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 구약성서에서의 의미
Ⅱ . 신약성서에서의 의미
Ⅲ . 신학사적 고찰
Ⅳ . 신학적 고찰
Ⅴ . 몸의 부활, 인간의 부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의 가운데 하나로 그리스도교 설립에 가장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한 개념. 예수의 부활 신앙과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실상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의 거짓 증인들로 판명될 것입니다. 도대체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일으키시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그분께서 일으키셨다고 우리는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는 것입니다"(1고린 15, 14-17).
종교학적으로 볼 때, 부활은 인간의 생사(生死) 문제, 영원과 시간,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갈망하는 영원한 생명은 죽음의 문제를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죽음과 영생은 하나의 인생의 물음이며, 그리스도교의 부활관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후(死後)의 세계가 아니라 인생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시해 준다. 그리스도교가 죽음 '후'의 부활을 이야기한다면, 이는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부활한 자가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은 현실의 한복판에 이미 와 있다(마르 1, 15).
Ⅰ . 구약성서에서의 의미
죽은 자들의 부활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후기에 나타났다. 기원전 3~2세기경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죽음 저편에서의 삶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에 널리 유포된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죽은 자가 다시생명을 취한다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는데, 그 까닭은 늘야훼와 함께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부활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불사불멸에 대한 욕구에서가 아니라 야훼 신앙 자체에서 생겨났다. 그들의 믿음에 따라 야훼는 살아 있는 하느님으로서 자신을 역사 안에 제시하며, 인간은 오직 역사 안에서만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간은 역사 안에서 야훼와 함께 살아야 하고, 거기서 야훼가 하느님이요 주님이 심을 증거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죽은 자를 거룩한 권력의 소유자로 보면서 야훼의 절대 요구와 충돌을 빚는 사자 의식(死者儀式)에 대해 완고하게 싸웠던 것이다. 지하 세계인 셔올(Sheol)도 이스라엘에게는 죽은자가 생명을잃고 허망한 존재로 처해 있는 곳이 아니라, '야훼와의 멀어짐' (시편 88, 6 : 115, 17 이하 : 이사 38,
18 이하 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구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머무르는 지상의 삶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또 야훼의 권능이 인생의 무상(無常)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야와 에녹은 죽기 직전 하느님께로 올라갔고(기원전 9세기경 : 2열왕 2, 11 ; 창세 5, 24), 아모스서 9장 2절에는 야훼의 정의로운 심판 행위 앞에서 셔올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강조되었다(기원전 760경). 이는 세상의 어떤 영역이나 죽은 자의 세계도 야훼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야훼는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여 인간을 심판하신다.
유배 이후의 예언 문학에는 하느님의 구원이 모든 민족에게 미칠 것이라는 기대가 채워짐으로써 죽음이 극복된다고 묘사되어 있다(기원전 300경 : 이사 25, 6-8. 21-23; 시편 22, 27-30). 야훼는 죽은 자가 하느님 찬미와 구원에 참여하도록 생리적 죽음을 멸하신다(이사 25, 8 ; 시편22, 30). 아직 부활 신앙에 대한 형식은 나타나지 않지만 부활에 대한 결정적인 종합을 보인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영원한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내포하고 있다. 유배 이후 시대의 후기 지혜 문학은 '야훼와의 일치 속에 살고 있는 고통받는 정의로운 자들이 죽음으로써 야훼와 결별하게 되는가' 하는 물음을 갖고 번민하였다. 그 답은 야훼는 자기와 일치한 삶을 살았던 각 개인들을 붙드시고(시편 73, 23), 그들이 죽은 후에는一엘리야나 에녹처럼 죽기 전이 아니라一셔올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신다는(기원전 200경 : 시편 19, 15 ; 욥기 19, 25-27) 것이다.
