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釜山敎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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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본당의 분리 계통도(1910~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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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본당의 분리 계통도(1910~1997년)>

Ⅰ . 복음의 전래와 순교자의 탄생
Ⅱ . 본당의 설립과 확대
Ⅲ . 부산 대목구의 설정과 변모
Ⅳ . 교구의 안정과 성장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일부를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교구(敎區). 한국 천주교회의 열한 번째 교구(침묵의 교회 포함)로 설정되었으며, 주보는 로사리오의 성모. 교구청 소재지는 부산시 수영구 남천1동 70-4.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은 1954년 6월 18일 경남 감목 대리구(監牧代理區)로 설정되었으며, 1957년 1월 21일 대구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부산 대목구로 승격되었다. 이어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립되면서 정식 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대구대교구, 청주교구와 함께 대구 관구(大邱管區)를 형성하였고, 1966년 2월 15일에는 마산교구를 분리하였다. 부산 대목구 설정 당시의 주교좌 본당은 중앙(中央) 본당이었으나, 1992년 5월에 남천(南川) 본당이 두 번째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관할 구역〕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양산군, 울주군, 밀양군과 김해군 일부 지역. 〔역대 교구장〕 초대 최재선(崔再善, 요한) 주교(1957. 1. 21~1973. 11.6), 2대 이갑수(李甲秀, 가브리엘) 주교(1975. 6. 28~현재). 〔교 세〕 1957년 40,955명, 1965년 97,503명, 1966년 74,240명, 1976년 102,003명, 1986년 213,663명, 1997년 335,560명.
Ⅰ . 복음의 전래와 순교자의 탄생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후하여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할 때, 남부 지역에까지 복음이 전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물론 이 박해의 결과 경상도 남부 지역으로도 신자들이 유배되었지만, 유배자의 신분으로 복음을 전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1815년의 을해박해(乙亥迫害)와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로 북부 지역의 교우촌이 폐허가 되면서 살아 남은 신자들이 남쪽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1830년대에는 경상도 남부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또 이 무렵에는 언양(彥陽)으로 유배된 신자가 해배된 후 배소 이웃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경상도 남부 지역의 복음이 확대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이후 1850년대까지였다. 특히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1850년대에 경상도 북부로부터 남부 지역까지 순회하였는데, 경상남도 동쪽의 불당골(佛堂谷,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죽림골(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竹田) 등 울주군(蔚州郡) 내의 여러 교우촌들이 이때 공소로 설정되었다. 그러다가 1859년 말에서 1860년 8월에 걸쳐 일어난 경신박해(庚申迫害)로 최양업 신부는 죽림 공소에서 숨어 지내야만 하였고, 경상도 신자 17명이 체포되어 그중 이선이(엘리사벳)가 대구에서 옥사하였다. 1861년에 최양업 신부가 사망한 뒤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경상도 남부 지역을, 페롱(Féron, 權) 신부가 경상도 서북부 지역을, 칼래(Calais, 姜) 신부가 경상도 서부 지역을 맡아 활동하면서 경상도는 3개의 '지역 본당'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은 경상남도 동부에서 서부로 확산되어 갔으며, 1860년대 초에는 언양 · 양산(梁山) · 기장(機張) · 동래(東萊)와 김해(金海) 지역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862년에 국지적인 박해가 경상도 남부 지역을 휩쓴 뒤에는 진영(進永) · 진주(晋州) · 함안(咸安) · 거제(巨濟) · 밀양(密陽) 등지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1863년 무렵에 경상도 남부의 교우촌은 약 16~17개였다. 한편 1864년 이래로 경상도 지역을 맡게 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공주 진밭(현 충남 공주군 사곡면 新永里)에 거처를 두고 경상도 전 지역을 순방하였고, 1865년경에는 복사 구한선(타대오)과 함께 거제도를 방문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는 경상도 지역에서도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그 초기에 경상도 남부 지역에서는 밀양에서 몇몇 신자가 체포되었을 뿐이지만 박해가 이어지면서 진영과 진주 등지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그중 언양의 김사집(金士執, 필립보), 울산의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 함안의 구한선(타대오) 등이 순교하였다. 이어 1868년의 무진박해(戊辰迫害)로 인해 경상도 남부에서는 모두 11명이 순교하였다. 그중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된 신자들은 울산의 이정식(李廷植, 요한)과 그의 아우 이삼근(李三根, 베드로), 이관복(李寬福, 프란치스코)과 그의 아내 박소사(朴召史, 마리아), 이월주(李月柱), 차장득(車長得, 프란치스코), , 옥소사(玉召史, 바르바라)와 동래의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 등 8명으로, 1868년 9월 19일(음 8월 4일) 이전에 동래 장대(將臺, 일명 수영 장대로 수영중학교 인근)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았다. 또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된 언양의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루가),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등 3명도 그 해 9월 14일(음 7월 28일) 울산 장대(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 5번지)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았다. 이 밖에도 제주 출신인 김 펠릭스 베드로가 거제에서, 조씨 형제가 김해에서 순교하였다.
