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원주시 봉산2동 950-3 소재. 1972년 5월 26일 원동(園洞) 본당 · 단구동(丹邱洞) · 학성동(鶴城洞)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가정. 관할 구역은 봉산1 · 2동, 행구동, 태장1동 전 지역과 개운동, 반곡동 일부 지역. 〔교 세〕 1972년 1,098명, 1978년 1,809명, 1984년 1,788명, 1990년 1,877명, 1996년 1,383명. 〔역대 신부〕 초대 신현봉(申鉉奉) 안토니오(1972. 5~1977. 12), 2대 안승길(安承吉) 로베르토(1977. 12~1979. 3), 3대 김종태(金鍾泰) 안드레아(1979. 3~1981. 5), 4대 이대식(李大植) 야고보(1981. 5~1983.5), 5대 박무학(朴武學) 요한(1983. 5~1986. 7), 6대 조규남(曹奎男) 구니베르토(1986. 7~1990. 2), 7대 양대석(梁大錫) 알로이시오(1990. 2~1991. 4), 8대 김용성(金容成) 타대오(1991. 4~1995. 2), 9대 정의준(鄭義俊) 요셉(1995. 2~1996. 2), 10대 유영구(柳永求) 베드로(1996. 2~현재).
봉산동은 행정 구역상으로는 원주 시내에 있지만 중앙선 철도로 인해 개발이 더디게 이루어진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던 중 1960년대 초부터 철로변의 빈민촌을 중심으로 신자수가 증가하자, 교구에서는 1972년 5월 26일 봉산동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신현봉 신부를 임명하였다. 현 성당 부지는 1960년대 초에 원동 본당의 양대석 신부가 중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매입해둔 것이었으나, 당시 소속이었던 춘천교구의 승인을 얻지 못해 학교 설립이 유보되었었다가 1965년에 원주교구가 설정되고 난 후 성당 부지로 변경되었다.
신현봉 신부는 부임 직후 신자 양승학이 기증한 가옥과 부지에 임시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고 1972년 10월 2일 첫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이듬해 6월 23일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그 해 9월 25일 65평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한편 신현봉 신부가 1976년 3월 10일 '민주 구국 선언 사건'(3 · 1 명동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된 후 이듬해 실형을 선고받아 본당 신부가 공석이 되자 골롬
반 외방선교회와 교구 소속 신부들이 번갈아 본당 사목을 맡아 주었다. 그런 중에서도 본당 신자들은 1976년 5월에 성모 동산을 조성하였으며, 이듬해 2월 19일에는 학성동 본당으로부터 소초(所草) 공소를 이관받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미사를 꾸준히 봉헌하였다. 1977년 7월 17일 신현봉 신부가 출감하면서 봉산동 본당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4대 주임 이대식 신부 때인 1981년 9월 23일에는 태장동 본당의 신설로 소초 공소를 이관하였고, 같은 해 11월 7일에는 교리실(23평)을 신축하였다. 이후 5대 주임 박무학 신부가 1983년 10월 30일에 수녀원(25평)을 건립한 것을 비롯하여 역대 신부들에 의해 사제관 등 여러 부속 시설들의 증 · 개축 공사가 실시되었다. 본당은 설립 이후 꾸준히 교세가 확대되어 오다가 1990년대 초에 한동안 감소되기는 하였지만, 1993년부터 도시 개발 계획과 함께 행구동 · 봉산2동 · 태장동 일대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입주자들이 다시 증가하고 있어 전망이 밝은 편이다. (→ 원주교구 ; 단구동 본당 ; 원동 본당 ; 학성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 편, 《原州教區三十年史》, 천주교 원주교구, 1996/ 천주교 명동 교회, 《명동 성당 신문 기사 자료집》 上, 천주교 명동 교회 편찬실, 1994/ 이계창, 《법정에서의 진실》, 가톨릭출판사, 1991. 〔편찬실〕
봉산동 본당
鳳山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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