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평양 지목구장.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굴리엘모. 한국명은 부문화(夫文化)1898년 미국에서 태어나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으며, 1925년 사제로 서품되자마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0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다. 처음 평양의 영유(永柔) 본당 내 조선어 연구 학교에서 장면(張勉, 요한)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던 부드 신부는, 이듬해 8월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원당리(元塘里)에 마산(馬山) 본당이 설립되자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부임 직후 인근 사가(私家)를 매입하여 임시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하는 한편, 빈민 구제 사업에도 노력을 기울이다가 1928년 10월에는 교구 본부로 전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9년 8월 초대 평양 지목구장인 번(P. Byrne, 方溢恩) 주교가 메리놀회 부총장으로 피선되어 귀국하자 지목구장 서리로 교구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어 부드 신부는 1936년 1월 스위니(L. Sweeny, 徐) 신부의 후임으로 진남포(鎮南浦) 본당에 파견되어 약 9개월 동안 육영 사업의 운영에 힘썼으며, 같은 해 7월 31일 제2대 평양 지목구장으로 활동하였던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몬시놀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후임 지목 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부터 1여 년 동안은 평양교구에서 발간하는 종교 교양 월간지 《가톨릭 조선》의 발행인으로서 가톨릭 문화 보급과 출판 사업에 기여하였으나 재정난과 독자층의 인식 부족,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940년 초 중화(中和)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일제에 의해 추방되어 1941년 12월 말에 본국으로 돌아간 부드 신부는, 1947년 1월 동료 캐롤(G. Carrol, 安) 신부와 페티프렌(R. Petipren, 邊) 신부와 함께 한국에 다시 부임하였다. 임시로 명동(明洞) 본당 내에 머무르던 중 그 해 5월부터 황해도 옹진(甕津) 본당 보좌로 잠시 사목하였으며, 1948년 8월에는 경기도 평택(平澤)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어 약 1년 동안 활동하였고, 이듬해 8월 초대 교황 사절 번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에도 부드 신부는 번 주교와 함께 교황 사절관을 지키다가 7월 11일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다른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함께 서울 소공동(小公洞)의 삼화 빌딩에 감금되었고, 얼마 후 열린 인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북한으로 이송되어 7월 19일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9월 5일에는 만포(滿浦)로, 10월 8일에는 고산진(高山鎮)으로, 다시 초산진(楚山鎮) 등으로 끌려갔다가 11월 7일 중강진(中江鎮) 부근의 하창리(下昌里) 수용소에 수용되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 을 겪었다. 이 행진 도중에 겪은 고초와 수난으로 번 주교를 비롯한 여러 성직자들이 순교하였으나, 부드 신부는 무사히 풀려 나와 1960년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973년 미국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 메리놀 외방전교회; 번, 제임스 패트릭 ; 마산 본당 ; 평양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98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黃道天主教會史》,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李裕林〕
부드, 월리엄(1898~1973)
Booth, Willi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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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월리엄 부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