부활에 대한 명백한 표상은 두 군데의 묵시 문학 본문에 나타난다. 이사야서 26장 7-21절은 부당한 고통 앞에서 야훼의 정의를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담고 있다(기원전 300경). 야훼가 곧 다스리게 될 것이니, 원수들을 벌하시고 죽은 당신의 백성을 다시 살게 할 것이다. 말하자면 부활은 곧 다가올 구원의 시대에 지상의 삶으로 귀의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다니엘서 12장 1-4절은 박해시대에 곧 하느님이 개입하리라는 것을 선포한다(기원전168~164). 순교자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셔올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나게 될 것이다. 부활은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제한되어 있고 보복 사상(원수의 멸망)으로 일관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부활에 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창조주 하느님 · 삶의 하느님 · 정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자기와 일치하고 있는 자들에게 충실하여 구원을 약속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부활 신앙의 내용이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의로운 자의 육체가 세말(世末)에 새 땅에서 부활하리라는 것이 성서 이외의 묵시문학에 나타났는데, 이러한 고백은 바리사이 운동에서 결정적으로 대변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랍비주석은 구약의 본문에서 찾고자 하였지만, 구약은 이런 부활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죽음 저편의 삶에 대해서 믿었다. 팔레스티나에 널리 알려진 육체 부활에 대한 표상은 물질적인 육체(시체)가 아니라 몸에 관한것이었다.
Ⅱ . 신약성서에서의 의미
〔예수의 부활관〕 죽음의 극복에 대한 예수의 기대는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도래하였다는 그의 복음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복음은 존속하는 세계 질서에 종말과 전환이 왔으며, 하느님 스스로가 악의 세력을 쳐부수고 원초적인 창조의 의미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시고, 세말의 구원의 잔치에 죽은 성조들이 참여한다(마태 8, 11)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루가 11, 31 이하 ; 마르 9, 43-48 : 마태 10, 28 등). 죽은 이들의 부활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룬 것은 마르코 복음 12장 18-27절뿐인데, 이는 엄밀하게 말해 하느님의 권세에 대한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마르 12, 26 이하).
〔제자들의 예수 부활 체험〕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선포한 복음도 모순이라는 혐의를 일으키게 한 사건이었다. 예수가 죽자 제자들이 도주하였다는 사실(마르 14, 27-50 ; 16, 7 ;요한 16, 32)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도주하였다가 다시 돌아온 제자들은 하느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셨다고 선포하였다. '일으켜 세움' 이라는 개념에는 첫 증인들의 새 경험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지상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당시의 열심한 유대인들이 세말에 모든 의로운 자들이 일어나기를 희망하였던 바가 생명의 하느님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세말에 일어날 일을 나자렛 예수에게서 미리 행하셨으므로, 부활은 예수 안에서 세말이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부활은 '현재' 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죽은 후의 어떤 세계에서의 삶과는 무관하다.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진 첫 사람(1고린 15, 20), 새로운 창조의 시작(2고린 5, 17), 모든 하느님 약속 의 '예' 와 '아멘' (2고린 1, 20)이다. 부활한 자와의 만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죽음보다 더 강하고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제자들은 환시만이 아니라 '징표'를 신앙하고 받아들이는 가운데에서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였다. 그런 징표 가운데 하나가 식사인데, 제자들은 식사 중에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현존을 체험하였다. 이는 부활한 예수를 더 이상 지상의 환생한 육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는 새로운 생동감 가운데에서 체험하였음을 의미한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 (마태 18, 20). 이로써 예수의 부활은 과거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사건으로 체험되었다. 지금 예수는 부활하고 있다.
