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기원과 출현
Ⅱ. 봉건제에서의 의무와 관계
Ⅲ. 정치 형태
Ⅳ. 실례와 변모
Ⅴ. 의의
중세 초에 사회 · 군사 · 정치 등 여러 측면에서 나타났던 장치들을 가리키기 위해 근대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용어. 이 용어는 중세 라틴어에서 '봉토' (封土)를 의미하였던 '페우' (feudum)에서 유래되었으며, 중세 때 이 용어는 대개 군사적 봉사에 대한 대가로 주군(主君)이 봉신(封臣)에게 부여한 영지(領地)를 가리켰다. 봉건 사회는 거의 모든 토지가 봉토의 형태로 보유되는 사회, 더 일반적으로는 사회와 정치의 기본적인 구조가 봉토 보유를 통해 결정되는 사회였다. 더구나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면만이 아니라, 충성의 서약으로 봉신은 주군에게 매여 있었다. 게다가 봉신은 대개 자신의 봉토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통치자이기도 하였다.
Ⅰ. 기원과 출현 〔기 원〕
봉건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봉신과 주군 이 충성의 서약으로 맺어지는 관계는 게르만족의 종사제 (從士制)에서 비롯되었다. 게르만의 족장은 군사적 모험 을 감행할 때 용맹한 젊은이들을 모았는데, 이때 젊은이 들은 무기와 식량과 의복을 제공받고 약탈물을 나누어 받는 대가로 족장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하였다. 이 러한 종사제가 봉건제 아래에서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 계인 주종제로 변형되어 중세 동안 사회를 결속시키는 기본적인 매듭이 되었다. 반면에 특정한 봉사를 바치는 대가로 토지를 보유하는 행태는 옛 로마의 토지법에서 비롯되었다. 프랑크족이 지배하던 갈리아 지방에서는 그 렇게 보유된 토지를 은대지(恩貸地, benefice)라고 불렀는 데, 9세기 이후에는 '페우둠' (feudum)이란 말이 더 널리 사용되었다. 이처럼 봉건제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아주 이른 시기에 이미 존재하였었으나, 그것들은 서로 떨어져 있었다. 주 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전사가 주군으로부터 은대지를 부 여받은 경우는 드물었으며, 또한 사법권과 토지 보유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봉건제의 출현을 설명하기 위해 서는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결합하여 봉신 이 봉토를 보유하고, 그 봉토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이루 어 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출 현〕 봉건제의 발전에서 중요한 첫 단계는 8세기 초에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 카를 마르텔(Karl Martel, 714~741)이 기병(騎兵)을 커다란 규모로 창설하였던 때 였다. 말을 타고 중무장한 기병 앞에서 보병은 완전히 무 력했으나, 이러한 장비들은 너무나 값비쌌고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려면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하기도 하였 다. 따라서 기병이 되려면 말과 장비를 갖출 수 있을 만 큼 부유하여야 했고,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필요에서 벗어나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은 화폐 수입이 거의 없었으므로 카를 마르텔은 기병 하나 하나에게 토지와 그 토지를 경작할 노동력을 마련해 주 어야만 하였다. 그는 기병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의 서 약을 받음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봉신(vassi dominici)으로 삼았고, 그 대신 고위 성직자들로 하여금 전사들에게 교 회 토지를 은대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종제 와 은대지 보유의 결합은 크게 보편화되었다. 봉건제의 발전에 있어서 두 번째의 결정적인 국면은 9~10세기에 카를 대제(Karl der Grosse, 768~814)의 제국 이 무너져 가는 중에 찾아왔다. 카를 대제가 죽은 뒤 그 의 자손들 사이에서 발생한 격렬한 내란은 거의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상황을 빚어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혼 란이 바이킹과 이슬람과 마자르의 침략으로 더욱 심각해 짐에 따라 전사들이 날뛰는 시대가 되었다. 더구나 가장 크게 필요로 하였던 전사는 갑주(甲胄)를 갖추어 입은 기병이었다. 혼란의 시대였던 9세기에는 봉건 영주가 새로운 계층 으로 강력히 대두되었다. 즉 왕권이 봉건 영주에게 양도 되고 있었으며, 하층민들은 스스로 봉건 영주의 지배하 에 들어왔다. 내란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권력을 다투는 왕들은 전사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많은 경우 그들 에게 왕령지의 일부를 봉토로 내려 주곤 하였다. 또한 어 떤 영주가 국왕의 군대에 일정한 수의 기사를 제공하기 로 되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영지로부터 그가 거느린 기 사들의 생계와 장비를 뒷받침하기 위한 봉토를 다시 떼 어 내곤 하였다. 물론 영주는 기사들을 자기 집안에서 모 여 살게 할 수도 있었다. 사실상 중세 내내 모든 중요한 영주들의 주변에서는 그러한 식객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식객 기사들을 두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 움이 따랐다. 