Ⅱ . 본당의 설립과 확대
〔공소의 부활〕 오랜 박해가 끝나면서 경상도 지역에는 다시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지만, 박해의 여파로 인해 활발하게 전교 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고 1876년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었는데, 그중 경상도 지역을 순방한 선교사는 1877년에 입국한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였다. 그는 1879년 무렵에 대구, 언양, 울산의 선필(善弼, 울주군 두서면 仁甫里) 등을 방문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1878년에 입국하여 강원도 · 황해도 ·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1882년에 경상도 지역의 전담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경상도 지역 본당은 박해로 폐지되었다가 10여 년 만에 다시 부활하였다.
로베르 신부는 즉시 사목 순방에 나서 1882~ 1883년 사이에 경상도 · 충청도 강원도 등지의 공소들을 방문하였는데, 그중 경상남도 지역의 공소는 모두 14개로 함안 · 밀양에 2~3개 공소가 있었고, 언양 · 기장 · 김해 · 창원 · 진주 · 단성 · 삼가 · 청도 등지에도 공소가 있었다. 또 신자수는 기장의 남락 공소(양산군 동면 餘洛里)가 139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울산의 선필 공소가 82명, 진주의 소촌 공소(진양군 문산면 蘇文里)가 78명, 함안의 동천 공소(함안군 군북면 東村里)가 71명 순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이미 경상남도 전역으로 천주교가 전파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883년에 686명이던 경상남도 지역의 신자수는 1890년에 이르러 18개 공소에 774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동안 경상도 지역의 천주교회는 다시 변모하게 되었다. 1885년에는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신나무골(경북 칠곡군 지천면 蓮花洞)에 정착하였다가 1887년 3월경에는 대구 인근의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上里洞과 竹田洞 부근)로 다시 거처를 옮겨 '대구 본당' 을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는 하였지만, 각처에서는 여전히 사사로운 박해나 교안(敎案)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경상도 남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1888년 봄에는 거제도 박해가 일어남으로써 윤봉문(尹鳳文, 베드로)이 통영 포졸들에게 체포된 후 진주로 이송되어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어 1889년에는 함안교안(咸安教案)이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부산 본당의 설립과 정착〕 앞서 로베르 신부는 1886년 5월경에 부임한 보좌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를 여진(余津, 경북 선산군 해평면 洛山洞)으로 보내 교우들을 돌보게 하였다. 이어 1889년 2월에 한국 땅을 밟은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신나무골에 거처하면서 한국어를 배우다가 1890년 초에 새로운 명을 받고 절영도(絶影島, 현재의 影島)로 내려가 '부산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때 조조 신부가 부산 인근의 절영도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처음부터 부산 시내로 진출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조내기(潮落里, 현재의 青鶴洞) 공소의 신자들이 신부를 영입하고 거처를 마련하는 데 열성적이었던 이유도 있었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 지역은 경상남도의 전 지역과 경상북도의 경주 · 영천 지역으로, 28개 공소에 신자수는 1,171명이었다. 그중에서 큰 공소들은 진주의 소촌 공소(117명), 경주의 상선필 공소(77명), 창원의 곡목(의창군 동면 花陽里) 공소(64명), 언양읍 공소(63명) 등이었으며, 절영도 공소는 40명에 불과하였다. 그는 1891년 7월 이후 부산항의 초량(草梁)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그곳으로 진출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소성당이 포함된 사제관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1891년 초에 일어난 거제도의 재산 반환 사건, 다음해의 기장 벽보 사건과 삼가(三嘉) 교우 추방 사건 등 갖가지 교안을 겪어야만 하였고, 1892년 말에는 로베르 신부 대신 공소 순회를 하다가 김천 장터에서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경상도 남부의 신앙 공동체와 교세는 계속 확대되어 1893년에는 35개 공소에 신자수 1,492명을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1893년 4월에는 조조 신부가 전라도로 전임됨과 동시에 우도(Oudot, 吳保祿) 신부가 부산 본당의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초량에 부임하는 즉시 성당 겸 사제관 공사를 마무리짓는 데 노력하여 8월에 이를 완공하였으며, 1897년 6월 9일에는 강성삼(美聖三, 라우렌시오) 신부를 맞이하여 밀양의 명례(明禮, 밀양군 하남면)에 새 본당을 설립하였다. 1898년의 교세 현황을 보면, 우도 신부는 초량을 중심으로 거제· 진주 · 고성 · 함안 등 남서부 지역의 24개 공소와 1,141명의 신자를 순방한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강성삼 신부는 밀양 · 경주 · 언양 · 양산 등 15개 공소와 547명의 신자를 담당하였다. 