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로테스탄트 목사이자 신학자. 1906년 2월 4일동부 독일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카를(Karl Bonhoeffer)과 파울라(Paula) 사이의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그의 누이 사비네와 쌍둥이였다. 그의 일가는 명망 있는중산 계급으로서 루터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 생활에 적극적인 집안은 아니었다. 종교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종교를 가르치고 성서의 이야기들을 읽어 주기도 하였지만, 아버지는 과학적 불가지론자이며 현실주의자였다. 본회퍼가 14세 때 목사나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자 이에 놀란 가족들이, 교회는 빈약하고 시시한 부르주아 제도라면서 음악가가 될 것을 권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내가 교회를 개혁하겠다" 고 대답한 그는, 17세때인 1923년에 튀빙겐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형 클라우제와 함께 한 학기동안 로마에 머무르면서 북아프리카를 여행하였다. 그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로마 교회의 보편성과 전례를 통해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지역성 · 민족성 · 편협성을 깨닫게 되었다.
1924년에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본회퍼는 하르나크(A. von Harnack) , 홀(K. Holl), 제베르크(R. Seeberg) 등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들에게서 신학을 배웠지만, 카를 바르트(Karl Barth)의 변증법적 신학에 동조하였다. 1927년에 제베르크의 지도로 박사 학위 논문인 <성도들의 친교>(Sanctorum Communio)를 제출하여 최우등으로 졸업하였고, 1928년 한 해 동안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독일인 교회에서 부목사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2월에는 교수 자격 논문 <행동과 존재>(Akt und Sein)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1930년부터 1년 동안은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당시 그는 뉴욕의 흑인 빈민가 할렘(Halem)에 관심을 갖고 거의 매주일 그곳 예배에 참여하면서 흑인 영가가 담긴 레코드를 수집하였다. 또한 유니온 신학교에서 니버(Reinhold Niebuhr) 교수와 레만(Paul Lehman) 교수를 알게 되었고, 프랑스의 젊
은 목사 라세르(J.Lasserre)와 사귀면서 그를 통해서는 반전 평화주의를 배웠다.
〔활 동〕 교회 활동 : 1931년에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설교가로서 교회 일치 운동가로서 그리고 신학 교수
로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해 가을 학기부터 1933년 여름 학기까지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20세기 의 조직 신학의 역사' , '교회의 본질' , '창조와 타락' , '그리스도론' 등의 주제로 강의를 하였다. 또한 이 시기 에 그는 베를린에 있는 공과 대학의 교목으로 있으면서 빈민가 청소년들의 교리 교육도 담당하였으며, 세계 교 회 연맹의 청년부 간사로서 교회 일치 운동에도 참여하 였다. 당시 교회 일치 운동은 민족주의가 지배하였던 독 일 사회와 교회로부터 국제주의로서 배척받고 있었다. 1933년 1월에 히틀러(A. Hitler)가 집권하였는데, 당시 대다수의 교회는 나치에 동조하였고 반유대인주의(anti- Semitism)에 물들어 있었다. 같은 해 4월 7일에는 유대인 또는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은 국가의 공직을 일절 가질 수 없도록 하는 <아리안 조항>(Arierparagraph)이 제정되 어 교회에도 적용되었다. 이에 나치의 권력에 대항하여 교회의 본질을 지키려는 교회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 에 앞장선 본회퍼는 그 해 11월에 선포된 <베델 신앙 고 백서> 초안을 작성하는 데 참여했으며, 독일 복음주의 교 회의 총회가 <아리안 조항>을 받아들이자 니묄러(Martin Niemöler)와 함께 '목사 긴급 동맹' (Pffarrernotbund)을 조 직하였다. 한편 교회의 선배들이 <아리안 조항>을 받아들이고 베 를린 대학 신학부가 침묵을 지키자, 이에 실망한 본회퍼 는 1933년 10월 17일 런던의 독일인 교회에서 목회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치체스터 (Chichester)의 주교인 벨(Bell)과 친분을 맺었다. 당시 독 일에서는 나치의 이념에 따라 민족적 그리스도교를 지향 하고, 나치 혁명을 하느님의 계시로, 히틀러를 독일 민족 의 메시아로, 그리고 나치를 행동하는 적극적 그리스도 교로 보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본회퍼는 이들에 대항하는 고백 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을 세계에 알 리는 역할을 하였는데,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배우기 위 해 인도 방문을 준비하던 중에 독일의 고백 교회로부터 고백 교회 신학교의 책임자로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인 도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1935년 5월에 다시 독일로 돌 아왔다.