초기의 성채들은 그렇게 크지 못하였기에 많은 전사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은 정말로 성가신 일이 었고, 더구나 젊은 기사는 결혼을 하여 자신의 집과 독자 적인 수입 그리고 자신만의 일을 위한 시간을 갖고 싶어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명백한 방 책은 그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충분 한 봉토를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봉(分封)의 과정 속 에서 영주는 종종 자신의 영지를 독자적으로 통치할 권 한을 얻어냈는데, 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프랑크 왕국의 경우 정치적 · 사법적인 권한은 '백작' (伯 爵, count)들이 행사하였으나, 프랑크 왕들은 규모가 커 다란 교회 기관에 종종 '불입권' (不入權, immunity)을 부 여하였다. 이는 백작이나 그의 관리가 불입권을 지닌 교 회의 영지에 들어갈 수 없음을 뜻하였다. 9세기에는 거 의 모든 불입권 보유자가 범법자에 대한 재판과 처벌까 지 직접 행하였다. 그런데 9세기에는 보편적으로 봉건 영주가 교회의 토지에 대한 보호를 떠맡게 되면서 교회 로부터 이러한 사법권까지 넘겨받았고, 왕들은 이따금 강력한 봉신에게 봉토를 하사하면서 백작의 정치적 권한 까지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강력한 영주가 이러한 권한 을 찬탈하는 것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10세기 말에 와서는 통치권이 영주 계층 사이에 널리 분 산되었다. 극형을 선고할 수 있는 영주는 훗날 '고등 사 법권' (highjustice)이라 불리게 된 권한을 지니게 되었고, 교수대를 소유하는 것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반면에 하층민이 스스로 강력한 봉건 영주 아래로 들 어갔던 과정은,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상황 특히 바이킹의 침략이 부추긴 결과였다. 옛 프랑크의 군 사 제도는 주로 약탈을 위한 공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 었으며, 프랑크 군은 전통적으로 초여름에 왕국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모여들어 대규모 군대를 이룬 다음 정기적 인 여름 원정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바이 킹은 그렇게 프랑크 군이 편성될 무렵이면 이미 약탈을 마치고 바다로 나가 있었으므로, 그들을 효과적으로 막 아내려면 각 지역마다 군사력이 마련되어야만 하였다. 이는 정치적 분권화를 부추기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 용하였고, 평범한 자유민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사 의 보호를 받아들여 예농(隷農)의 지위로 떨어지든지, 아니면 스스로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 다. 그러나 싸울 능력이 있고 기사가 될 만큼 재력을 갖 춘 상층의 자유민조차도 혼자서는 자신의 재산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경우, 자신의 토지를 더 강 력한 유력자에게 넘겨주고는 그것을 봉토로 되돌려 받으 면서 그 유력자의 봉신이 되곤 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9세기에는 주군과 봉신의 관계 로 얽혀진 위계 질서가 발달하게 되었다. 평기사는 좀더 큰 영지를 지닌 영주의 봉신이 되었고, 그 영주는 다시 더 큰 세력을 지닌 사람 예컨대 백작의 봉신이 되었다. 또한 그러한 백작은 다시 더 강력한 백작이나 공작 또는 왕의 봉신이 되었다. 즉 정점에는 왕이 있고 바닥에는 평 기사들이 있는 신분의 거대한 피라 미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Ⅱ. 봉건제에서의 의무와 관계
봉건적 위계 질서가 형성되어 가 던 시대에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 는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주군이 언제라도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었 고 생애 동안만 보유될 뿐이었던 봉 토가 세습화된 것이었다. 이러한 변 화를 낳은 기본적인 원인은 어떤 봉 신이 죽었을 때 그의 장성한 아들로 하여금 그 봉토를 상속하지 못하게 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에 있었다. 그 래서 10세기에 와서는 대부분의 봉 토가 세습되었다. 그럼으로써 주군 이 봉토를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는 한, 봉신의 의무는 주군의 뜻에 따라 정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봉토가 세 습화되자 봉신의 의무는 봉신과 주 군 사이의 상호 계약에 따라 규정되 었다. 주군은 봉신이 계약을 위배하 였을 경우에만 봉토를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되었고, 주군과 봉신이 서로 에게 어떤 의무를 지고 있는가를 규정한 계약 조건은 개 개의 영주와 봉신 사이에서 개별적으로 결정되었다. 더 구나 봉신들은 주군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입장에 있었으 며, 주군은 그의 봉신들이 서로 짜고 그에게 대항하는 경 우 위협을 받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봉신들은 그가 이 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전투 병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리하여 주군의 주재 아래 봉신들이 모여 있는 가운 데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가 규정되는 것이 관례가 되 었고 그 결과 개개의 봉토는 각각 고유한 관습을 지니게 되었다.
