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동 본당

奉天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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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서울시 관악구 봉천10동 41-857 소재. 1969년 8월 10일 상도동(上道洞)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세례자 성 요한. 관할 구역은 봉천2 · 3 · 10동 전 지역과 봉천본동 · 6동 일부 지역. 〔교 세〕 1969년 1,436명, 1976년 4,603명, 1982년 8,238명, 1987년 12,285명, 1991년 11,495명, 1996년 5,489명. 〔역대 신부〕 초대 김춘근(金春根)세례자 요한(1969. 8~1970. 1), 2대 한희동(韓熙東) 그레고리오(1970. 1~1975.5), 3대 이기명(李起明) 프란치스코(1975. 5~1977. 9), 4대 장덕필(張德弼) 니콜라오(1977. 9~1981. 5), 5대 최광연(崔光淵) 모세(1981. 5~1986. 8), 6대 남영희(南永喜) 이시도로(1986. 8~1991. 9), 7대 김대성(金大星) 바오로(1991. 9~1996. 9), 8대 박항오(朴M垣) 마르티노(1996. 9~현재).
〔본당의 설립〕 일찍이 봉천동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성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과 두 딸인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 영희(英喜, 막달레나) 자매가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또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황해도 배천[白川]의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이 그의 처 김이쁜(金於盆, 마리아)과 아들 이붕익(李鵬翼, 바오로)을 데리고 친사돈 집이 있던 이곳으로 피신해 있다가 10월16일 체포되어 10월 22일 양화진(楊花津)에서 순교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봉천동 일대에는 박해 시대부터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에는 오랫동안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1950년대 초까지 봉천동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始興郡 東面)에 속해 있던 농촌 지역으로 교세가 극히 미미하였으나, 1963년에 서울시로 편입되기 이전부터 실시된 도시 재개발 정책에 따라 해방촌과 이촌동 일대 철거민들이 대거 이주해 옴으로써 차츰 서울의 대표적인 철거민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67년 12월 27일에 이 지역의 사목 관할권이 대방동(大方洞) 본당에서 상도동 본당으로 이관되었고, 그 무렵 신자수가 이미 1,000여 명에 달하게 되자 본당 설립의 필요성을 느낀 교구에서는 1969년 5월 10일 현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석 달 만인 8월 10일에 봉천동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김춘근 신부를 임명하였다. 김춘근 신부는 형편이 어려운 신자들의 경제력을 감안하여 성당 건축비 모금을 자제하는 대신에 일용직에 종사하는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13일 성당(101평)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정착과 변모〕 이듬해 1월 2대 주임으로 부임한 한희동 신부는 성당 건립으로 인한 부채 상환에 주력하면서 1971년 5월에 인보 성체 수도회 수녀를 초청하는 한편, 1975년 3월에는 요한유치원(1986년 2월 말 폐쇄)을 개원하였다. 이어 3대 주임 이기명 신부는 성당을 증축하였으며, 4대 주임 장덕필 신부 때인 1981년 9월에는 봉천 1동 본당을 분리하고 315세대 1,056명의 교적을 이관하였다. 이에 앞서 장덕필 신부는 봉천동 본당에 부임하기 1년 전인 1976년에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3 · 1 명동 사건' (민주 구국 선언 사건)으로 구속 · 수감되어 그 해 말에 석방되었었는데, 이후 봉천동 본당에서 사목하던 때인 1980년 5월에 광주 민주 항쟁이 일어나자 미사 강론을 통해 그 진상을 알리다가 7월 12일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계엄 사령부에 연행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주임 신부의 조속한 석방을 요구하는 철야 기도회와 집회를 가졌고, 다행히 장덕필 신부는 형 집행 정지로 1개월여만에 석방되었다.
본당을 분리하고 나서도 여전히 신자수가 급증하자 결국 5대 주임 최광연 신부는 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1982년 10월부터 1984년 7월까지 성당 인근의 부지 267평을 연차적으로 확보하였다. 그런 다음 1985년 2월에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 2층에 임시 성당을 마련하고 4월 26일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7월 20일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성당(883평)을 완공하였다. 이어 부임한 남영희 신부 때에는 레지오 마리애가 3개 꾸리아에 100여 개 쁘레시디움으로 확대되었고, 신자수가 1만여명을 넘어서게 되어 7대 주임 김대성 신부 때인 1994년 3월 10일에 봉천11동(낙성대) 본당을, 다시 2년 만인 1996년 9월 24일에 봉천8동 본당을 분리하였다. 같은 날 8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항오 신부는 잦은 본당 분할로 인해 소원해진 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일체감을 조성하기 위하여 1997년 2월에 본당의 심벌 마크와 로고를 제정하였고, 10월 19일에 제1회 체육 잔치를 개최한 데 이어 12월에는 《광야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봉천동 본당은 최근 무허가 주택들이 모두 철거되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됨에 따라 또 한 번의 본당 분할을 준비하고 있다. (→ 서울대교구 ; 상도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海道天主敎會史》,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서울대교구 교구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천주교 봉천동 교회 25년사 편찬위원회편, 《봉천동 본당 25년사》, 천주교 봉천동 교회, 1994/ 천주교 명동 교회 편찬실, 《명동 성당 신문 기사 자료집》 上, 천주교 명동 교회, 1994/ 이계창, 《법정에서의 진실》, 가톨릭출판사, 1991.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