이로써 경상남도 남부 지역은 두 개의 본당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1898년 4월에는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가 부산 본당의 3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진주의 비라실(진주시 長在洞)과 양산에서는 회장과 신자들이 포졸들로부터 사사로운 박해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1899년에 하동 · 진주 · 고성 · 산청에서 일어난 교회 가탁(假託) 사건, 거제에서 일어난 신자들 사이의 갈등이 타케 신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부 지역의 교세가 확대되는 것을 보고는 진주에 새 본당을 설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뮈텔 주교에게 청원하였다. 뮈텔 주교는 타케 신부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이에 그는 부산 본당을 드망즈(Demange, 安世華) 신부에게 넘긴 뒤, 1899년 6월 진주에 부임함으로써 '진주 본당'(이듬해 마산으로 이전됨)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 결과 경상남도 지역은 모두 3개의 본당 구역으로 분할되었는데, 부산 본당의 드망즈 신부는 1890년에 경주 · 언양 · 양산 · 동래 등 동남부 지역의 22개 공소에서 961명을 순방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진주 본당의 타케 신부는 진주 · 고성 · 거제 · 함안 등지의 남서부 지역에서 24개 공소에 1,054명의 신자수를, 명례의 강성삼 신부는 밀양 · 김해 등 중부 지역에서 8개 공소에 366명의 신자수를 기록하였다.
〔교세와 본당의 변모〕 드망즈 신부는 1899년 5월 이래 공소 6개소를 신설하고, 성당을 인근의 새 집으로 이전한 뒤 이듬해 7월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었다. 이어 5대 주임 로(Rault, 盧若望) 신부는 일본인들이 철도 공사를 이유로 본당 소유의 부지를 침탈함으로써 야기된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02년 9월 13일 부산에서 사망하였고,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그 뒤를 이어 부산 본당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이듬해 9월에는 강성삼 신부가 사망함으로써 밀양의 명례 본당이 폐지되었고, 경상남도 지역 본당은 다시 2개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 이듬해 부산 본당의 교세는 24개 공소에 1,145명이었다.
1909년 봄에 부산 본당 7대 주임으로 부임한 줄리앙(Julien, 權裕良) 신부는 성당 이전을 계획하고, 1915년에는 범일동(凡一洞)에 새 부지를 매입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교세 확대에도 노력하여 1909년에는 24개 공소에 1,364명을, 1911년에는 26개 공소에 신자수 1,567명을 기록하였으나 성당 이전을 실현시키지는 못한 채 1915년 10월에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임되었다. 이 시기에는 교회 안팎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1910년에는 강제로 한일합병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4월 8일에는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大邱代牧區)가 분리 설정됨과 동시에 드망즈 주교가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부산 본당은 새 대목구 소속이 되었다.
줄리앙 신부의 뒤를 이어 부산에 부임한 페셀(Peschel 白鶴老) 신부는 1916년 1월 26일에 범일동(현재의 범일동 본당 위치)의 새 부지를 매입하고, 5월 말에는 마침내 본당을 그곳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부산진(釜山鎮) 본당' 으로 개칭하였다. 또 그는 사제관을 건립하였으며, 부인회와 성가대를 창설하고, 부산 지방의 '천주 공교협회' (天主公教協會)를 조직하여 본당의 재산 관리를 맡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전교 활동에도 노력하여 1921년에는 1,499명으로, 1923년에는 33개 공소에 1,639명으로 신자수를 확대시켰다. 당시 부산진 본당의 신자수는 194명, 영도 공소는 196명, 대석 공소(양산군 상북면 大石里)는 190명이었다.
〔본당의 분할〕 1923년 페셀 신부에 이어 부산진 본당에 부임한 서정도(徐廷道, 베르나르도) 신부는 다음해 10월경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임되고, 10대 주임으로 델랑드(Deslandes, 南大榮)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는 이후 4년 동안 재임하면서 노동자 신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교리 학교를 설립하고, 성당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아울러 1926년 5월 30일에 '경주 본당'과 거제의 '옥포(玉浦) 본당'을, 12월 5일에는 '언양 본당' 을 분리하였다. 당시 경주 본당에는 이성인(李聖仁, 야고보) 신부가, 언양 본당에는 보드뱅(Beaudevin, 丁道平)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 결과 경상북도 지역은 부산진 본당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나갔으며, 경상남도 지역도 동부 지역은 언양 본당으로, 남부 지역은 부산진 본당 소속으로 구분되었다. 이 무렵 밀양 지역에는 다시 임시 본당이 설정되면서 권영조(權永兆, 마르코) 신부가 부임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1926년 5월 30일 명례에 부임하여 이듬해 한옥 성당을 건립하고, 1929년에는 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본당의 부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다가 이곳이 본당 소재지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1930년 1월 1일에 본당을 삼랑진의 우곡리(牛谷里)로 이전했다.