봉건적인 관행은 때와 곳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봉 신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까지 사법권을 소유하고 있는 가, 봉신이 주군에게 과연 어떠한 봉사를 제공해야 하는 가, 그리고 봉토가 상속되는 세세한 규칙은 어떠한 것인 가 따위에 관련된 모든 것이 봉토에 따라 달랐다. 더구나 봉건제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때, 그 지역에서 나타난 봉건제의 실제 양상은 그 지역의 기존 상황(예컨대 영국에 서는 앵글로-색슨의 제도가 얼마간 남아 있었던 것, 그리고 시칠 리아에서는 비잔틴 제국의 행정 전통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말 미암아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주로 북부 프랑스에서 시작된 봉건적인 관행들이 12세기에 대부분의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를 통해 봉건 사회에서 비교적 일반적 으로 통용되던 관행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에의 협력〕 봉건적 관계가 지닌 기본적인 목적은 전쟁에 협력하는 데 있었다. 주군의 역할은 그의 봉신과 그 봉신의 토지를 보호하는 것이었고, 봉신의 주된 역할 은 주군의 군대에서 복무하는 것이었다. 바이킹의 침략 이 서유럽을 괴롭히고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초창기 에는 주군이 봉신에게 요구할 수 있는 군사적 봉사에 제 한이 없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봉신들은 두 가지 유 형의 전쟁, 즉 공격전과 방어전을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주군의 봉토가 침략당하고 있는 경우 그의 봉신들은 적 이 물러날 때까지 주군에게 봉사해야만 한 반면에, 주군 이 이웃한 영주의 땅을 약탈하든지 다른 사람의 성채나 촌락을 빼앗으려 하는 경우에는, 봉신들은 군사적 봉사 의 의무를 한정지으려 하였다. 대체로 공격전에서 봉신 이 종군해야 하는 기간은 한 해에 40일이었다. 어떤 봉 토에서는 봉신이 40일 동안은 자기의 비용으로 종군하 고, 그 다음 40일 동안은 주군이 그와 그의 말을 먹여 준 다는 조건으로 종군하였으며, 또 다른 경우에는 종군 기 간이 30일이거나 또는 그보다 더 짧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 봉토에서든 공격전과 방어전이 구별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주군의 군대에서 복무할 의무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는 주군의 성채를 지키는 수비대에 참여하여 봉사 하는 의무를 들 수 있다. 11세기에는 모든 유력한 영주 가 하나 이상의 성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봉신들은 그 성채를 수비해 줄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의무는 봉토 에 따라 크게 달랐는데, 고작 몇 명에 지나지 않는 봉신 들만을 거느린 보잘것없는 주군은 봉신 가운데 하나에게 주군의 직속 기사와 농민들을 지휘하여 성을 지키도록 상근(常勤)을 명령하였지만, 많은 봉신을 거느린 유력한 주군은 강력한 수비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성채를 수비할 봉신의 의무는 30일 또는 40일로 제한되 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궁정 회의 참석〕 군사적 봉사를 제외하고 봉신의 가 장 중요한 의무는 주군이 부르면 언제든지 주군의 궁정 (court)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려면 그에 앞서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생각은 중세 사람들의 관념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특히 수 도원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수도원 원장은 수도원 전체의 이익에 관계되는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수도회 회원들의 의견을 묻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또한 봉건적 관습의 기본적인 특징이기도 하였다. 주군과 그 의 봉신은 봉토에 대해 공통된 이해 관계에 있었으며, 봉 토에 관계된 일은 그들 모두의 관심 거리였다. 주군은 자 기 아내나 며느리 또는 사위를 고르기 전에 봉신들의 조 언을 구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십자군에 나가거나 이웃 영주와 전쟁을 하려 할 때에도 그에 앞서 먼저 봉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요컨대 봉토 전체의 이해에 관계되는 어 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주군은 관례적으로 봉신의 의견을 물었는데, 이는 특히 주군이 봉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경우에는 더욱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주군에게 솔직한 도움말을 주는 것은 봉신의 중요한 의 무였다.
주군의 궁정에 모인 봉신들은 주군과 봉신 또는 봉신 과 봉신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분쟁을 해결하기도 하였 다. 주군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한 봉신을 비난한 경우, 이 문제는 주군의 궁정에서 다루어졌다. 한 봉신이 자기의 권리를 침해하였다고 주군을 고발한 경우나 한 봉토의 상속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였을 경우에도 마찬 가지였다. 봉토의 봉건적 관습은 바로 이러한 주군의 궁 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군은 도움 말을 구하거나 심의할 문제가 없는 경우에도 자기의 위 신을 세우기 위해 봉신을 소집하였다. 어떤 사람이 봉건 적 위계 질서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가는 주 로 전투에서 그를 따라 싸우는 전사가 몇 명이나 되는가 로 결정되었으므로, 봉신은 주군이 부르면 달려나가 주 군의 위신을 높여 주어야 했던 것이다.
〔경제적인 의무〕 봉신은 주군에게 상속세(relief)를 낼 의무가 있었다. 아마도 상속세는 봉토가 세습화되기 전에 주군이나 봉신이 죽었을 경우 봉토의 승계를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해 바치던 보증금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봉토가 세습화되자 상속세 를 내는 것은 봉건적 의무가 되었다. 원래는 주군이나 봉신이 죽었을 경 우 언제나 상속세가 부과되었으나, 11세기에는 대개 봉토가 실제로 상 속되었을 경우에만 부과되었다. 상 속세는 군사 장비(죽은 봉신의 무기와 갑주)로 납부되는 경우가 가장 많았 지만, 12세기에는 화폐로 납부되었 다. 주군이 요구할 수 있는 상속세의 액수는 일반적인 규칙은 없지만, 봉 토의 한 해 수입에 해당하는 정도가 알맞다고 여겨졌다. 봉신의 또 다른 의무는 경제적 부조(aid)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주군은 자기의 수입보다 더 많은 재화(財貨) 가 필요할 경우 자연스럽게 그의 봉신들에게서 도움을 받으려 하였다. 새로 주군이 된 피상속인은 그가 상속받 은 봉토에 대한 상속세를 내는 데 봉신들이 도움을 주리 라고 기대하였다. 주군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의 몸값을 거두는 것은 봉신들의 의무였다. 주군의 장남이 기사로 서임되거나 장녀가 결혼할 때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는 데, 이 잔치에 드는 비용을 봉신들이 내야 했다. 또한 주 군은 십자군을 떠나거나 새로 성채를 세우는 따위로 자 신이 낼 수 있는 것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사업을 하 려 할 때에는 언제나 봉신들로부터 부조금을 거두었다. 11세기에는 부조가 두 종류로 나뉘어, 주군이 당연히 요 구할 수 있는 부조와 강제성이 없는 부조로 구별되었다. 대체로 모든 봉토에서 주군의 몸값과 장남의 기사 서임 식비 그리고 장녀의 혼인 잔치비를 부조하는 것은 봉신 의 의무로 여겨졌다. 어떤 봉토에서는 주군의 상속세를 부조하는 것도 이러한 강제적인 부조의 범주에 들어 있 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목적을 위한 부조를 바라는 경우에는 주군이 봉신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봉신은 부 조를 거부할 수 있었다. 모든 봉토의 봉신에게 공통된 경제적 봉사는 상속세와 부조뿐이었으나, 주군에게 숙식을 제공할 의무도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숙식 제공의 제한이 없어 서 주군이 봉신을 방문할 때는 언제나 봉신이 주군과 주 군의 수행원들을 대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 남에 따라 이 의무는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주군이 봉 신을 방문할 수 있는 횟수와 그 기간, 그리고 수행원과 말의 수까지 뚜렷하게 규정되었다. 때로는 사람과 짐승 에게 줄 음식의 종류와 양까지도 합의 또는 관습에 따라 규정되었다.