예수가 죽은 이로부터 부활하였다는 확신은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고백의 형태(1데살 1, 10 ; 로마 10, 9 ; 사도2, 32)와 설화 형식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하느님께서 죽은 이로부터 소생시킨 그분"(1데살 1, 10 : 갈라 1, 1 : 1고린 6, 14 : 2고린 4, 14 : 로마 4, 24 : 8, 11 : 19, 9), "예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라는 신앙 고백 형식(1데살4, 14 ; 1고린 15, 3 이하 : 1베드 3, 18), 둘째로 예수의 죽음의 의미(2고린 5, 14 이하), 세례(로마 4, 24 이하 : 6, 4 ; 1베드 1, 3) 그리고 교회(에페 1, 20-23)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하여 부활을 표현하였다. 셋째로 빈 무덤 사화(마르16, 1-8)와 발현 사화(마태 28, 16-20 : 루가 24, 13-53) 및 사도 행전의 시작과 설교(1, 3-11 : 2, 14-26 등), 넷째로 부활을 전제로 한 진술들인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고백(1고린 16, 22 ; 묵시 22, 20), 옛 찬양시(필립 2, 6-11 ; 1디모3, 16), 묵시록의 현시(1, 12-20 : 2, 8) 등에서도 부활을 읽을 수 있다.
〔용어의 의미〕 부활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사용된 동사들(ανιστεμι, εγηιρω)과 그에 상응하는 명사들(αναστασις, εγερσις)이 사용된 맥락에 유의를 하여야 한다. 이 단어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 잠자는 사람을 깨움 또는 잠에서 깨어남(마르 4, 38), 때때로 예언자의 등장(사도 3, 22)이나 병자나 죽은 이로 간주된 자의 일어섬(루가 4, 39 : 마르 9, 27). 둘째, 죽음으로부터 한 인간이 구제되었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생명으로 다시 돌아옴(1고린 17, 17-24 : 2고린 4, 18-37 : 마르5, 42 : 루가 7, 1-16 ; 요한 11, 23 : 사도 9, 40 이하). 셋째, 죽은 이들이 잠에서 깨어남(다니 12, 2 : 이사 26, 19)과 지상의 삶을 다시 취함(2마카 7, 10 이하 : 마르 12, 23. 25). 넷째, 죄인이 회개로 구제됨(루가 1, 24. 32)과 세례 로 죽음에서 구제됨(골로 2, 12 이하 ; 3, 1 ; 에페 2, 5 이하; 요한 5, 25 ; 1요한 3, 14) 등이다.
그러나 예수(또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러한 서술과는 구분된다. 예수의 죽음은 의학적이나 생물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원천인 야훼와의 결별로 평가되며(사도 2, 24-28), 예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의 최종적인 구제를 의미한다(로마 6, 9 : 사도13, 34-37) '부활' 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의 삶(생명)에서 차용하긴 하였지만, 무상한 현실에서 표상할 수 없는 이 사건을 표현하기 위한 은유이다. 그렇다고 이 은유적인 이야기 방식이 실재를 축소하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신화와는 철저히 구분되며, 또 단순히 해석될 수 있는 은유도 아니다.
부활은 신약성서에서 다른 여러 단어들로도 진술되었다. '영으로 생명을 받으셨다'(1베드 3, 18),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로마 14, 9), '높이시다' (필립 2, 9 ; 사도 2, 33 : 5, 31),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림'(로마 10, 7 ;히브 13, 20), '자기의 영광을 누리다'(루가 24, 26 ; 히브2, 10), '영광을 받으시다'(요한 7. 39 : 12, 16 ; 17, 1), '아버지께로 건너가다'(요한 13, 1. 3) 또는 '올라가다' (요한 6, 62 ; 20, 17) 등이다. 승천이 서로 다르게 묘사된 것(루가 24, 51 ; 사도 1, 9-13)과는 달리 부활과 들어올림은 같은 것으로 관찰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위의 죽음과 부활과 들어올림이 하느님의 '영광' 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다.