1928년 5월 6일에는 뷜토(Bulteau, 吳弼道) 신부가 부산진 본당 11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30년에 소화학원(小花學園)이란 유치원을 설립하였고, 1932년 1월 17일에는 천주 공교 협회를 '부산 지방 재산 관리위원회'로 개편하였다. 또 이 무렵에 월보인 <부산진 천주교 소식지>를 창간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청학동(青鶴洞) 공소를 준본당으로 승격 분리하였다. 당시 청학동 준본당에는 김선배(金善培, 요한) 신부가 임명되었는데, 그가 1933년에 사망하면서 다시 공소로 전락하였다가 6년 후인 1939년에 다시 정식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김동언(金東彥, 베드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한편 1935년 6월 16일에는 '거제(巨濟) 본당'과 '진영(進永) 본당'이 신설되었다.
이로써 일제 말기까지 경상남도 동부 지역은 부산진 본당을 비롯하여 언양 · 청학동 · 삼랑진 · 옥포 · 거제 · 진영 등 7개의 본당으로 확대되었다. 이 중에서 언양 본당 신자들은 보드뱅 신부를 중심으로 노력한 결과 1936년 10월 25일에 화강암으로 성당을 지어 축성식을 갖게 되었으나, 삼랑진 본당은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우선 1935년에는 3대 주임 파르트네(Pathenay, 朴德老) 신부가 송지리(松旨里)에 새 성당 공사를 하다가 병으로 전임되면서 페네 신부가 송지리에 부임하였으나, 1938년에 다시 유흥모(柳興模, 안드레아) 신부로 교체되었고, 유흥모 신부는 교구의 명에 따라 1940년에 본당을 밀양읍 내이동(內二洞)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37년의 중일전쟁(中日戰爭)과 1939년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일제의 종교 탄압이 가열되면서 경상도 남부의 각 본당들도 전교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만 하였다. 특히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는데, 다행히 이 지역에는 모두 한국인 성직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부산진 성당은 끝내 일제에 의해 징발되고 말았다. 이 무렵 부산진 본당에는 서정길(徐正吉, 요한) 신부가, 청학동 본당에는 신순균(申順均, 바오로) 신부가, 밀양 본당에는 김준필(金俊弼,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언양 본당에는 유흥모 신부가 활동하고 있었다.1944년의 부산진 본당 신자수는 1,412명, 청학동 본당 신자수는 465명이었다.
Ⅲ . 부산 대목구의 설정과 변모
〔해방과 교회의 변모〕 일제 말기에 이르러 대구 대목구는 드망즈 주교가 사망한 뒤 1939년에 무세(Mousset, 文濟萬) 주교가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3년 만에 사임하였으며, 하야사카(早坂久兵衛) 주교가 제3대 교구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다. 이어 8· 15 광복 후에는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와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각각 제4 · 5대 교구장으로서 일시 교구를 관리하다가 1948년 12월 8일에 최덕흥(崔德弘, 요한) 신부가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1월 주교 성성식을 거행하였다. 광복과 동시에 부산진 본당에서는 징발당했던 성당을 되찾았으며, 15대 주임으로 새로 부임한 정재석(鄭在石, 요셉) 신부는 1946년 2월 성당 구내에 소화 보육원(小花保育院)을 설립한 데 이어 가톨릭 청년회와 소년 · 소녀회 등을 설립하였다. 또 활발한 전교 활동의 결과로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1948년 8월 1일자로 대청동(大廳洞, 현 중앙) 본당'을 분리 · 설립하였다. 이에 앞서 정재석 신부와 보좌 안달원(安達遠, 베드로) 신부는 대청동 현 위치에 성당을 건립하여 6월 20일에 축성식을 가졌다. 한편 밀양 본당에서는 유선이(柳善伊, 요셉) 신부 재임기인 1949년 10월 30일에 성당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같은 해 7월 26일에는 '창녕 본당'이 설립되었고, 12월에는 3명의 메리놀회 수녀들이 내한하여 다음해 4월 대청동에 '메리놀 수녀 병원' 을 개원하였다.