〔봉신과 봉토에 대한 주군의 권리〕 주군은 봉신과 그 의 봉토에 대해 봉건적 관계의 기본적인 성격에서 비롯 되는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어떤 봉신의 딸이 결혼하는 경우, 딸은 아버지의 봉토 가운데 일부를 결혼 지참금으 로 남편에게 가져 가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봉신의 사위가 되는 사람은 주군의 토지에 대한 이해 관계를 지 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주군도 자신의 적이 자기 봉 신의 사위가 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봉신은 자신의 사위가 될 사람에 대해 주군의 재가를 얻 어야만 했다. 또 너무 어려서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아 들이나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을 남긴 채 봉신이 사망한 경우에는 봉토에 부과되는 의무를 수행할 사람이 없었으 므로, 주군은 봉토 관리자를 지명하여 그로 하여금 의무 를 대신 수행하게 만들 권리가 있었다. 몇몇 경우에는 피 상속인의 친척이 봉토 관리자가 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러한 경우 대개는 봉토를 상속받을 자격이 없어 피상 속인을 제거할 동기를 갖고 있지 않은 피상속인의 첫째 외삼촌에게 이 의무가 맡겨졌다. 친삼촌이 봉토 관리자 가 되면, 그가 조카를 제거하고 봉토를 차지하려는 유혹 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주군 스스로가 피상속인과 그 봉토의 후견인 또는 관리자가 되기 마련이었다. 피상속 인이 남자일 경우, 주군은 피상속인이 성년이 될 때까지 봉토를 보유하고 관리하였다. 피상속인이 여자일 경우에 는 봉토에 부과되는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남편감을 찾 아 주는 것이 주군의 도리였는데, 이는 주군의 가장 귀중 한 특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 주군에게는 언제나 봉토를 얻으려는 젊은 기사들이 식솔로 속해 있었고, 그 들의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들을 봉토를 상속받은 여자와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자들은 부유한 피상속녀와 결혼할 권리를 얻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주군에게 바쳤고, 피상속녀들 역시 그녀 들이 싫어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 막대한 금 액을 주군에게 바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이 특권은 매 우 높은 수입원이기도 하였다. 봉신이 주군과 그의 궁정으로부터 피상속인으로 인정 받을 만한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사망하였을 경우에 봉 토는 주군의 소유로 복귀(escheat)되었다. 한 봉신이 주군 의 궁정에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판결되면, 그의 봉토는 몰수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는, 궁정에 모인 봉신들이 다른 봉신을 탄핵하여 그의 봉토가 몰수되게 하는 것을 꺼려 하였기 때문에, 그리 잦은 편은 아니었 다. 봉신들은 제각기 자기도 언젠가는 비슷한 어려움에 빠져 들 수도 있음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봉신이 주군에게 바쳐야 했던 물질적인 의무 를 논의해 왔지만, 봉건적 관계에서는 사적(私的)인 의 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봉신은 주군에게 조금도 흠이 없게 충성을 바쳐야 하였으며, 주군의 이익을 위해 모든 일을 하고 주군에게 해로운 일은 전혀 하지 말아야 했다. 봉신에게 가장 커다란 죄는 주군을 위해하거나 살 해하는 일이었다. 봉신이 주군의 아내나 장녀를 농락하 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무거운 죄였다. 봉신은 주군과 주 군의 가족을 자기 가족 못지않게 성심 성의껏 보호하여 야 했다.
〔주군의 의무〕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는 쌍무적(雙 務的)인 것으로서, 주군 또한 봉신에게 여러 의무를 지 고 있었다. 물질적인 면에서 주군은 봉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주군은 그 자신의 봉 토 밖에서 봉신과 봉신의 봉토를 모든 적으로부터 보호 할 의무가 있었으며, 또한 그의 궁정에서 봉신을 합당하 게 대우할 의무도 있었다. 어떤 봉신이 주군이 자기를 푸 대접한다고 믿어 동료 봉신들 앞에서 심문할 것을 요구 하는 경우 주군은 이를 인정해야 했으며, 주군은 또한 봉 신의 가족과 개인적인 이익을 존중하여야 했다. 주군이 봉신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에 봉신은 주군 과의 관계를 끊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 주군은 봉토 의 몰수를 선언하였고, 봉신은 의무를 저버린 장본인은 바로 주군이라고 하며 자신이 봉토를 계속 보유할 권리 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다툼은 결국 전쟁으로 해결되곤 하였다. 주군에 대한 봉신의 도 전이 전쟁을 뜻하였으므로, 대개의 경우 봉신은 공식적 으로 주군에게 도전하기에 앞서 먼저 주군과 적대 관계 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야 했다.