〔문학 유형상의 고찰〕 신약성서 본문 전체의 의미에서 볼 때, 부활 이야기는 전승사적으로 매우 이른 증언에 근거한다. 이는 문학 유형상 가장 오래된 50년경의 다음의 두 전거(典據), 즉 "그분(하느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당신의 아들 · 예수" (1데살 1, 10)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1데살 4, 14)에서 증명된다. 바오로는 이 두 형식을 같은 의미로 간주하였다. 이는 부활이 처음 선포될 때인 40년 이전(?)에는 죽은 이를 살리시는 하느님에 대해 고백되었을 뿐인데, 후에 '예수가 일어났다' 든가 '부활했다' 는 그리스도론적 메시지로 바뀌었다는 설(Becker, Hofimann)을 뒤엎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1데살1, 10 ; 로마 10, 9 : 사도 2, 32)라는 가장 오래되고 원초 공동체까지 소급되는 부활 고백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시편 115, 15)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출애 16, 6)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이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종말론적인 행위一예수의 부활은 예수 혼자에게만 고립되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최종적으로 자신을 세계로 향하고 그리하여 세말이 도래하였다는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행위이다一에 대한 고백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론적인 체험도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의 부활은 처음부터 하느님과 최종적인 구원 중재자의 기능에로 들어올려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일어났다"(ανεστε)라는 형식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묵시 문헌에서 알려진 언어로 진술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더 이상 죽은 자 곁에 있지 않고 살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간태(中間態, 능동적 뜻을 가진 수동태)인 '에게르테' (ηγερθη)는 "그는 부활하였다"로 번역될 수 있으며, 요한 복음 2장 19절과 10장 17절 이하에서 예수의 부활은 예수 자신의 행위로 이해되었다.
데살로니카 전서 1장 9절 이하와 4장 14절과 17절의 두 형식의 맥락에는, 기다리던 재림이 이루어지고 최종적인 삶이 중재될 때 죽음의 영역으로부터 소생한 예수에게 특별한 기능이 주어진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러한 기능은 오래된 호소(呼訴)인 마라나타(1고린 16, 22)도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가장 오래된 본문으로 부활이 단순히 십자가의 구원만을 의미한 것(R. Bultmann)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 어록(Q)에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데서 몇몇 학자들은 제자들의 부활을 처음에는 낮춤과 들어올림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가 뒤에 종말론적인 부활을 선취한 것으로 창의적인 해석을 했다고 추측하였다(A. Vögtle, Hoffiman). 그렇지만 가장 오래된 증언(1데살 1, 10 : 4, 14)을 접어 두고라도,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고 묻힌 자의 들어올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바오로도 고린토 전서 15장 11절에서 이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부활 메시지에 대한 초기의 반성은 고린토 전서 15장 3b-5절과 7절에 인용된 신앙의 핵심 주제에 잘 드러나있다. 이 문장에 나타난 동사 '부활했다' (εγηγερται, 바오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에서는 부활이 새로운 상태를 성취한 것임을 알 수 있고, "사흘 만에"라는 말은 호세아서 6장 2절에 의존한 것으로 형식적으로는 하느님의 드문 간섭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앞의 구절과 평행을 이루는 "성경(말씀)대로" (15, 3b-4a)는 믿어지지 않는 사건(십자가에 처형당한 자,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의 구제)을 구약성서, 특히 이사야서 53장 10-12절(또는 호세아서 6장 2절)을 제시하여 믿을 만한 것으로 증언하고자 한 것이다(사도 3, 13 ; 8, 30-35). 제자들은 부활의 메시지를 처음부터 구약성서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요식화하였다. 그래서 시편 2편 7절(사도 13, 33 : 히브 1, 5)을 제시하면서 부활한 그리스도를-양아들의 형식인 시편 2편 7절에 따라-직무 칭호의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 (로마 1, 4)로, 또 '메시아와 주님' (사도 2. 36)의 대관(戴冠)으로 인정했다. 한편 이에 상응하여 초기 신앙 고백 형식인 로마서 10장 9절의 "예수는 주님이시다"(Κύριος Ἰησοῦς)라는 환호는 "하느님이 그분을 일으키셨다"에 평행한다(필립 2, 9-11). 비슷하게 인용된 시편 110편 1절(사도 2. 34참조)의 하느님의 '오른편' 에 오르셨다(대관)는 것은 하느님의 주권이 아직 오지 않은 완성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1고린 15, 24-27 : 묵시 1, 7). 