1950년의 6 · 25 한국 전쟁을 계기로 경상도 동부 지역 특히 부산 지역의 천주교회는 크게 변모하였다. 전쟁과 함께 부산 지역은 행정 · 군사 등 한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고, 천주교회 활동도 부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자수가 크게 증가하였으며, 성신대학(聖神大學, 즉 대신학교)과 성신중학(즉 소신학교)은 각각 부산 신선동과 밀양에 임시 교사를 마련하였다. 또 한국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즉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는 1951년 11월 5일 초량에서 '성분도 자선 병원'을 개원하였고,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는 전쟁 고아들을 돌보는 데 노력하였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고아 보호 활동은 1954년 9월 1일 동대신동에 '성모 보육원'을 개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피난 시절의 수도여자고등학교는 이날 '데레사 여자중 · 고등학교' 로 인가를 받았다.
한편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새 본당들이 설립되었는데 우선 1951년 5월에는 메리놀회의 카놀(Connors, 權若瑟) 신부가 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허락을 얻어 '초량 본당'을 설립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김충무(金忠務, 글레멘스) 신부가 '동래 본당'을 설립했으며, 이어 1952년에는 '동항 준본당'이 설립되었다.
〔부산 대목구의 설정〕 1953년 말까지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지역의 본당수는 동부 지역에 7개, 서부 지역에 16개 등 모두 23개 본당에 달하였다. 이처럼 이 지역의 교세가 크게 확대되어 나가자 교구장 최덕홍 주교는 교구 분할 계획을 수립하고, 우선 1954년 6월 18일자로 '경상남도 감목 대리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계산동 본당에 재임하던 서정길(요한) 신부를 감목 대리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경남 각 지역의 대표자들은 경남교구 설치 기성회'를 조직하여 교구 설정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 해 12월에 최덕홍 주교가 사망하면서 이듬해 7월 13일 서정길 신부가 대구교구장에, 정재석 신부가 제2대 경상남도 감목 대리에 임명되었다. 그 동안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1954년 11월 12일에 동항 본당이 정식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1월 1일과 2월 1일자로 '신선동 본당'과 '서대신 본당'이 설립되었다.
교황청에서는 1956년 3월 26일 주한 교황 사절 퀸란(Quinlan, 具仁蘭) 주교로부터 경남교구 설정 신청서를 접수한 뒤 한국 교회에 교구 설정을 위한 지침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1957년 1월 21일 마침내 '부산 대목구'(즉 부산교구)를 설정하였으며, 2월 3일자로 최재선(崔再善, 요한) 신부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최재선 신부는 대구교구장 서정길 주교와 사목 관할 문제를 협의하고, 3월 19일자로 '삼랑진 본당'을 신설하는 동시에 인사 이동을 단행하였으며, 1957년 5월 30일 중앙 주교좌 성당에서 푸살렌시스(Fussalensis) 명의 주교로 성성식을 가졌다. 이후 최재선 주교는 중앙 본당에서 거처하다가 1964년에 대청동 4가 81번지에 있는 기존의 메리놀회 무료 진료소 부지를 교구청 부지로 매입한 뒤 교구청사를 설립하고 5월 5일에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설립 당시 부산 대목구의 관할 구역은 부산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전역의 6개 시 20개 군이었으며, 교세는 앞서 1956년에 신설된 울산과 수영(광안리)을 비롯하여 본당 28개(동부 지역 17개), 신자수 6,400여 명, 수도회 6개에 달하였다. 또 1957년에 천주교 유지 재단에서 인수한 '대양중학교'(훗날 폐지)와 '대양공업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일반 학교 6개, 병원 5개, 고아원 5개, 유치원 13개, 대신학생 20명 등이었다.
이후 부산 대목구에서는 1958년 9월 28일 이후 연례 행사로 개최한 성체 대회와 같은 신심 활동, '산성 농장'과 같은 개척 사업, '부산교구 자선회' 를 중심으로 한 사회 구제 활동, 빈민들을 위한 주택 사업, 성소 계발과 신학생 양성 사업 등을 전개해 나가는 한편, 부산 가톨릭 신자 협의회(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의 전신), 레지오 마리애,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 등을 통한 평신도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에도 노력하였다. 또 1960년 5월 1일에는 한국 최초로 '성가 신용 협동 조합'을, 다음해 3월 3일에는 초량 본당에서 '성우 신용 협동 조합'을 조직하였다. 이 신용 협동 조합 운동은 그 후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1962년 3월 10일에는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부산 대목구가 '부산교구'로 승격되었으며, 이에 맞추어 교구 행정과 사목 활동, 신심과 전교 활동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계속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남에 따라 공의회의 '회개와 쇄신' 정신에 따라 교회 일치 운동과 평신도 활동의 활성화에 노력하는 한편, 전례 및 신앙 생활의 토착화를 지향해 나가게 되었다.