〔주군과 봉신의 관계〕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는 신 서(臣誓, homage)와 충성(fidelity)의 맹세라는 엄숙한 의 식으로 맺어졌다. 봉신은 주군 앞에 무릎을 끓고 두 손을 주군의 손 사이에 놓고, 충성스러운 봉신으로서 봉토에 부과된 의무를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 의식은 의례 적인 입맞춤으로 끝맺어질 수도 있었으나, 주군이 봉토 부여를 상징하는 한줌의 흙을 봉신에게 건네 주는 경우 도 많았다. 충성의 맹세는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 주는 것 이었고, 신서는 봉토를 대상으로 하여 관습에 따라 그에 부과된 의무를 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군사적인 봉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고위 성직자들 은, 충성의 맹세는 그들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였지만 신서의 의식은 대개 거부하였다. 하지만 봉토가 개입되 어 있지 않은 경우에도 이따금 신서가 행해졌다. 한 기사 가 주군의 식솔이 되어 의식주를 제공받는 대가로 주군 에게 봉사하는 경우, 그는 대개 충성의 맹세뿐만 아니라 신서도 바쳤던 것이다. 요컨대 충성의 맹세와 신서는 대 개의 경우 함께 이루어졌으나, 그 둘이 개별적으로 행해 지는 경우 그 각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는 관련 당사 자들의 생각과 해당 봉토의 관습에 따라 해석되었던 것 같다. 봉건제의 초기 시대에는 봉신이 오로지 하나의 주군만 을 섬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지참금으로 토지를 받게 되면 그는 처가쪽 가장의 봉신 이 되었다. 또한 젊은 아들이 아버지의 주군이 아닌 사람 을 주군으로 섬겨 봉토를 받는 상황에서 훗날 아버지의 봉토까지 상속하게 되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리고 주군 이 이웃의 유력한 제후에게 봉토를 건네 줌으로써 그의 호의와 지원을 매수하는 경향도 있었다. 수많은 중소 제 후들은 설득을 당하든지 아니면 강요를 당해 이웃한 대 제후에게 봉토를 부여하기도 하였으며, 공공연한 정복이 신서의 의식으로 그럴듯하게 은폐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리하여 12세기에는 거의 모든 중요한 영주가 여러 주군을 동시에 섬기는 봉신이 되었고, 이러한 복잡한 상 황은 당연히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는 데, 이는 특히 한 봉신의 주군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지상(至上)의 신서' (liege homage)라는 새로운 관념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상의 신서를 바친 주군에게는 봉신 이 직접 몸소 나아가 봉사를 바쳐야 했고, 다른 주군에게 는 단순히 봉토에 부과되는 봉사만 제공하면 되었다.
Ⅲ. 정치 형태
개개 지역의 정치 생활은 봉건제를 통해 이루어졌으 며, 봉건제는 실질적인 통치 구조였다. 봉건제를 이루는 여러 제도는 프랑스가 거의 완전히 무정부 상태에 빠져 들었을 때 자라나기 시작했다. 봉건제가 질서를 유지하 기 위한 체제로서의 봉건제는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 었는데, 가장 명백한 결함은 본질적으로 봉건제가 많은 수의 직업적인 전사 계급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데 있었다. 이론상으로 봉건제에는 주군과 봉신 그리고 같은 주군을 섬기는 봉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 툼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단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러 한 다툼은 모두 주군의 궁정에서 심의될 수 있었던 것이 다. 그러나 서로 다른 주군을 섬기는 봉신들 사이에서 벌 어지는 다툼을 해결할 방책은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다툼은 협상이나 전쟁으로만 해결될 수 있었다. 또한, 이론과 실제에는 차이가 많았다. 같은 주 군을 섬기는 두 봉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는 경우 그들 은 대개 주군이 허용하는 한 서로 싸우는 것이 통례였고, 주군도 한 쪽 봉신이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피해를 입을 위험에 빠지지 않는 한 그러한 다툼에 간섭 하지 않았다. 또한 주군과 다투고 있는 봉신은 주군의 궁 정에서 내리는 불리한 판결을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결정은 무력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효력 을 지닐 수 있었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국왕과 봉 건 제후 같은 대영주들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갖 게 되었을 때, 그들은 주군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여 봉 건적인 전쟁을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봉건적 위계 질서에서 권력의 중심은 이론상 왕이었으 나, 예컨대 프랑스 왕은 10세기에 사실상 거의 아무런 힘도 없는 명목상의 왕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위계 질서의 어느 단계에 있는 사람이 더 위에 있는 사람으로 부터 가장 독립된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자기 마 음대로 할 수 있었을까? 12세기 후반까지는 강력한 성 채를 세우고 수비해 낼 수 있는 영주들 가운데 가장 낮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이러한 입장을 누리고 있었다. 