1935~1939년 핑켈발데(Finkelwalde) 신학교에서 고 백 교회를 지원하는 목사 후보생(신학 대학 졸업자)들을 교육하였던 그는, 이곳의 '형제의 집' 에서 공동 생활을 하면서 명상과 예배를 강조하는 엄격한 영적 훈련을 추 구함으로써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사에서 수도원 전통 을 회복시켰다. 훈련생들은 이곳에서 같이 살고, 같이 기 도하고, 같이 성서의 말씀을 명상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 고 용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은퇴가 아니고 세상에서의 힘있는 봉사를 위한 내적이고 정신적 인 집중이었다. 핑켈발데 신학교는 1937년 9월에 폐쇄 당하였다가 그 해 12월에 다시 인정을 받았으나, 1940 년 3월에 국가 비밀 경찰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었다. 이 시기에 예수의 산상 설교를 강의한 내용이 《나를 따르 라》(Nachfolge, 1937)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 에서 그는 믿음과 복종을 일치시키며 원수에 대한 사랑 을 강조하고, 비폭력 평화주의를 역설했다. 또 '형제의 집' 의 공동 생활 기록을 담은 《공동 생활》(Gemeinsames Leben)이 1939년에 출간되었다. 고백 교회의 투쟁이 치 열하던 시기에 박해받는 고백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는 "누구든 고의적으로 고백 교회를 떠나는 자 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진다" 고 주장하였고, 박해받고 죽 어 가는 유대인을 위해서는 "유대인을 위해 소리 높여 외치는 자만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를 자격이 있다!"고 외쳤다. 정치 투쟁과 죽음 : 1939년 6월 군대 소집 영장을 피 해 미국으로 간 본회퍼는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 식을 듣고, "나의 백성과 이 시기의 고난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독일로 돌아왔다. 1939년 9월에 전쟁이 일어난 후 고백 교회 운동이 불가능해지고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행동 없는 평화주의는 현실 도피로 여기 고, 책임 있는 정치적 행위로 나갔다. 그의 집안도 나치 정권에 항거하였는데, 형 클라우제를 비롯하여 매부 도 나니(Hans Dohnanyi)와 슐라이허(R. Schleicher)가 나치 정 권 전복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본회퍼는 매부 도나니를 통해서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려는 군 정보부의 비밀 계 획에 가담하였다. 1941년 1월에는 법적으로 독일군 정 보부의 민간 정보원이란 신분을 얻었는데, 그의 역할은 이 거사 계획을 세계 교회에 알리고 히틀러 정권이 전복 되었을 경우 연합군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를 알아 내고 독일에 대한 적대 감정을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자주 해외 여행을 하였으며, 자신의 신 분을 철저히 감추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유대인들을 해외로 도피시키는 일도 하였고, 미완 성 작품이 된 《윤리》(Ethik, 1949)를 저술하였다. 1943년 4월 5일에 본회퍼는 국가 비밀 경찰에 체포되 어 1945년 4월 9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옥중에서 비종 교적 신앙과 실천을 강조한 《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 1951)을 저술한 본회퍼는, 죽기 전에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삶의 시작이다" 라고 말하고 기도를 바친 후 당당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사 상〕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서 책임 있게 행동했던 본회퍼는 놀라운 집중력과 학문적 역량을 가지고, 현실에 적합하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신학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그러 나 그의 신학 주제들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했고, 단편적 이며 완결되지 않은 글들도 많다. 배경 : 본회퍼는 시대의 과제와 도전에 응답하기 위해 전통적인 신학과 씨름하면서 새로운 신학적 전망을 열기 위해 노력하였던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은 시종일관 루 터 신학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믿 음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루터의 교리가 <성도 들의 친교>에서부터 《윤리》에 이르기까지 본회퍼 신학의 중심을 이룬다. <성도들의 친교>에서 교회는 "교회 공동 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 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재(顯在)는 "인의(認義)의 말씀에서 성립한다." 또한 《윤리》에서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삶의 근원과 본질 은··· 인의의 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다" 라고 하였다. 16~17세기에 루터파와 칼뱅파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고전적인 논쟁인 "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있 는가 없는가" (Finitum capax aut non capax infinit)라는 물음 에서 본회퍼는 유한이 무한을 포함할 수 있다는 루터파 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하느님과 세상의 현실을 긴밀히 결합하는 신학 구조를 형성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 공동체를 일치시킨 <행동과 존재>에서는 "하느님 은···교회 안에서, 그의 말씀 안에서 가질 수 있고 잡을 수 있게 현재한다" 하였고, 《윤리》에서는 "그리스도 현실의 한 영역 안에서 하느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서로 결합되었다" 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저항과 복종》 에서는 그리스도의 육화 사건과 "유한이 무한을 포함할 수 있다"는 원리의 결합(유한과 무한의 역설적 일치)에서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우리는 하느님 없이 살 아야 한다"는 역설적 표현이 언급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과 겸손된 복종을 결합 하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서 는 "믿는 자만이 복종하고 복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는 명제로 표현되었다. 복종을 거부하는 "값싼 은혜는···하 느님 말씀의 인간 됨을 부정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그 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참여로 신앙을 파악하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본회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메시 아적 고난에 참여하는 것" 을 신앙으로 이해하였다. 그러 나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전기적 상황, 그리고 신학적 관 심이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신학은 차이가 있다. 루터 가 수도원에서 세상으로 옮겨 왔다면 본회퍼는 세상 안 에서 공동체적 신앙 훈련을 추구하였으며, 루터가 두 왕 국설을 강조한 반면 본회퍼는 두 영역의 사고를 극복하 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강조하였다. 루터의 신학이 개인 의 믿음과 구원에 초점을 두었다면, 본회퍼의 신학은 공 동체적 집단적 인격과 책임적 행위에 주목하였다. 루터 가 왕권의 가부장적 권위를 강조하였다면, 계몽주의 시 대와 산업 문명의 발달을 경험한 본회퍼는 성숙한 세상 에서 인간의 자율적 · 주체적 행위를 추구하였다.