〔마산교구의 분리〕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부산교구는 특히 교세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우선 교구 설립 이후 1966년까지 경남 동부 지역에서만 양정 · 온천 · 구포 · 초장 · 서면 · 대연 · 괴정(신촌) · 송도 · 수정 · 화교 · 해운대 · 동대신동 본당과 김해 · 물금 본당 등 모두 14개 본당이 신설됨으로써 31개 본당으로 증가하였고, 경상남도 전체의 본당수는 51개에 달하였다. 또 신자수는 4만여 명이 증가하여 1966년 말로 총 신자수가 1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 무렵 부산 지역에서는 10여 개의 수도회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한국순교 복자 수녀회에서는 1968년에 부곡동의 오륜대(五倫臺) 수녀원을 건립하였고, 1964년부터 동항 본당에서는 '푸른 군단'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회에서 1962년 12월 31일 양정동에 '성모여자고등학교 를 개교하였으며, 메리놀 수녀회에서는 1963년 12월 16일에 '간호학교'(지산간호보건전문대학의 전신)를 설립 인가받았다.
이처럼 교세와 사업 기관이 증가하면서 부산교구의 최재선 주교는 사목상의 어려움을 느끼고, 주한 교황 공사델 쥬디체(A. del Giudice) 주교를 통해 마산교구의 신설을 교황청에 요청하게 되었다. 이때 최재선 주교는 마산교구의 신설이 1년 후에나 실현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의 결정이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져 1966년 2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산교구' 설립이 결정됨과 동시에 초대 교구장으로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신부가 임명되어 같은 해 5월 31일 주교 성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부산교구는 부산과 울산시, 동래군 · 울주군 · 양산군 · 밀양군 · 창녕군 · 김해군 · 거제군 만을 관할 지역으로 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총 신자수는 74,240명이었다.
Ⅳ . 교구의 안정과 성장
〔교구 운영의 활성화와 안정〕 마산교구 분할 이후 부산교구는 부분적으로 사목 행정상의 문제점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교구에서는 1969년에 들어 사제 원로원을 구성하고 참사위원회를 개편함으로써 교구의 조직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새 시대에 맞는 사목과 행정을 펴 나갈 수 있는 보좌 주교를 임명해 주도록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1971년 6월 25일자로 이갑수(가브리엘) 신부가 새 보좌 주교로 임명되자, 최재선 주교는 이 사실을 8월 3일에 발표하였고, 성직자와 신자들은 성성식을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삼는다는 목표 아래 평신도 중심의 성성식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갑수 주교의 성성식은 1971년 8월 24일 범일동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이갑수 주교는 총대리로서 교구 운영의 활성화를 모색해 나갔으며, 교황청에서는 1972년 3월 29일자로 그를 '성청 임명 관리자' 로 위임하여 교구 행정의 책임과 권리를 맡도록 하였다. 아울러 이갑수 주교는 공동체 일치를 표명하면서 꾸르실료 교육과 그리스도 공동체 묵상회를 비롯하여 신자 재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액션 단체의 정비, 사제 양성 장학회 창립, 청소년 보호 육성 정책 등을 펴기 시작하였다. 또 순교 신심 함양을 위해 '순교자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1972년 9월 15일에는 가르멜 수녀원 뒷산(명장동 산 69번지)에 안장되어 있던 병인 순교자 양재현 · 이월주 · 차장득 · 옥소사의 유해를 오륜대 한국 순교 복자 수녀원 경내(부곡동 산 15-21번지)로 이장하였다.
1975년은 25년마다 시행되는 '성년(聖年)의 해' 였으므로, 부산교구에서는 이를 위해 1973년부터 성년위원회를 중심으로 화해와 쇄신을 위한 계획을 실천해 나갔으며, 1974년 5월 31일에는 구덕 체육관에서 '교구 성년 대회' 를 개최한 데 이어 시외 본당에서도 성년 대회를 가졌다. 이 성년 대회 이후 교구는 점차 사목과 행정 체계 면에서 안정을 찾게 되었으며, 신자수도 크게 증가하여 1966년 6월에 74,240명, 1970년 6월에 75,477명이었던 것이 1974년 12월에는 94,278명을 기록하게 되었다. 한편 부산교구와 마산교구에서는 사목 행정상의 이유로 교황청의 승인을 얻어 1973년 1월 29일자로 관할 구역을 조정하였는데, 이에 따라 경남 거제군 · 창녕군 전체, 김해군 · 밀양군 일부 지역과 함께 장승포 · 진영 · 거제 · 창녕 본당이 마산교구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교구의 본당수는 15개 본당이 신설됨으로써 기존의 27개 본당(위의 4개 본당 제외)을 합해 모두 42개 본당으로 증가하였다.