가 장 소박한 형태의 성채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재 원(財源)을 가진 영주만이 가능하였으며, 상당히 많은 수의 기사를 거느린 영주만이 봉신에게 성채 수비의 의 무를 부과함으로써 성채를 방비할 수 있었다. 그러한 영 주들은 매우 두드러진 지위를 누렸다. 어느 정도 탄탄하 게 방비되는 성채를 봉건 군대가 통상 종군하는 기간인 40일 동안에 함락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성채를 가진 봉신은 주군에게 도전하는 경우 성문을 닫 고 농성을 하면 대개 심각한 결과를 피할 수 있었다. 마 찬가지 이유로 성채를 가진 사람을 주군으로 섬기는 봉 신들은 그들 자신이 성채를 갖고 있지 못한 경우 대체로 주군 앞에서 무력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11세기 프랑스에서 제후(諸侯, baron)라는 말은 대개 성채를 가 진 사람을 가리켰고, 성채를 가진 사람은 통상 그와 더불 어 고등 사법권도 지니고 있었다. 10세기 프랑스에서 실 질적으로 독립된 제후국(feudal states)의 크기는 대체로 요새화된 성채를 중심으로 기사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와 일치하였다. 이론상으로는 이러한 제후들이 왕 아래에 있었고 왕에 게 충성의 맹세를 바쳤지만, 실제로는 왕이 그들에 대해 거의 아무런 통제권도 갖지 못하였다. 제후들은 그들이 바란다면 왕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중요한 경우에는 왕의 궁정에 참석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 자신의 영지에 서는 자기 마음대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물론 결 국에는 거의 모든 제후들이 신서를 바치고 왕의 봉신이 되었지만, 제후들이 왕과 맺고 있던 주군과 봉신 관계는 평기사가 성채를 소유한 그의 주군과 맺고 있던 관계와 달랐다. 오히려 그것은 불가침 조약과 비슷한 것이었다. 제후는 왕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면 왕을 해치지 않았 으며, 그가 왕의 궁정에 참석하는 일도 매우 드물었고, 그들이 왕의 전쟁에서 왕에게 도움을 주는 일 역시 드물 었다. 그렇지만 제후들의 영지가 왕이 부여한 봉토이고 제후들이 왕의 봉신이라는 허구를 통해 이론상으로는 왕 국의 통일성이 유지되었다. 플랑드르와 노르망디가 프랑 스의 일부라는 점이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될 때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지만, 그럼에도 그 제후들이 왕의 봉신 이라는 사실은 결국 왕에게 노르망디 전부와 플랑드르의 일부를 몰수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질서와 무정부에 가까운 초기 봉건 사회의 상황을 건설적인 국가 형성의 첫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카알 대제의 제국이 해체되고 바이킹이 침략해 오던 시 대에 프랑스의 혼란 속에서 성장한 주된 봉토들, 곧 봉건 적인 제후국들은 바이킹을 막는 데 효과적인 단위가 되 었다. 제후국은 비교적 질서와 규율이 잡힌 통치 단위를 확립하였으며, 이러한 통치 단위들은 결국 더 넓은 범위 의 통일체로 결합될 수 있었다.
Ⅳ. 실례와 변모
〔각국의 봉건제〕 봉건제는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완벽하게 발달하였다. 그 후 서부 독일과 이탈
리 아의 몇몇 지역 그리고 스페인으로 확산되었고, 영국으 로 건너가서는 특별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독일 라인 강 동쪽에서는 봉건제의 짜임새가 폭 넓은 '완전 사유지' (allodial estate, 영주가 완전한 소유권을 누리는 구역으로서 그 에 대해 왕에게 아무런 봉사의 의무도 지지 않는 땅)의 존재로 왜곡되었고, 동쪽에는 개방된 변경이 있었으며, 슬라브 족과 발트족에게서 새로 빼앗은 땅은 봉건적인 짜임새에 쉽게 맞아 들어갈 수 없었다. 북부 이탈리아는 처음에는 프랑스와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커다란 무역 도시들이 성장하고, 교황령은 봉건제가 지배적인 정치 제도가 되 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노르망디인이 정 복한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여러 세대 동안 노르망디와 같은 유형의 봉건제를 지니고 있었지만, 노르망디인의 시칠리아 왕국이 몰락함으로써 이러한 봉건제는 약화되 었다. 스페인에서는 카탈로니아가 프랑스 왕국의 일부로 서 봉건적인 제도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독일과 마찬가 지로 개방된 변경을 지니고 있었으며, 스페인의 그리스 도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치른 오랜 투쟁으로 프랑스의 봉건제와는 다른 정치적 형태를 띠었다. 어떤 의미로는 영국이 가장 완벽한 형태의 봉건제를 갖추었는데, 1066년에 노르망디 공작이 영국을 정복한 탓에, 한 공령(公領)의 제도가 한 왕국의 제도로 탈바꿈 하였다. 영국에서는 모든 땅이 왕으로부터 하사된 봉토 였다. 봉신들은 직접 왕으로부터 봉토를 받았고, 봉신들 이 거느린 봉신들은 간접적으로 왕으로부터 봉토를 받았 던 것이다. 영국의 온 땅은 봉토들로 나뉘어졌다. 왕으로 부터 봉토를 받은 모든 사람은,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포 함하여, 군사적 봉사와 궁정에 참석할 의무와 이따금 재 정적인 부조를 바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영국 정부의 전 체 구조는 왕의 봉신들이 참석하는 궁정에서 성장하였 고, 그 궁정은 왕국의 어떠한 토지 보유자에게도 직접 명 령을 내릴 수 있었다. 프랑스는 12세기 말까지도 그처럼 통합된 체제를 갖지 못하였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한 번 도 그러한 체제를 갖지 못하였다.