사도 행전 2장 24-28절과 31절(13, 35-37 참조)에서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칠십인역 성서의 시편 15편 8-11절에 따라 부활을 지하 세계로부터 해방하는 즉 죽음의 슬픔을 풀어 주는 출생으로, 또 부패로부터의 보호로 해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처음부터 부활은 공개적으로 논박을 받았다. 고린토전서 15장 5-8절은 부활을 증거하고 변호하기 위해 부활한 자가 여러 증인들 앞에 나타났다고 보고하였으며, 루가 복음 24장 34절에는 '정말로'(ὄντως) 부활했다고 보도하였다. '오프테'(ὤφθη, 그가 나타났다)라는 부정 과거(aorist)는 하느님과 천사의 발현 보도나 예언적 환시에도 종종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루가 복음 24장 34절에서처럼 부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이 부활한 자가자기 자신을 인식하도록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나타났다"(1고린 15, 8)를 어떻게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는 바오로의 다른 보도에서 밝혀진다. 즉 '보았다' (1고린 9, 1), '계시하다' (갈라 1, 12. 16), '인식하다', '깨닫다'(필립 3, 8. 10), '마음속을 비추다'(2고린 4, 6)등이다. 이런 다양한 형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부활한 자와의 만남이나 바오로에게 선사된 깨달음은 지상의 형상을 인식하는 것과는 구별되며, 이미 알려진 표상을 중개로 하여 진술된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거를 부활 후에 쓰여진 복음서들의 빛 속에서 무비판
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복음서들은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미 알려진 표상의 견본들을 구약성서로부터 이용하여 해석하며 서술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는 독자들을 신앙으로 유도하고 또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서이다. 예컨대 루가 복음 24장 13-35절에서는 독자들이 성서 해석과 빵 쪼갬을 통해 어떻게 부활한 자에 대한 믿음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24장 36-43절에서는 단순히 영만을 보았을 뿐이라는 비방에 대해 사도들을 옹호하였다. 또 루가 복음 24장 44-53절, 마태오 복음 28장 16-20절, 요한 복음 20장 19-22절과 21장 1-19절은 부분적으로 의미 심장한 상징으로 제자들이 부활 현현(顯現)으로부터 모든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아들'과 '주님' 이라는 그리스도의 지존(갈라 1, 16 ; 2고린 4, 6)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이끌어 내고, 그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의 증인으로 채택되었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부인들, 특히 마리아 막달레나(마태 28, 1-10 ; 요한 20, 11-18)에게 부활한 주님이 나타났다는 보도는,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역사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들이 오직 특별한 은총으로 부활한 자를 체험하였음을 보여준다.
보다 후기의 증언에는 복음서에 설명된 빈 무덤 사화(史話)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빈 무덤 사화의 기록으로 볼 때도 서로 모순임이 드러난다. 즉 무덤을 봉인하고 경비대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것은 마태오 복음 27장 66절과 마르코 복음 16장 1절 이하의 보도와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두 명의 천사들과 그들의 말 그리고 부인들의 반응에 대한 보도도 모순된다. 빈 무덤 사화의 문학적인 특성과 호교론적인 목표 설정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암시를 얻게 되는데, 그 첫째는 '그분이 부활했다' 는 초대 교회의 설교는 인간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천사의 메시지 형태를 띤 하느님의 말씀이고, 둘째는 십자가에 처형된 자는 온몸과 함께, 즉 죽어 묻힌 개별적인 인격으로서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이후 줄곧 떠오른 "예수의 무덤이 정말로 비었는가?" 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서에서 빈 무덤은 부활의 엄격한 증명이 아니라 '표징' 으로 이용된다. 둘째, 오늘날의 이해 지평에서 볼 때 빈 무덤은 부활에 대한 그 어떤 절대적인 전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한 자의 몸은 지상의 육체의 생물학적 실체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무덤 자체가 비어 있었다는 것一가장 오래된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마태오 복음 28장 13-15절에 따르면 반대자들에 의해 전제되어 있다一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소식과 안식일 다음날 부인들이 발견하였다는 설명과는 구별된다. 그래서 빈 무덤 사화를 꾸민 이야기로 보는 주석가들(R. Bultmann, R. Pesch, Broer)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빈 무덤 사화에서 역사적 핵심을 증거하려고 한다.