이와 함께 베네딕도회, 성 바오로 여자 수도회, 성가 수녀회 등이 새로 부산에 진출함으로써 1975년까지 교구의 활동 수도회는 19개로 확대되었다. 그 동안 메리놀 수녀회에서는 1969년 1월 1일에 메리놀 병원의 운영권을 완전히 교구측에 이양하였으며,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광안 분도 의원(성 분도 치과 의원의 전신)의 설립 인가를 받았다. 또 슈바르츠(A. Schwartz, 소재건) 신부는 1965년에 인가된 마리아 수녀회를 중심으로 아미동 · 암남동 · 구봉 성당 등지에서 구호 병원과 갖가지 사회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교구의 성장〕 이갑수 주교는 1973년 11월 7일부터 교구장 서리로 교구 사목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어 교황청에서는 1975년 6월 28일자로 이갑수 주교를 제2대 부산교구장으로 임명하였으며, 7월 17일에는 중앙 성당에서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그는 교구의 신앙 쇄신 운동, 평신도 사도직 단체의 활성화, 청소년 보호와 육성, 성소 증가와 교세 확대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1976년 4월 19일에 '가톨릭 교육원' 을 개원하여 신앙 쇄신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고, 이듬해 9월 19일에는 명장동에 안장되어 있던 나머지 순교자 이정식 · 이삼근 · 이관복 · 박소사 등 4명의 유해를 다시 오륜대의 수녀원 경내로 이장하였다. 한편 1976년 9월 30일 오륜대 수녀원 경내에서 착공된 '순교자 기념관'이 1981년 10월 5일에 축성되었다.
한편 교구에서는 1975년 7월 31일에 대청동의 교구 청사(지하 1층, 지상 2층)를 신축 완공하였으며, 1980년 12월 9일에는 숙원 사업인 가톨릭 센터 기공식을 가졌다. 아울러 이갑수 주교는 교구 사목 체계를 재정비하는 데 노력하여 참사위원회 등을 발전적으로 개편하였고, 1985년 3월 13일자로 사무처를 독립 기구로 편성하면서 사목국 · 관리국 · 교육국 · 홍보국의 각 업무를 확정구분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구의 사목 · 선교 · 홍보위원회를 구성하고, 1986년 5월 12일에는 사회와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기 위하여 '부산교구 정의 평화위원회' 를 구성하였다.
1982년은 교구 설정 25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맞추어 교구에서는 '교구 공의회' 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1979년 9월 1일부터 그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신앙 쇄신과 토착화 및 사회 안에서의 교회' 라는 큰 주제 아래 1982년 4월 5일부터 1984년 10월 3일까지 네 차례의 공의회 총회와 65회의 분과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 공동체 사회 · 전례 · 교육 등 각 분과별로 교구의 미래 사목 방향이 결정되었다. 또 1982년 4월 30일에는 가톨릭 센터 축성식을 가졌으며, 9월 12일의 학생 신앙 대회(장소 : 구덕 실내 체육관)에 이어 10월 24일에는 부산교구 설정 25주년 기념 신앙 대회(장소 : 부산 공설 운동장)가 개최되었다. 이어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행사와 시성식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5월 5일에 수영 비행장에서 영접하고 대대적인 신앙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동안 부산교구의 교세는 크게 확대되었다. 본당은 1973년에 42개였던 것이 1986년 말에는 62개 본당으로 증가하였고, 신자수는 20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또 성소의 증가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75년부터 1986년까지 36명의 신부를 탄생시킴으로써 성직자수가 100명 이상에 이르게 되었으며, 활동 수도회는 1975년에 20개였던 것이 1987년 초에는 모두 28개로 증가하였다. 특히 남자 수도회인 '사랑의 선교 수사회' 에서는 1980년 9월 16일 부산에 진출한 이래 불우 이웃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시작하였고, 1986년 5월 15일에는 한국 외방 선교 수녀회'가 창립되었다.
