나 외적 법정에서 교황의 권한을 위임받았고, 교 황 사절처럼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성직 수도회 장상들은 관할권의 범위를 자의로 정할 수 있을 정도로 특권을 누렸으며, 선교 지역 설정권도 부여받았다. 또한 각 수도회가 받은 특별 권한은 각 선교 지역마다 여러 가 지 부칙 조항이 첨부되어 있어서 매우 복잡하였다. 이에 우르바노 8세 교황(1623~1644)은 1637년에 수도회들의 특별 권한에 관하여 7개의 규칙과 5개의 규정으로 이루 어진 원칙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각 수도회는 인종과 문 화가 전혀 다른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 각 지역 에서 제각기 독자적인 방법으로 전교 사업을 수행하였 고, 전교의 성과를 경쟁한 수도회들은 서로간에 모순된 전교 방법까지 사용하여 협력보다는 극심한 불화와 다툼 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복음화에 지장을 초래하였을 뿐 만 아니라 교회 박해까지 자초하였다.

〔교황청의 노력)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왕에게 부여된 보호권의 남용과 국운의 쇠퇴 및 수도회들간의 불화 가 심해짐에 따라, 교황청 내에 전교를 총괄하는 기관의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교는 그 자체로 하 느님의 사업이고 초자연적 영역의 활동이기 때문에 전교사업은 정치적 저의가 개입되게 마련인 국가 권력에 예 속되지 말아야 하며, 전교 사업의 원칙이나 방법에 있어서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되었다.전교 담당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교황 비오5세(1566~1572)는 열교(裂敎, 프로테스탄트)와 미신자를담당하는 2개의 위원회를 신설하였고,
글레멘스 8세 교 황(1592~1605)은 3명의 추기경들로 구성된 '신앙 심의 회' (Congregatio Fidei)를 설치하였으며, 그레고리오 15세 교황(1621~1623)은 1622년에 13명의 추기경들로 구성 된 '포교성'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을 설치하였 다. 이 심의회가 '포교성성' (布敎聖省, Sacra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으로 발전하였고, 오늘날 교황청 부서 중에 규모가 가장 큰 '인류 복음화성' (Congregatio pro Gen- tium Evangelizatione)으로 개칭되었다. 포교성은 전교 사업의 중앙 집권화를 가로막는 큰 장 애인 국왕들의 보호권과 수도회들의 특권을 견제하는 일 부터 착수하였다. 포교성은 전교 지방에서도 교회의 보 편법이 준수되도록 노력하고, 전교 지방에서 시행되고 있는 개별적인 관습이 교회의 정식 제도로 편입되도록 발전시키며, 전교 지방에 맞는 새로운 교회법상의 제도 를 신설하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포교성은 선 교사법을 제정하였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교회의 보편법 으로 편입된 제도가 상당히 많다. 또한 포교성은 '교황 대리 감목 제도' (vicariatus apostolicus)를 신설하여 동양 지 역에서 시행했는데 이 때문에 특히 인도 · 인도차이나 · 시암(태국) 등지에서 포르투갈의 보호권에 의하여 파견 된 선교사들과 교황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 사이에 관할 구역 쟁탈전이 심각하게 벌어졌다.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1857년, 1886년, 1928년, 1929년에 포르투갈과 교황청 사이에 정교 조약(政敎條約이 체결되었으며,포르투갈 정부는 현재까지도 고아와 마카오에서 보호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1950년 7월 18일 교황청과 맺은 정교 조약에 따라, 보호권하의 여러 교구에 대한 교구장 임명권은 포기하였다. 〔조선 교회와 보호권〕 1576년에 마카오가 포르투갈 보호권하의 교구로 설립된 데 이어 1660년에 중국의 남경(南京)교구가, 1690년에는 북경(北京)교구가 역시 포르투갈 보호권하의 교구로 설립되었는데, 조선이 북경교구의 교구장인 구베아(A.deGouvea, 1751~1808) 주교에게 위임됨으로써 조선 역시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경의 포르투갈계 선교사들은 조선에 선교하려 가지도 않으면서 보호권만은 고수하려 하였고, 선교사의 파견과 같은 보호권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선교사로파견하기는 하였지만, 보호권의 의무 수행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또한 다른 선교회에 조선 지역을맡기는 것조차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보호권은 조선 교회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한편, 교황청 포교성이 1831년에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조선 대목구를 설립함으로써 조선은 포르투갈의 보호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대목구 설정 이후에도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계속 보호권을 주장하였고,초대 조선 대목인 브류기에르(B. Bruguière, 蘇) 주교를 횡령자(橫領者)로 간주하면서 조선 입국을 방해하였다.특히 조선 입국 통로인 요동 지역이 북경교구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입국하려는 선교사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요동 지역을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해 주기를포교성에 요청하였고, 교황청은 1838년 4월에 요동 대목구를 설정하고 이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가 1847년 포르투갈의 영토인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함으로써 조선교회를 담당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포르투갈 보호권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었고, 1857년에는 포르투갈 정부와 교황청 사이의 정교 협약을 통하여 포르투갈의 보호권이 중국 본토에서는 광동(廣東)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보호 통치 ; 선교의 역사 ; 인류 복음화성)
※ 참고문헌  정진석, 《교회법 해설》 6,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95/ R.V. Lawlor, Missions, History of the, 7, pp. 227~2341 S.Sipos, Enchiridion Iuris Camonici, Orbis Catholicus-Herder, Romae, 1954/M. Coronata, Institutiones Iuris Canonici, 1~5, Marietti, Romae, 1957/ E.F.Regatillo, Institutiones Iuris Canonici, 1~2, Sal Terrae, Santander, 1963/ 최석우, <조선 교구 설정의 교회사적 의미>, 《교회사 연구》 4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 pp. 59~81. 〔鄭鎮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