빈 무덤 사화와 함께 부활을 증거하고자 한 또 하나의 사화는 발현 사화이다. 발현 사화(마태 28, 16-20 : 루가 24, 13-53 : 요한 20, 19-29 : 21, 1-23)에는 발현의 사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고, 발현 사화가 역사적 추억을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원래의 발현 장소는 갈릴래아이다. 그러나 첫 발현 장소를 예루살렘이라고 보는 것은 (루가와 요한의 일부) 편집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여 하느님께로 들어올림을 받았다는 확신은 그 어떤 부활 사화보다 오래된 것이다.
〔성서 신학적 고찰〕 제자들의 증언과 예수의 선포 내용이 일치하는 부활은 재림 때 완성될 하느님의 계시의 절정을 말한다. 부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여주신 죽은 이를 살리시는 하느님(로마 4, 17 ; 2고린 1, 9)의 행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이로써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주권이 완전히 보장되었다(마르 1, 15 : 이사 52, 7). 예수 자신에게 부활은 최종적인 새 삶(1베드 3, 18 : 그분은 생명을 받았다)의 가능성이고, 참된 출생(사도 2, 24 : 로마 1, 3 이하에서 대립)이며, 메시아와 주님으로 대관한 일(시편 2, 7 ; 110, 1 ; 사도 2, 35 이하 ; 히브 1, 5)이다. 예수는 부활함으로써 유일회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였고, 이 때문에 모든 이는 그를 주님과 구원자로 부르고 그분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한다(필립 2, 10 ; 루가 24, 52 : 마태 28, 9. 17 ; 요한 20, 28). 그리고 부활로써 '예수에게 속한' (1고린 15, 23)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하느님 새 나라에 참여하게 되는 초석이 놓이게 되었다.
〔의 미〕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은 죄로부터의 해방이고, 이로써 영원한 죽음의 권세로부터, 즉 부활한 자의 청원으로 심판에서(1데살 1, 10 : 로마 8, 34) 그리고 예수의 영광스런 몸에 따른 창조적인 변화를 통해서(필립 3, 20) 구제되는 가능성이다. 부활한 자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이미 지금 자기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선사하였기 에, 이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며,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자신을 명칭한 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1고린 1, 2 등). 교회는 부활한 자와 하나가 되었기에 그분의 '몸' 이라 불릴 수 있고(1고린 12, 12-13. 27 ; 로마 12, 5), 동시 에 세례받은 자들은 십자가에 처형되고 부활한 주님의 몸, '주님의 만찬'(δειπνον κυριακον)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골로사이서와 에페소서의 관점에 따르면 부활한 자는 세상 완성 때까지 자기의 사업을 이끌어 갈, 자기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다(골로 1, 18. 24 : 에페 1, 20-23 : 4, 15 이하).
Ⅲ . 신학사적 고찰
부활은 18세기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관철되고 전제된 신앙의 신비였다.