베를린 대학에서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들에 게서 세상과 인간 현실에 대한 신학적 긍정과 관심을 물 려받았으나, 그들의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신학 적 성향과 정치 현실에 대한 무력한 타협과 유착에 대해 서는 철저히 비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등장한 변증법적 신학에 동조해서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신학의 적법한 자리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교적 사고와 행위의 불가결한 원천과 규범으로 여겼다. 본회퍼와 바르트의 신학적 차이는 하느님의 계 시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드러난다. 시종일관 자유주의 신학과 대결한 바르트의 신학은 하느님과 인간 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낡은 인간성과 세상을 심판 하고 변혁하는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낡은 세 상에 대해서는 신학적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육화 사건을 통해 하느님이 세상의 현실 속으로 들어온 것을 강조한 본회퍼는, 세상과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자유주의 신학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 그 리스도의 계시 사건을 신학적 사고의 중심에 놓은 점은 바르트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발전 과정 : 베트게(E. Bethge)가 방대한 전기 《디트리 히 본회퍼 : 신학자, 그리스도인, 시대인》(Dietrich Bon- hoeffer : Theologe, Christ, Zeitgenosse)을 저술한 이후 본회퍼 연구자들은 시대적 · 전기적 상황의 변화 속에서 그의 신 학의 변화와 연속성을 함께 보게 되었다. 베트게는 본회 퍼의 신학적 실존의 정체성에 따라서 그의 신학을 세 시 기, 즉 신학자(1923~1931/1932), 그리스도인(1931/1932~ 1939), 시대인(1939~1945)으로 나누었다. 첫째 시기에는 <성도들의 친교>와 <행동과 존재>를 통 해 신학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본회퍼는 교회 공동체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하고, 교회의 존재 근거를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찾음으로써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 구조를 '서 로 위함' 과 '더불어 있음' 으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하느 님의 초월은 개인의 경계에서가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된다고 하였다. 이 저서들에서 중심 주제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자유' 와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 이다. 둘째 시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투철한 신앙을 가 지고 교회를 위한 실천적 봉사에 몰두하면서 교회 투쟁 의 중심에 섰던 시기인데, 이때 출판된 《창조와 타락》 (Schöpfung und Fall, 1933)과 《그리스도론》(Christologie)은 베를린 대학에서의 강의 주제였다. 《창조와 타락》에서는 하느님이 세상적 삶의 중심과 경계로 나타나며, 《그리스 도론》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중심이면서 실존 · 역사 · 자연의 중심이다. 같은 시기의 《나를 따르라》와 《공동 생 활》은 거짓 교회와 거짓 교회를 지배하는 악한 권력에 맞서 참된 교회를 지키고 실현하려는 교회 투쟁의 과정 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저서들에서는 교회 공동체에 대 한 그리스도의 주권이 강조되고 교회 공동체와 세상의 대립이 부각되었으며, 그리스도를 따름과 비폭력적 평화 의 신념이 두드러진다. 셋째 시기에는 교회의 영역 밖에서 신학이 전개된다. 이 시기에 본회퍼는 교회 밖의 직업에 종사하는 인물들 과 연대하여 유대인을 구하고 독일을 멸망에서 건지기 위해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의 신학은 《윤리》와 《저항과 복종》에 담겨 있다. 육화를 강조하는 《윤리》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 느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일치되고 화해되었다. 인 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느님과 참된 세상 현실을 만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세상 의 현실에 참여하도록 촉구된다. 반면에 《저항과 복종》 에서는 비종교적 해석을 주장하였다. 그에게서 종교는 개인의 내면성과 타계적(他界的) 피안(彼岸)에 집착하 는 부르주아적 그리스도교 신앙, 허구적인 '전능한 하느 님' 표상에 의지하는 무책임한 신앙이다. 그는 악한 세 력이 지배하는 '하느님 없는 현실' 에서 하느님의 약함과 고난을 설명한다. 무신론적인 세상에서 하느님은 고난받 고 약한 모습으로 세상 안에 현재하고 세상을 구원한다. 그래서 약하고 고난받는, 비종교적인 하느님 표상은 "타 자를 위한 인간 예수" 라는 그리스도론적 진술과 결합된 다. 본회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메시아적 고난 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였다. <성도들의 친교>의 '대리자 그리스도', 《나를 따르라》의 '그리스도 를 본받음', 《윤리》의 육화 신학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 느님의 현실에의 참여'와 같은 주제들이 종합적으로 《저 항과 복종》에 나타난다.
