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본당

奉化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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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소속 본당. 경북 봉화군 봉화읍 포저리 192-1 소재. 1958년 5월 10일 안동(安東, 현 목성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 요셉. 관할 구역은 석포면을 제외한 봉화군 전 지역이고, 관할 공소는 춘양, 두음, 재산, 갱화 4개소. 〔교 세〕 1965년 460명, 1972년 600명, 1978년 534명, 1982년 604명, 1987년 872명, 1991년 887명, 1996년 898명. 〔역대 신부〕 모리스(J.M. Maurice, 이성춘) 요한 마리아(1958. 5~1962. 11), 2대 뒤랭(A. Durand, 나성도) 알멜(1964. 2~1970. 6), 3대 디리바른(P. Diribarne, 조동래) 베드로(1970. 11~1973.6), 4대 이길준(李吉俊) 바오로(1974. 2~1978. 4), 임시 유재준(兪在濬) 타대오(1979 3~5), 5대 독(R. Doc, 朴) 로제리오(1979. 5~1983. 10), 6대 유재준(1984. 3~1989. 3), 7대 오성백(吳盛栢) 요아킴(1989. 7~1993. 5) 8대 가즈탕비드(A. Gaztambide, 한상덕) 안토니오(1993.5~현재).
〔전 사〕 경상도 북부 산간 지방인 봉화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후하여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피난해 오면서부터였다. 면천솔뫼(唐津郡 牛江面 松山里) 출신으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이 우련밭(雨蓮田, 현 才山面 葛山里)으로 이주해 와 수계 생활을 시작하였고, 같은 시기에 여사울(禮山郡 新岩面 新宗里) 출신의 김경서(프란치스코, 일명 稀成)도 곧은정(小川面 南回龍里의 마당모기로 추정됨)으로 피난을 와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15년 3월(음)에 배교자 전지수의 밀고로 김경서가 체포되었고, 김종한 역시 그 해 4월 23일(음) 체포되어 이듬해 11월 1일(음)에 건사골(재산면 갈산리의 개내골)의 예비 신자 이윤집과 함께 대구 관덕당(觀德堂)에서 순교하였다. 또 1827년 정해박해(丁亥迫害) 때에는 순흥 곰직이(物野面 梧田里)에서 살던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이 체포되어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는 등 거듭된 박해로 인해 봉화 지역에 형성되었던 교우촌들이 와해되어 갔으며,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신나무골(枝川面 蓮花里) 등지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소 시대와 본당 정착〕 한동안 신앙의 후손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곳 봉화에 공소가 설립된 것은 한국 전쟁 직후였다. 당시 정태중(베드로)이 전쟁 고아들을 위해 '봉화 애육원' 을 설립하였는데, 이때 안동 본당의 정(토마스) 회장 등 신자들이 원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1954년에 안동 본당의 정행만(鄭行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가 애육원 내에 봉화 공소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 후 고아들뿐만 아니라 봉화 지역에 거주하는 일반 신자들도 이 공소를 찾게 되자 본당 설립이 불가피하게 되어 봉화 공소는 설립 4년 만에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모리스 신부가 부임하였다. 고아원 강당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던 모리스 신부는 1961년 3월에 성당(82평)과 사제관(30평) 및 수녀원(20평)을 신축하였다. 이보다 앞서 모리스 신부는 1960년에 갱화원(봉성면 金峰里 산 177번지)을 설립하여 구라 사업(救癩事業)을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 5월 4일에는 예수 성심 시녀회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1962년 11월부터 1년여 동안 본당 신부가 부임하지 못하게 되자 영주(榮州, 현 休川洞) 본당의 펠리스(M. Pélisse, 배세영) 신부를 비롯하여 코요스(C. Coyos, 구인덕) 신부와 노엘(Noёl, 노광명) 신부가 대신 본당 사목을 맡아 주기도 하였다. 2대 주임 뒤랭 신부는 부임 후인 1969년 2월 4일에 '성심유치원' 을 개원하였고, 3대 주임 디리바른 신부는 1973년 4월에 두음(斗音) 공소를 신축하였다. 이어 4대 주임 이길준 신부가 5년 가까이 사목하다가 1978년 4월에 소속 대구대교구의 노원동(魯院洞) 본당으로 전임됨에 따라 본당은 다시 신부 없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듬해 5월 18일 5대 주임으로 부임한 독 신부는 1980년 2월 11일 춘양(春陽) 공소 강당을 건립한 데 이어 1983년에는 재산 공소의 보수 공사를 실시하는 등 본당을 위해 노력하다가 그 해 10월 3일 갑자기 죽었다. 이에 김재문(金在文, 이냐시오) 신부와 조종율(趙宗汨, 베르나르도) 신부가 격주로 미사를 봉헌하다가 6대 주임으로 유재준 신부가 부임하였지만 5년 간의 사목을 마치고 전임된 후에는 또다시 잠시 동안 신부가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7대 주임 오성백 신부 때인 1991년 12월 13일에는 그 동안의 숙원 사업이었던 사제관 · 수녀원 · 유치원 · 교육관이 완공됨으로써 침체되었던 본당 공동체의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이어 8대 주임으로 부임한 가즈탕비드 신부는 홍유한(洪儒漢)의 묘소가 있는 봉성면 우곡리(鳳城面 愚谷里) 일대를 사적지 및 청소년 심신 수련 센터로 조성하기 위하여 노력해 오고 있는데, 이곳은 1993년부터 교구 차원의 사적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1995년 9월 17일에는 안동교구 순교자 현양 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1997년에는 야외 수련장이, 그리고 이듬해에는 소성당이 건립되는 등 일련의 작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 안동교구 ; 목성동 본당)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大邱本堂百年史》(1886~1986),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교구 전사》, 안동교구사 자료 4집, 천주교 안동교구, 1997/ 《교구 25년》, 안동교구사 자료 5집, 천주교 안동교구, 1997/ 《기타 자료》, 안동교구사 자료 7집, 천주교 안동교구, 1997/ 《교회와 역사》 140 · 141 합병호(1986. 3), 한국교회사연구소, pp. 21~23.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