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매화동(玫花洞) 본당의 우도(P. Oudot, 吳保祿) 신부가 안악군 용문면 매화리(安岳郡 龍門面 玫花里)에 설립한 초등 교육 기관. 설립 시기는 1898~ 1899년 사이로 안악 지방 최고(最古)의 사학(私學)으로 알려져 있으며, 1907년 초에 근대적인 학교로 개편되었다. 봉삼(奉三)이란 교명은 애국심과 도덕심을 배양시켜 국태민안(國泰民安)에 기여한다는 취지에서 명명되었다.
1898년 7월 매화동 본당에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우도 신부는 부임 직후 종교 교육과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학교를 개설하고, 남자부와 여자부로 나누어 남학생들에게는 교리와 한문을 가르쳤고, 여학생들에게는 기도문 · 한글 · 가사(家事) 등을 교육하였다. 초창기에는 출석률의 저조, 재정적인 문제, 교사 부족 등으로 학교 운영이 절망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이와 같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도 신부는 1906년에 천주교 신자인 최영휘(崔榮輝)와 옥정삼(玉正三)을 교사로 채용하여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가르쳤고, 이듬해 초에는 정식으로 근대 초등 교육 기관으로 출범시켰다. 그 후 1908년에는 인근의 '머내[遠川]학교 를 병합하여 교세를 확장했고,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 야학교'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1908~1909년 초, 당국으로부터 사립 학교 인가를 받은 봉삼학교는 1909년 10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부임하면서 보다 활기를 띠게 되었다. 수녀들은 여학생들에게 신앙 생활과 가사 같은 교과 과정을 지도하였으며, 1912년부터는 여학교에 양잠(養蠶) 강습소를 개설하여 주민의 소득 증대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본당 주임인 샤보(J.Chabot, 車麗松) 신부가 프랑스로 동원되고 수녀들도 본원으로 돌아가자, 교감 김병선(金秉善, 레오)과 교사 임영익(林瑛益, 루도비코)이 1919년 10월 신부와 수녀들이 돌아올 때까지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 뒤 1921년 5월 퀴를리에(L.Curier, 南一良) 신부가 4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봉삼학교는 새로운 모습을 띠게되었다. 퀴를리에 신부는 먼저 협소한 교사(校舍)를 좀더 넓은 곳으로 이전하였고, 1923년에는 남자부와 여자부를 통합해 남녀 공학으로 개편했는데, 당시 남자부는 교사 3명에 학생 85명, 여자부는 교사 2명에 학생 52명이었다. 그러나 봉삼학교의 재정은 여전히 어려운 실정이어서 1931년에는 90명의 재학생에 2개 교실만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1년 4월 본당 5대 주임으로 부임한 신인균(申麟均, 요셉) 신부가 자신의 사비를 학교 유지비로 투입하고 학생 모집을 위한 적극적인 홍보를 편 결과 1934년에는 학생수가 5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또 학제도 4년제에서 6년제로 개편되어 교실을 6개로 증 · 개축하는 한편, 보통 학교 인가 신청을 제출하여 1934년 8월 15일에는 보통 학교로 승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후임으로 부임한 이선용(李善用, 바오로) 신부가 학교 유지 문제를 우려하여 인가 신청을 철회함으로써 이전과 같이 사립 학교로 존속하다가 8 · 15 광복 후 공산 치하가 되면서 '인민학교'(人民學校)로 흡수되고 말았다. (→ 매화동 본당)
※ 참고문헌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1. 〔方相根〕
봉삼학교
奉三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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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