영국은 봉건제의 토지 보유에 관한 측면에서는 모든 땅과 통치권이 왕으로부터 부여되었으므로 완벽한 본보 기였지만, 봉건제의 지방 분권적 측면에서는 아주 불완 전한 예였다. 영국의 '백작' (earl)은 누구도 플랑드르 백 작이나 브르타뉴 공작만큼 독립적인 위치에 오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더럼(Durham)이나 체스터(Chester)처 럼 노출된 국경 지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권한을 누리고 있던 팔라틴(palaine) 백작들도 왕에게 복 종하였다. 군소 제후들은 주의 깊게 혼인 관계를 맺고 과 감하게 송사를 제기하며 이따금 폭력 행위를 저지름으로 써 그들의 힘을 키워 가려고 시도할 수는 있었지만, 공공 연하고 지속적인 사적 전쟁은 불가능하였다. 아직 왕국 의 일부가 되어 있지 않았던 웨일스와 아일랜드에서만 모험심에 불타는 제후들이 반쯤 독립적인 영지를 만들어 낼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이 지역 들에서도 그들은 결코 국왕의 감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 날 수는 없었다.
〔변 모〕 영국의 경우는 12~13세기에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추세를 앞질러 드러낸 예에 지나 지 않았다. 어쨌든 조그마한 백령(伯領)이나 성주령(城 主領)의 영주는 그렇게 수지맞거나 마음 편한 위치가 아 니었다. 그러한 영지로부터 나오는 수입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이웃한 제후들의 탐욕에 맞서 영지를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기사들은 주군을 돕는 데 그리 열성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주군을 위해 싸워 줄 지역과 그들 이 군사적 봉사를 제공할 일수를 제한하려고 하였다. 물 론 봉신들은 보수를 받기만 한다면 기꺼이 더 오랫동안 복무하고 더 많은 기사들을 데리고 나오려 하였고, 제후 는 그의 봉신이 아닌 기사들을 고용할 수도 있었지만, 많 은 수입을 올리는 제후들만이 이러한 편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밖의 제후들은 상위 주군에게 지원을 요청해 서만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만일 상위 주군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양쪽 모두의 주군이었다면, 그 주군은 그들 을 자신의 궁정으로 소환하여 다툼을 그만둘 것을 명령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주군이 그의 봉신에 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두 경우 모두 봉신 은 그의 주군에게 더욱 크게 의존하게 되고, 따라서 상위 자로부터의 명령에 더 복종하게 되었다. 이웃한 영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주교와 수도 원장들을 보호하는 문제 역시 분권화된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성직자들은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거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많은 경우 이러한 영 지에서 세속적인 통치권과 사법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 들은 심지어 그들에게 군사적 봉사의 의무를 가진 봉신 들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지를 보호해 주는 데 충분한 수의 봉신을 거느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웃한 한 영주가 교회 영지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할 수도 있 었지만, 종종 그 영주는 자신의 보호 의무를 영주권으로 탈바꿈시키려고 시도하였으므로, 교회로서는 왕이나 강 력한 백작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였 다. 교회를 보호해 주는 것은 이러한 유력자들의 의무였 으나, 동시에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이 자 신들의 법정에서 명령을 내려서든 군사 행동을 통해서 든, 아니면 그 둘 모두를 통해서든, 탐욕스러운 지방 제 후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부당한 요구를 철회하도록 강 요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 밖 에서도 권위를 지닌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그래 서 그들은 봉건제의 초기 시대를 특징지었던 정치적 권 력의 분해를 없애기 시작하였다. 지나친 분권화를 없애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증대시키 는 동시에 주군의 법정에서 효율적인 절차를 마련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였다. 심지어는 왕까지 포함하여 어 떠한 상위 주군도 문제가 된 영역들에 여러 해에 걸쳐 점 령군을 유지할 수는 없었으므로, 전사 계급 가운데 대다 수로 하여금 상위 주군이 내놓은 해결책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만한 법률적 절차가 있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법 률적 절차는 주로 보유(seissin, possession)의 개념에 바탕 을 두고 있었다. 자기가 특정한 영토와 통치권을 합당할 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보유해 왔음을 밝힐 수 있는 당사 자는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보유권은 거의 무작위로 가려 뽑은 증인들도 분 명하게 입증해 줄 수 있었다. 한 마을에 사는 사람은 누 구든 그들이 바쳐야 하는 지대(地代)와 부역을 어떤 사 람이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는 지방 법정에서 부과된 벌 금을 어떤 사람이 거두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 라서 많은 경우에는 사실을 밝혀 내기가 쉬웠다. 주군은 그의 봉신들을 소집하고, 그 봉신들이 증언을 듣고는 판 결을 내리곤 하였다. 많은 경우 패소한 당사자는 곧바로 그의 송사를 철회하곤 하였는데, 그렇지 않으면 주군은 법정의 판결을 시행에 옮기기 위해 그의 봉신들을 소집 할 권한이 있었다. 이리하여 초기 봉건제의 분권화된 상황으로부터 다시 권력이 집중되어 가는 양상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물론 유력한 대봉신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만 큼 강력한 봉건 왕권은 매우 느리고 험난한 과정을 통해 서 성장하였다. 봉토의 세습화는 왕이 왕국의 각 지역을 다스릴 인물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음을 뜻하였다. 영 주 각각에게 군사와 정치와 경제의 모든 측면에 걸쳐 권 력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봉건 제후국은 더 욱 쉽게 출현할 수 있었다.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 대개의 기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왕보다는 그가 섬기는 바로 위 의 주군에게 더 크게 충성심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었 다. 이와 같은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기는 했지만, 그래 도 능력이 있고 마음이 굳은 왕이 잇달아 나타난다면 해 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인 왕권을 누리고자 하는 왕은 그의 봉신 가운데 가장 유력한 사람이나 봉신 들의 연합 세력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권력과 부 를 직접 소유하고 있어야만 했다. 왕은 세습적인 봉토 보 유자들보다는 왕이 임명하는 관리들에 바탕을 두는 통치 체제를 만들어 내야 했으며, 어떤 다른 권위에 대한 충성 보다도 왕에 대한 충성이 더 우선한다고 주장해야 했다. 그러한 왕권 강화의 과정은 프랑스와 한 번도 진정한 분권화가 나타난 적이 없었던 영국 두 나라에서 가장 효 율적으로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시대까지도 많은 군소 영지들이 실질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채로 남아 있었던 독일, 그리고 부유하고 강력한 공동체들이 성장함으로써 각 지역에서 강력한 도시 중심지들이 나타났던 이탈리아 에서는 그 과정이 그렇게 완벽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1500년에는 서유럽의 대부분이 정치 권력의 분해라는 의미에서는 더 이상 봉건적이지 않게 되었다. 유럽은, 어 떤 것은 프랑스 왕국처럼 크고 어떤 것은 독일 영역 국가 들처럼 작았지만, 주권 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주군 과 봉신이라는 옛 용어들은 이제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갖 지 못하게 되었다.