근본 관심 :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라 는 물음 속에 본회퍼의 근본 관심이 집약되어 있다. 이 물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과 오늘 우리의 세상에 대한 관심이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는 구체적인 모습과 형태' 에 그의 신학 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성도들의 친교>에서는 교회 공 동체로서 실존하는 그리스도가 주제였고, 《나를 따르라》 에서는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제자직에서 그리스도의 현 재를 추구하였으며, 《윤리》에서는 하느님 현실과 세상 현실의 화해와 일치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려 하였으 며, 《저항과 복종》에서는 비종교적 해석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려 하였다. 본회퍼 신학의 그리스도 론적 집중은 그로 하여금 관념적 · 사변적 가능성에서 구 체적 현실성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본회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육화와 대속에 대한 관 심은 고난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었으므로 육 화 안에서 온 인류는 하느님의 형상의 존엄을 회복한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인간에 대한 공격도 인간의 형상을 취한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이다." 본회퍼는 하느님을 초 자연적인 것에서나 종교적인 경험에서가 아니라 이웃에 게서 만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하느님)와 이 웃의 상호 공속성을 드러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타인 을 위한 존재이듯이, 그리스도인과 교회도 타자를 위한 존재인 것이다.
〔평가와 영향〕 육화 신학을 바탕으로 본회퍼는 '성숙 해진 세상'을 긍정하는 새로운 신학을 제시하였다. 그는 전통과 권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성숙한 인간 세상을 추구했던 계몽주의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포이어 바흐(L. Feuerbach, 1804~1872)와 니체(F. Nietzsche, 1844~ 1900)와 마르크스(K. Marx, 1818~1883)의 종교 비판을 인 정하였다.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본회퍼의 지속적인 관심 은 역사의 변화에 대한 인식과 근본적인 신학적 통찰에 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르주아 계급 다음에 프롤레타리 아 계급이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한 그는, 노동자의 세상 적 삶이 비종교적 해석의 대상임을 시사하였다. 그의 비 종교적 신학의 특징은 성숙해진 세상과 그리스도를 직결 시킨 데 있었다. 십자가에서 비종교적 하느님과 성숙한 세상이 드러난다. 성숙한 세상을 긍정함으로써 계몽주의 이후의 세계사적 진보 과정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는 십자가 신학에 의해서 계몽주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신격화하거나 회의주의적 · 불가지론적 체념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의 새로운 신학은 전통의 폐기가 아니라 새로운 해 석이고, 교회의 부정이 아니라 교회의 쇄신을 추구한 것 이었다. 더 나아가서 성숙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메시아 적 고난에 대한 인간의 참여를 강조하고, 하느님과 인간 을 구원의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로 인 해 본회퍼는 서유럽의 정치 신학과 세속화 신학뿐만 아 니라 제3 세계의 해방 신학을 포함하여 현대 신학 전반 에 놀랄 만큼 폭 넓고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 → 고백 교회 ; 바르트, 카를)
※ 참고문헌 박재순,《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디트리히 본회 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 한울, 1993/ 박봉랑, 《基督敎의 非 宗教化-본회퍼 研究》, 범문사, 1975/ E. Bethge, Dietrich Bonhoeffer: Theologe, Christ, Zeitgenose, Miinchen, Chr. Kaiser Verlag, 1967/ G. Krause, 《TRE》 7, pp. 55~66. 〔朴在淳〕
본회퍼, 디트리히(1906~1945)
Bonhoeffer, Dietrich
글자 크기
6권

디트리히 본회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