〔고대 교회〕 부활은 처음부터 교회 신앙의 근본이 되었다. 특히 '주님의 날' (묵시 1, 10)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여덟 번째 날로서, 창조의 첫째 날로 기념되었다. 이날은 그리스도인들의 전(全) 삶을 각인(刻印)한다(Ign. Magn. 9, 2) . 미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제사이다(Hipp. trad. apost. 4). 고대 교회는 그노시스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부활보다는 육화의 신비를 강조하였고, 그노시스주의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영적인 그리스도가 육(肉)에서 해방되어 하늘 나라로 (순수 영적으로) 올라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일방적인 부활 그리스도론에 대항하여 고대 교회의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육화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장차 "육이 부활하리라는 것"도 부활보다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에 더 근거를 두었다(2Clem. 9 ; Athenag. res. 9). 그럼에도 육화 교리는 그 완성인 부활에 관련된 것이고, 고대 교회에서 부활 없이 그리스도교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교론자들은 부활을 생명의 여러 상징들(태양, 물고기, 불사조) 및 신화와 연관시키면서 인류가 동경하는 것이 실제로 그 안에 표현되고 채워진 것으로 보았다. 고대 교회 신학자들은 부활 자체보다는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육 신과 함께 부활한다는 것을 다루면서 그리스도가 그 시작을 마련하였다(1Clem. 24, 1 ; 27, 1)고 보았다. 예수 부 활은 불사불멸의 보편적 부활의 서막이다(Athan. incarn. 20; 1고린 15, 21 이하). 즉 들어올림을 받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전(全) 창조가 하느님의 생명 안에 들어가게 된다 (Greg. Nyss. or. catech. 32, 3 ; pascha 9, 249~253 ; trid. spat. 277~303). 부활한 그리스도는 큰 인류 몸체의 영혼이고 머리이며, 그 때문에 전 인류가 함께 완성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기쁨도 불완전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된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 우리는 전(全)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tio totius Christi, caput et membra)을 희망한다(Aug. tract. in Joh. 21, 8 ; civ. 22, 18).
〔중 세〕 스콜라 신학에서 부활에 대한 반성은 신인 일치(神人一致)와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에 대한 사변적 논 문 때문에 퇴조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구원론적인 의미보다는 존재론적인 성격에 주목했다. 12~13세 기의 예수 신심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육화와 수난에 집중된 좁은 시야를 깨고 예수의 삶의 신비를 자신의 저서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에 삽입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들어 높이 심은 이 신비에 속한다(《신학 대전》 Ⅲ, 53~59). 부활은 신앙과 사랑과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현재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부활은 예수 자신에게는 완성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함께 모든 이의 부활이 준비되었다. 이렇게 해서 부활은 이미 현재적으로 신앙의 내용과 상태를 위해 '견고한' 의미를 가진다(《신학 대전》 Ⅲ, 53, 2). 즉 부활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에 구성적인 것이다. 부활은 우리와의 연대에 근거하고 있는데,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부활을 야기시킨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하느님의 구원 사랑의 자발적인 도구로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의 부활을 우리의 부활의 저당(抵當, 모범적 원인)만이 아니라 동시에
도구적인 작인(作因)一말하면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가 말하는 지금의 영적인 부활과 미래의 육신의 부활이라는 우리의 이중적인 부활의 작인으로 보았다(《신학 대전》 Ⅲ, 56, 1-2).
〔근대와 그 이후〕 근대에 들어와 합리주의, 역사적 비판, 이성의 추구로 부활을 환상적인 위로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슐라이어마허(F.E. Schleiermacher, 1768~1834)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의 사실 및 심판 때 다시 올것이라는 예언은 예수의 인격에 대한 가르침의 고유한 요소로 내세울 수 없다"고 하였고,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 짐작하지 않고서도 그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우리에게도 이와 꼭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그리스도교 신앙》 Ⅱ, 1831, p. 282)라고 해명하였다. 신스콜라 신학이 부활에 관하여 소홀히 다룸으로써 이런 소홀함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관을 부식(腐植)시켰지만, 금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활은 다시 중심 테마 또는 기초 테마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공식(公式)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것이다. ···이 공식은 그 누구도 날조할 수 없는 것이다" (K. Barth, 《교회 교의학》 4-3, 1, p. 47). 오직 부활에 근거하여서만 예수는 자기의 시대로 끝나지않고, 시대를 벗어나 오늘날 직접 활동하시는 주님인 것 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주제인 부활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세계에 자신을 전달하시고 세말의 결정적인 때 에 세계를 받아들이신다.