Ⅴ. 의의
권력이 주권 국가들로 집중되어 가는 과정에서 봉토 보유자들은 몇몇 사회적 · 경제적 특권을 그대로 지니도록 허용되었다. 왕들은 여전히 토지를 보유한 계급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왕들은 촌락 공동체에 관련한 사소한 문제들을 일일이 다룰 수 없었으며, 자신들이 거느린 작은 규모의 상비군-영국에서는 상비군이 전혀 없었고, 프랑스에서는 1300년에 이르러서도 상비군이 고작 25,000명에 지나지 않았다-으로 거대한 영역에 걸쳐 치안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들 자신의 지배 영역에서 충 분한 수의 행정가들을 찾아낼 수도 없었다. 더구나 왕들 (독일에서는 제후들)은 귀족적인 궁정에서 자라났으므로, 그들이 알고 있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귀족들이었다. 중간 계급 출신의 관리들이 가장 높은 자 리로 출세하는 것을 빈틈없이 봉쇄하는 장벽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관리들이 그렇게 출세를 하면 그들은 조만간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 귀족은 거의 모든 경우 토 지를 지니고 있었는데, 토지를 지닌 귀족은 지대를 거둘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땅에 세워진 편의 시설을 사 용하는 대가로 갖가지 납부금도 거두었다. 또한 그는 많 은 경우 사소한 범법 행위에 대해 사적인 법정을 열 권리 를 지니고 있었거나, 영국처럼 거의 자동적으로 공공 법 정에서 재판관들 가운데 하나가 되곤 하였다. 또한, 많은 지역에서 차지인(借地人)들로부터 무보수의 부역(그의 땅을 쟁기질하고 그의 생산물을 시장으로 운반하며, 길과 교량을 수리하는 따위)을 얼마간 요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권들은 봉건제의 유산이었지만, 그 밖의 것 은 모두 사라졌다. 영국의 작위 귀족과 프랑스의 백작이 나 후작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에게 지대를 납부하는 토 지를 완전히 독립되게 다스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지 만 주권 국가가 기본적인 정치체가 되어 있었고 자유로 운 시장이 경제학자들의 이상이 되어 있었던 유럽에서 그러한 봉건제의 유산들이 아무 소용도 없고 전혀 걸맞 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8세 기의 개혁가들은 기본적으로 지주권이 되어 있었던 것에 '봉건제' 라는 용어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잘못된 선택은 끝없는 혼동을 낳았다. 거의 모든 사회에는 차지인이나 노예의 노동력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지주들이 있었다. 봉건 영주들 역시 지주들 로서, 그들이 독립된 정치 권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오랫 동안 차지인들의 지대와 부역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고대의 중동, 로마 제국, 남북 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 심지어는 집단 농장을 지닌 공산주의 국가 모두가 이러 한 정의에 들어맞을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공권력 이 사적인 개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어 기본적인 통치 권(사법권과 방어권)이 사적인 계약에 의해 지배되는 제도 라는 의미에서의 봉건제는 드물다. 중세 영주들에게 농 민들로부터 부역과 납부금을 거둘 기회를 제공하였던 것 은 바로 정치 권력(명령권)의 소유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 봉건제는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시대의 일본에 서 분명히 존재하였고, 19세기의 에티오피아에서도 존 재했을 수 있지만, 완전히 발달된 형태로는 서유럽을 제 외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서유럽이 겪은 정치적 경험이 이례적인 유형의 국가, 즉 군주의 권력이 법률과 사적인 권리들로 제한되는 국가를 낳았던 것은 바로 봉건제가 완전하게 발달된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 중세 ; 성직 서임권 논쟁) ※ 참고문헌 M. Bloch, La société féodale(한정숙 역, 《봉건 사회》,한길사, 1986)/ M. Weber, 라종일 편역, 《봉건제》, 까치, 1988/ J.Strayer, Dictionary of the Middle Ages, vol. 5, 1985/ C. Stephenson, Medieval Feudalism(라종일 역, 《봉건제란 무엇인가》, 탐구당, 1981)/S. Painter, Medieval Society(홍성표 역, 《중세 사회는 어떠하였는가》,1987)/ 진원숙 편역, 《서구의 봉건 제도》, 1985. 〔李演圭〕
봉건제
封建制
〔라〕feudalismus · 〔영〕feud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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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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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 출현의 주요 요인이었던 기병(왼쪽)과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봉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