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福 - 童貞 - 原罪 - 孕胎大祝日
〔라〕Sollemnitas in Conceptione Immaculata Beatae Mariae Virginis · 〔영〕Sollemnit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of Blessed Mary the Vir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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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성모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됨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었다.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심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기념 하는 축일. 마리아를 기념하는 대표적인 축일 중 하나이 며,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서 제일 첫 번째 사건을 기념하 는 대축일로 12월 8일에 거행된다. 동방 교회에서는 8세기 이후부터 성모 마리아의 어머 니인 '안나의 잉태 축일' 을 기념하여 왔는데, 이 축일은 안나가 오랫동안 아기를 갖지 못하다가 마리아를 잉태하 였다는 외경 작품의 내용과 관련되어 기념되었다. 그 후 이 축일은 11세기 중엽에 성지 순례자들에 의해 영국 교 회에 전해졌고, 12세기 초부터 '마리아의 잉태 축일' 로 기념되었다. 특히 캔터베리의 대주교 성 안셀모(1033~ 1109)의 제자로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승이었던 에드머 (Eadmer)와 같은 영성 저술가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믿음을 주장하였다. 영국에서 프랑스의 노 르망디(Nommandie) 지역으로 전해진 마리아의 잉태 축일 은 곧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노르망디 국가의 축일' 이 되었고, 12세기에는 노르망디의 학생들이 이 축일을 파리에 전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르도(1090-1153)와 토마스아퀴나스(1225~1274) 같은 신학자들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권 인정은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에 대한 교의 에 모순된다고 여겨 이 축일 거행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 하였고, 특히 베르나르도는 이 축일을 전례력에 삽입하 지 않도록 하기 위해 리용의 참사 회원들에게 편지를 보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축일에 대한 일반 신자들의 호응도는 더욱 커져 갔다.
1263년에 이 축일을 받아들인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 원들은 13세기 이후부터는 이를 계속적으로 옹호하여 수도원 내에서 이 축일을 거행하였다. 프란치스코 수도 회 회원이었던 식스토 4세 교황(1471~1484)이 1477년에헌장 <쿰 프레엑스첼사>(Cum praeexcelsa)의 발표를 통해 이 축일을 로마 교구의 전례에 도입하였으며, 노가롤리(Leonardo Nogaroli)에게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미사 경문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이 기도는 성모 마리아가 받은 특권의 본성과 그 근거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훗날 비오 9세 교황(1846~1878)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포한 대칙 서 <인에파빌리스 데우스>(Ineffabilis Deus, 1854)의 작성에 영향을 주었다. 1708년에 글레멘스 11세 교황(1700~ 1721)은 이 축일을 로마 전례에 속한 모든 교회의 의무 축일로 지정하였으나, 공식적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이 된 것은 1854년 이 교의 가 확정된 다음이었고, 이 교의는 1858년의 루르드 (Lourdes) 성모 발현으로 확증되었다. 이 교의가 확정된 지 9년 뒤인 1863년 9월 25일에 교황 비오 9세는 소칙 서 〈구옷 암프리템>(Quod iampridem)을 통해 이 축일의 미사 경문과 시간 전례를 확정 · 발표하였는데, 이 경문 에는 노가롤리가 작성하였던 본기도가 거의 글자 그대로 옮겨져 있다. "동정녀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 심으로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신 하느님,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그 모친을 아무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시었으니, 성모의 전구를 들으시어, 우리도 깨끗한 마 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라는 내용의 본기도는 이 축일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부분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와 한국 교회는 매 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 르(L.M. Imbert) 주교는 1838년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변 경해 주도록 교황청에 요청하였는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1841년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를 조선교구의 주보로 허락하였다. 교회의 믿을 교리로 정식 선포되기 4년 전에 한국 교회와 관련을 맺 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에 대한 신심은 이 후 선교사들과 신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별 히 1861년에는 조선교구 전역을 7개 지역으로 나누면서 성모 마리아 축일명으로 그 명칭을 붙였는데, 베르뇌(S. Berneux) 주교가 담당하였던 서울이 '원죄 없이 잉태되 신 성모 마리아' 였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 이자 서울대교구 주교좌 본당인 명동 성당을 완공하고 1898년 5월 29일 축성식을 거행하면서 '원죄 없이 잉 태되신 성모 마리아' 를 주보로 정하고 봉헌하였다. 그리 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교의 선포 100주 년을 기념하기 위해 반포된 1954년의 성모 성년 때에는 한국 교회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에게 다시 봉헌되기도 하였다. (⇦ 성모 무염 시태 ; → 마리아
론 ; 마리아 축일)
※ 참고문헌 P. Rouillard, Marian feasts, 《NCE》 9, pp. 210~212/ J.P.Lang, Immaculate Conception, p. 260/ E.D. O'Conor, Immaculate Conception, 7, pp. 378~382/ H. Dalmais · P. Jounel, L'église enprière, Introduction a la Liturgie, La Liturgie et le temps, Desclée, 1983(김인영 역, 《전례 주년》, 가톨릭 신학 총서 27,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6). 〔崔成愚〕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