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2동 본당

富平二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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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소속 본당. 인천시 부평구 부평6동 656-27 소재. 1952년 3월 답동(沓洞)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모 성심. 설립 당시에는 '부평 본당'이었으나, 1964년에 현재의 본당명으로 개칭하였다. 관할 구역은 부평2 · 6동 전역과 부개동 일부 지역. 〔교 세〕 1952년 959명, 1962년 3,824명, 1972년 2,525명, 1982년 3,944명, 1988년 3,869명, 1992년 4,230명, 1996년 4,603명. 〔역대 신부〕 초대 김영식(金永植) 베드로(1952. 3~1960. 5), 2대 페티프렌(R. Petip-ren, 변) 로이(1960. 5~1967. 2), 3대 오경환(吳庚煥) 프란치스코(1967. 2~6), 4대 머피(A. Murphy, 南) 알프로(1967. 6~10), 5대 티난(J. Tynan, 南) 요한(1967. 10~1968. 4), 6대 버진(P. Bergin, 洪) 파트리치오(1968. 4~1970. 3), 7대 파퀘트(J. Paquet, 朴) 요셉(1970. 3~1972. 6), 8대 주재효(朱在孝) 요셉(1972. 6~1973. 8), 9대 솔티스(J. Soltis, 薛) 요한(1973. 10~1980.6), 10대 강성욱(姜聖旭) 마태오(1980. 8~1986. 2) 11대 최병학(崔炳學) 바오로(1986. 2~1992. 2) 12대 황상근(黃相根) 베드로(1992. 2~1996. 2), 13대 김영재(金英在) 그레고리오(1996. 2~현재).
〔공소 시대〕 부평 지역은 기해박해(己亥迫害) 인해 1839년 7월 20일에 순교한 성 김성임(金成任, 마르타)의 출생지였을 뿐만 아니라, 성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가 오랫동안 전교 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그후 박해가 끝나고 이 지역에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구성된 것은 대략 1900년대 초였다. 1909년에 제물포(濟物浦, 현 답동) 본당 4대 주임 드뇌(E. Deneux, 全學俊) 신부에 의해 부평 공소가 설립되었는데, 당시의 신자수는 21명이었지만 1914년경에는 71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초대 공소 회장의 전횡(專橫)으로 말미암아 전출하는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결국 1927년 이후에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40년대 초에 제물포 본당 5대 주임 임종국(林鍾國, 바오로) 신부가 조병창(造兵廠)에 근무하는 직원과 노무자 신자들을 위해 모임을 주선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41년 12월 28일 부평 공소가 부활되었다. 또 임종국 신부는 이듬해 8월 15일 지역 주민들을 위해 따로 백마장(지금의 부평구 산곡동) 공소를 설립하고, 1952년 1월 12일에는 강당을 건립하였다. 이 두 공소를 중심으로 부평 지역의 신자수가 증가하자 메리놀 외방전 교회의 크레이그(H. Craig, 奇厚根) 신부는 1948년 초에 본당을 설립하려고 하였으나, 그 해 6월 백동(柏洞, 현 혜화동)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이 계획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본당 설립과 정착〕 한국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1952년 3월에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는 부평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김영식 신부를 임명하였다. 고아 구제 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던 김영식 신부는 박문여자중학교의 부지 1만여 평 가운데 기숙사 건물을 포함한 3,034평을 교구로부터 배정받아 기숙사 건물을 증축 · 보수한 후, 그 해 9월 '연백성모원' 을 개원하여 고아들을 돌보는 한편, 건물의 일부는 성당(60평)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고아들과 지역 주민들을 위하여 1955년 5월 5일에는 성모자애병원(聖母慈愛病院)을 개원하였다. 이어 김영식 신부는 성당 신축을 서둘러 1950년대 말에 현재의 부지 1,676평을 매입하고 164평의 성당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1960년 5월에 후암동(厚岩洞) 본당으로 전임됨으로써 그의 후임인 페티프렌신부가 성당을 완공하게 되었다. 아울러 연백성모원과 성모자애병원을 더 이상 본당 차원에서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페티프렌 신부는 부임 즉시 운영권을 교구로 이관하고, 그 대신 1963년에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양로원(1977년에 폐쇄)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처럼 사회 복지 사업을 중심으로 한 전교 활동이 성과를 거두면서 설립 10여 년 만에 신자수가 4배 가까이 증가하자, 1964년 7월에 부평1동(富平一洞, 현 부평4동) 본당, 그리고 9대 주임 솔티스 신부 때인 1978년 5월 31일에는 주원(朱元, 현 간석4동) 본당을 분리하였으며, 1979년에는 성당(135평)을 증축하였다. 또 1982년 2월 16일에 부평3동(富平三洞) 본당, 1983년 3월 1일에 일신동(日新洞) 본당, 같은 해 4월 3일에는 부평5동(富平五洞) 본당을 분리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회합실이 부족하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주축이 되어 1990년 5월 11일에 소성당과 교리실 등을 갖춘 494평의 교육관을 신축하였다. 이후 본당에서는 해마다 불우 이웃 돕기 바자회를 개최해 오고 있으며, 1996년 11월에는 환경 자선 바자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부평2동 본당에서는 청주교구장 정진석(鄭鎭奭, 니콜라오) 주교를 비롯하여 모두 18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 인천교구 ; 답동 본당)
※ 참고문헌  천주교 답동 교회, 《답동 대성당 100년사》, 1989/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사》, 천주교 인천교구,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의 전사》, 자료로 본천주교 인천교구사 1집, 천주교 인천교구, 1987/ 一, 《선교사 서한문》, 자료로 본 천주교 인천교구사 2집, 천주교 인천교구, 1988/ 一,《인천교구 25년》, 자료로 본 천주교 인천교구사 3집, 1987/ 一, 《교세 통계표》, 자료로 본 천주교 인천교구사 4집, 1987/ 천주교 인천교구 부평4동 교회, 《부평4동 본당 30년사》, 1995.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