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주로 소수 계층이 밀집하여 사는 도심지의 주거 지역을 가리킨다. 게토는 본래 유럽의 도시에서 법적인 강제 수단을 통해 구별된 유대인 집단 부락이나 거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중세 시대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모슬렘 국가의 어느 도시에서나 자발적으로 유대인의 거리로 통하는 특정 구역에 집단적으로 모여 자유스럽게 살았다. 거기에는 법적인 제재 조처가 없었다. 오토만 제국 시대의 이스탄불에는 유대인 지역들이 온 도시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페르시아, 예멘,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정통 회교 국가에서 비회교도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강제적으로 별도 지역에 모여 살도록 조처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국가의 대사관들이나 성지 순례객들이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게토는 1280년 회교도들이 모로코에서 유대인들을 분리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일부 모슬렘 국가에서는 유대인의 가옥과 문의 크기를 엄격하게 규제하기도 하였다. 게토는 19세기가 되면서 서구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멘 같은 회교 국가에서는 1948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대거 이주하기 직전까지 게토 제도가 존속되어 있었다.
게토라는 말은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주물 공장 (ghetto) 부근의 베니스 구역을 묘사하는 데 처음 사용되었다. 1516년 이 지역은 담장과 대문으로 둘러싸여져 도시의 다른 지역과 단절된 유대인의 주거 지역으로 따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게토라는 말은 그 후 같은 도시에서 유대인의 인구 증가에 따라서 추가로 할당된 다른 유대인 구역에도 사용되어 결국은 유럽에서 유대인의 강제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게토 밖에서는 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인들은 법적으로 게토 안에 거주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그리스도 교인인 파수꾼을 두어 유대인 게토를 감시하였다. 이 같은 게토는 이탈리아에서 유대인 격리 지역에 대한 모델이 되었으며 반종교 개혁을 거쳐 19세기에 이를 때까지 유럽 도시 전체에 퍼져 형성되었다. 한편, 게토의 어근이 이혼이나 별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겟(ge)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로마에서 겟은 격리된 지역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리스도교인들 또는 회교도인들과 구별되어 대부분 어느 도시에서나 강제적으로 주거 환경이 가장 열악한 지역에 모여 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관습적으로 게토는 외부와의 단절을 위하여 담으로 둘러쌓여져 있었다. 그리고 밤이나 주일에는 대문을 잠가 문밖으로 외출을 할 수 없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예
수를 죽였다고 해서 반셈족 감정이 돌출되던, 성주간 때에는 문을 잠가 두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게토 안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과 종교에 따른 자치 기구와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게토 밖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는 휘장(대개는 노랑색)을 차도록 되어 있었다.
18세기 말엽 유럽의 일부 지식층은 유대인의 관습을 개혁하고 그들을 국가에 통합시키려는 의도에 따라서 유대인의 게토 폐지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인 1791년 프랑스 국회는 모든 유대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을 정식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가톨릭 국가들은 유대인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을 다시 게토로 돌려보냈다.오스트리아 제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두 추방당했으며 프랑크푸르트, 브레멘, 뤼백같은 도시에는 게토가 복구되었다.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완전한 법적 자유를 얻어서 게토에서 해방된 때는 19세기 중엽부터였다. 수많은 유대인들은 미국, 아르헨티나, 호주 등 세계 각국으로 이민을 떠나 새로 정착한 나라에서 새로운 게토를 형성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초기 유대인 이민자들은 주로 해안 도시에 정착하여 게토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미국 문화에 동화됨에 따라서 게토를 떠나게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나라 전역에 흩어져 자유롭게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즐기게 되었다.
유대인 학살 기간 동안에 나치에 의하여 복구된 게토들은, 유대인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가두어 둔 가축우리와 같은 것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게토의 성격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게토는 나치에게, 첫째는 유대인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감금해 두는 수용소로, 둘째는 유대인의 경제-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게토는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강제 노동을 위한 포로 수용소나 죽음의 처형장으로 실어 보내기 전에 수급 조절을 위하여 잠시 머무르게 하는 일종의 정거장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나치는 또한 위생 시설이 전무한 좁은 지역에 수많은 유대인을 수용하여 영양 실조 상태에서 중노동을 시킴으로써 유대인들이 스스로 멸절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일부의 게토에서는 값싼 노동력 때문에 유대인들의 처형이 연기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 계획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게토는 대부분 유대인들이 이전에 밀집하여 살던 도시의 빈곤한 지역에 위치하였다. 다른 지역이나 이웃 동네의 유대인은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고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처형장으로 보내짐에 따라서 게토의 크기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처음에 게토는 유대인의 거리를 상징하는 표식만 부착된 개방된 게토와 바르샤바에서처럼 담장이 둘러쳐진 폐쇄된 게토로 구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차이는 곧 폐지되고 말았다. 게토와 연결된 모든 도로는 봉쇄되고 게토 밖에서 발견되는 유대인은 사형에 처해졌다.
나치는 1939년 12월 폴란드를 침공한 그 이듬해 2월에 로즈(Lodz)에 최초의 게토를 형성하였고, 그해 12월에는 바르샤바에도 거대한 게토를 만들었다. 독일은 1941년 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 말 나치는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대량 학살을 결정하였다. 하이드리히, 뮐러,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지도자들은 그 실행을 모의하기 위하여 1942년 1월 20일 베를린에서 '반제 회의' (Wannsee Conference)를 통하여 폴란드를 중심지로 하여 유럽에서 1천1백만의 유대인 모두를 멸절시키기로 했다. 나치는 로즈, 리가, 민스크, 코브 등의 게토로 동구의 유대인들을 후송하였다. 그들은 게토 안에 유대인 의회(Judenrat)와 유대인 경찰 제도를 두어 노동력이 있는 유대인들과 죽음의 형장으로 끌려갈 유대인들을 선별하도록 하였다. 또한 열악한 환경의 게토 안에서 테러를자행함으로써 '최종 결정' (final solution)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을 꺾으려 했다. 1942년 바르샤바 게토에서는 유대인 의회를 통하여 매일 6천 명의 유대인을 트레블링카(Treblinka) 죽음의 수용소로 실어 날랐다. 바르샤바 게토에서는 그 해 6월부터 10월 중순까지 10주 동안에 거의 31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로 끌려가 학살을 당했다. 1942년 말 히믈러(Heinrich Himmler, 1900~1945)에게 제출된 한 보고서에는 폴란드 영역에서 1,274,166명의 유대인이 '재해결' (학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2년 1,000여 곳에 이르던 게토는 유대인 학살로 55곳으로 줄어들었다. 1943년 히믈러는 오스트란트 전역에 흩어져 있던 게토의 생존자들을 포로 수용소로 보내기도 하였다.
게토에서의 저항 운동은 위와 같은 억압 속에서 일어났다. 1943년 3월 18일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들은 비밀리에 무기를 구입하여 마사다(Masada)의 유대인 항쟁 때처럼 조직적인 저항 운동을 5주 동안 벌였다. 이 같은 저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방관하고 있던 외부의 세계에 게토에서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진실된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게토에서의 저항 운동은 비알리스톡, 민스크, 코브노, 빌나 게토에서도 계속되었다. 폴란드의 로즈 게토는 마지막으로 1944년 8월에 폐지되었다. 나치는 1941년 말 테레시엔슈타트(Theresienstact)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등 유럽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게토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세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은폐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 디아스포라 ;유대교)
※ 참고문헌 H.H. Ben-Sasson(ed.) A History ofthe Jewish People,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張春植〕
게토
[영]gh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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