이 밖에도 1977년 5월 9일에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문현동 '성 분도 봉사의 집' 이, 1982년 5월 1일에 성모 성심회의 보수동 성 요셉 병원' 이 개원되었고, 1986년 8월 15일에는 우암동에서 '오순절 평화의 마을'(훗날 삼랑진으로 이전됨)이 문을 열고 오순절 평화의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1979년 1월 1일에는 메리놀 간호학교가 지산간호전문대학으로 승격 인가되었고, 같은 해 5월 23일에는 성모학원의 운영권이 교구로 이관되었다. 또 1982년 3월 5일에는 초량동에서 가톨릭 신학원이, 1984년 8월 1일에는 가톨릭 센터 내에 협동 조합이 문을 열었다. 한편 기존의 신자 협의회는 1975년 4월 26일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로 개편되었으며, 1980년 4월 16일에는 성령 쇄신 봉사회가, 1981년 1월 16일에는 매리지 엔카운터(ME)가 도입되고, 후원회나 다른 봉사 · 활동 단체들도 활성화되었다.
〔교구의 현대화와 현재〕 1987년 1월에 부산교구는 설립 3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교구에서는 8월 9일에 성지 개발위원회(훗날 순교자 현양위원회로, 그리고 다시 부산교회사연구소로 변경됨)를 발족시켰으며, 10월 18일에는 부산교구 설립 30주년 기념 성체 대회(장소 : 사직 야구장)를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갑수 주교는 1988년 3월에 부산 가톨릭대학 설립을 발표하였고, 순교자 현양위원회에서는 9월 30일 동래 장대골에 순교자 기림비를 건립한 데 이어 이듬해 5월 15일에는 삼랑진 용전에서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무덤을 발굴 확인하였다. 바로 이 시기는 교회 안팎에서 자발적인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때였으므로, 부산교구에서도 1987년 4월 22일부터 단식 농성과 기도를 통해 이 운동에 동참하면서 사회와 아픔을 함께하였다.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 성체 대회의 개최가 확정되자, 교구에서는 이해 초부터 한마음 한 몸 운동의 일환으로 헌미 · 헌금과 헌혈 운동, 불우 이웃 돕기 활동,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으며, 10월 18일에는 2만여 명의 신자들이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 성체 대회에 참석하였다. 한편 11월 11일에는 군종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남천동 본당에 있던 정명조(鄭明祚,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교구에서는 2000년대의 복음화와 교구 현대화를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우선 1990년 9월 28일에는 《부산교구 30년사》 출판 기념회를 가졌고, 12월 24일에는 부산 가톨릭대학 설립을 인가받아 다음해 3월에 첫 입학생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992년 2월 1일에는 교구 사회 복지국을 신설하였으며, 5월 30일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새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된 남천 본당의 신축 성전 축성식을 현지에서 거행하였다. 이로써 교구의 주교좌 본당은 기존의 중앙 본당을 비롯하여 2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다음으로 1993년 10월 7일에는 부산 가톨릭대학의 신축 교사를 완공 축성하였고, 1997년 2월에는 남천동에 새 교구 청사를 완공하여 이전한 뒤 4월 29일자로 축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는 '새 하늘 새 땅을 향하여'를 주제로 부산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신앙 대회(장소 : 사직 운동장)를 개최하였다.
그 동안 교구의 교세도 꾸준히 증가하여 1997년 말 현재 본당 83개, 신자수 33만 5,560명, 성직자수 208명(교구 소속 187, 기타 21), 활동 수도회 34개, 의료 기관 5개, 사회 복지 기관 60개, 교육 기관 10개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중 성 분도 병원의 운영권이 1988년 8월 31일 교구로 이양되었으며, 1993년 2월에는 지산간호전문대학의 간호과를 폐지하는 대신 부산 가톨릭대학 안에 간호과를 신설하였다. 또 1989년에는 부곡동에 지산고등학교를 개교하였으며, 1996년 11월 29일에는 공보처에 FM 라디오 방송국 설립 신청서를 제출하고 그 개국을준비하는 중에 있다. 이처럼 부산교구는 1957년에 설립된 이래 성장을 계속해 왔지만, 2000년대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전교 활동을 추진해 나가야 하고, 농촌 살리기 운동이나 복지 사업, 소공동체 운동의 활성화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과제로 남아 있다. (→ 한국 천주교회)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金九鼎 編著, 《嶺南殉教史》, 大建出版社, 1966/ 김구정, 《천주교 경남 발전사》, 天主教釜山教區, 1967/ 天主敎 凡一敎會, 《釜山宣教九十年史》, 1979/ 天主教釜山教區, 教區年報》, 韓國敎會史研究所,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울敎區年報》 Ⅰ, 明洞天主敎會, 1984/ 安達源, 《天主教梁山地域史》, 영남산업 연구원, 198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마백락, 《경상도 교회의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天主教 釜山教區 편, 《釜山教區三十年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천주교 언양 교회, 《信仰傳來二百年史》, 1993/ 송기인, <부산교구의 어제>(부산교구 주보 연재물), 1997.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