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베드로. 한국명은 손이섭(孫以燮). 1872년 3월 26일에 프랑스 아베롱(Aveyron) 교구의 빌뇌브(Villeneuve)에서 태어나 1891년 9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95년 6월 30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동료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 해 8월 15일 파리를 출발하여 10월 11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임시로 서울 주교관에 머무르며 한국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1896년 초 강원도 이천(伊川)의 염산리(簾山里) 본당(후에 개하리 '망답' 으로 이전) 관할의 포내(浦內)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부이수 신부가 부임할 당시의 포내 본당 사목 관할 구역은 이천군 낙양면의 삼포리(三浦里)와 중동(中洞) 등 이천 지역의 2개 공소를 비롯하여 지리적으로 강원도와 인접해 있던 황해도 동북부의 신계(新溪), 곡산(谷山), 수안(遂安) 등지의 13개 공소였으며, 전체 신자수는 300명 가량이었다. 이후 성당 건축을 비롯하여 본당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벌인 부이수 신부는, 1907년에는 전교 활동의 일환으로 '애주(愛主) · 애국(愛國) · 애인(愛人)'을 교지(校旨)로 삼아 초등 교육 기관인 삼애학교(三愛學校)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 2월에는 숭희학교(崇熙學校)를 설립하여 수안 공소에서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10년경 황해도 동북부 지방은 관할 공소수가 신계에 8개, 곡산에 5개, 수안에 5개 등으로 증가하였고, 전체 신자수도 1,868명에 이르렀다. 그 후 1925년 6월에 사창(社倉) 본당이 설립되었고, 1928년 5월에는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 장림리(長林里)에 곡산 본당이, 신계군 고면 태을리(太里)에 삼차동 본당(三次洞本堂, 정봉 본당의 전신)이 설립됨에 따라 부이수 신부가 사목하던 포내 본당은 이천 개하리(일명 망답)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고 말았다. 이에 1928년 5월 경기도 청계리(淸溪里)의 하우고개〔下牛峴〕 본당 주임으로 전임된 부이수 신부는 문맹 퇴치와 개화 사상 보급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애경 강습소 '와 같은 육영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1930년에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에서 휴양하며 이웃 용산 공소의 '성모 성심 성당'을 돌보면서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 지도 신부를 겸하였다. 이어 1936년부터는 대신학교 영성 지도 신부로 활동하였다.
처음 한국 선교사로 파견된 후 포내 본당에서 30년 동안 사목한 부이수 신부는, 강원도와 황해도 지역의 교세 신장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사제 성소에도 큰 관심을 가져 여러 신학생들을 추천하였는데, 이들 중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이광재(李光在, 디모테오), 이재현(李在現, 요셉) 등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1944년말부터 건강이 악화된 그는 1948년부터 서울 성모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7월 14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삼애학교 ; 포내 본당 ; 하우현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 향잡지》 638호(1928. 5. 31), p. 222; 697호(1930. 11. 5), p. 486 1013호(1949. 8), p. 125/ 《서울대교구 교구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텔 주교 일기》 Ⅰ~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86~1993/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李裕林〕
부이수, 피에르 조제프 (1872~1949)
Bouyssou, Pierre Josp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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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부이수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