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골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박해 이후에 교우촌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2년에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그 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의 명에 따라 1885년에 신학교 교사(校舍)와 사제관 겸 성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오두막 두 채를 이곳에 건립하였다. 이어 블랑 주교는 새로 입국한 마라발(Maraval, 徐若瑟) 신부를 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임명하였고, 마라발 신부는 즉시 부엉골에 부임하여 1885년 10월 28일자로 소신학교를 개교함과 동시에 그 이름을 '예수성심신학교'로 명명하였다. 이처럼 궁벽한 곳에 신학교를 설립한 이유는 아직 박해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다면 더 나은 장소로 이전될 가능성이 많았다. 부엉골 소신학교의 정식 교사는 마라발 교장 신부 한 명뿐이었고, 평신도 한 명이 한문을 담당하였는데 당시의 교과 과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학생은 1884~1885년에 페낭(Pinang)에서 귀국한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이내수(李迺秀, 아우구스티노), 전 안드레아, 최태종(루가)을 포함하여 모두 7명이었다. 이 소신학교는 처음에 예상되었던 대로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된 이듬해 3월에 서울 용산으로 이전되었다.
한편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부엉골 공소는 신학교의 본당 격으로 승격되었으며 교세도 점차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신학교 이전과 동시에 공소로 전락하였다가 1889년에 르 비엘(Le Viel, 申三德) 신부가 부임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마르탱(Marin, 沈良) 신부,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 등이 부엉골 본당을 담당하였으며, 1894년에는 신자수가 96명까지 증가하였으나 부이용 신부가 1896년 9월 17일에 본당을 충북 장호원(長湖院, 즉 감곡)으로 이전하면서 다시 공소로 전락하였고, 1900년대 초에 이르러 폐쇄되었다. (⇦ 부흥골 ; → 가톨릭대학교 ; 예수성심신학교 ; 문막 본당)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울교구 연보》 I ,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본당별 교세 통계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