Ⅳ . 신학적 고찰
〔일반적 고찰〕 '일으키다'와 '부활하다'는 모든 세속적 가능성을 초월하는 실재, 즉 죽은 이의 육체적 부활을
위하여 비유로 사용하는 일상의 단어로서 동의어이다(이사 26, 19 참조 : 하느님께서 죽은 이를 일으키시기에 죽은 자는 부활한다). 신약성서는 후기 구약성서가 희망한 부활이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주장한다. 부활은 죽은 자의 재생, 즉 경험적으로 타진할 수 있는 현 존재의 조건,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복귀(썩어 없어질 육신을 다시 취하는 것)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새롭고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의 시작(로마 6, 9 ; 사도 13, 34)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활은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신앙에 근거한다. 부활은 객관화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계시 내용을 온 세상에 증언하는 사람들의 신앙 진술이다. 신앙 밖에서는 부활에 관해 의미 심장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기초 신학적 고찰〕 부활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 오직 신앙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실재(신비)이다. 부활은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에 성서에서 부활의 과정을 직접 증언한 본문은 찾아볼 수 없다. 부활한 자는 객관적 인식의 조건 아래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사실은 제자들의 부활 신앙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수가 부활했다(또는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의 용감한 주장이다.
부활 신앙의 실제 형성 : 부활 신앙을 일으킨 것은 간접적으로 제자들의 태도에 나타난 실제적인 전환에서 읽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분명한 것은 부활 사건 이전에는 제자들의 신앙이 초보적이었다가(예수가 처형되자 모두들 도망가거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부활 사건 이후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의 부활 또는 들어 높임을 주장하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선교하며, 상이한 그리스도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은 신약성서 본문에 따르면 '계시 사건' 때문이었다. 바오로 이전의 초기 전승들에는 이 사건을 체험한 인물들이 열거되어 있는데(1고린 15, 4-9 ; 갈라 1, 18 이하 ; 2, 1. 9 이하) 고린토 전서 15장 4-9절에 따르면, 바오로 만이 아니라 게파와 열두 제자, 500명의 형제들과 야고보 등이 새 생명을 지닌 예수를 만났다고 한다. 여기서 '오프테' 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가리키는데, 하느님에 의해 예수가 나타나졌기에 또 나타났기에 그의 부활이 고백된다. 이는 구약의 신현현(神現顯) 형식을 빌려 부활 사건을 묘사한 것인데, 부활 체험이 본래 담고 있는 내용은 예수가 하느님의 권세에 의해 현현하였다는 것과 예수의 부활이 세말의 결정적인 시작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현존하는 예수 안에 하느님이 구원하시며 나타나시고, 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경험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제자들의 심리 변화나 반성에 의해 꾸며진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부활한 자의 진술과 대립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부활 체험은 죽음을 이긴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 의롭게 살다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대, 지상의 예수와 십자가 위에서 허무한 종말을 고한 그에 대한 체험, 제자들의 정신적 능력 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부활 체험에 속한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제자들의 변화는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부활한 자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부활한 자가 제자들의 경험 지평과 실존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부활 신앙의 지속적인 근거 : 예수의 복음은 예수 없이는 무의미하다. 이는 그가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예수라는 현존했던 인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실제로 살아 있는 자로 체험하였고, 예수는 자신을 역사적으로 부활한 자로 체험하게 하였다. 부활 신앙은 제자들의 이 체험에 근거하고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신앙은 과거에 있었던 제자들의 부활 체험의 증언에만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궁극적으로 예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들은 예수를 지금 살아 있는 자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부활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베드로 등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나타나지' 는 않는다. 대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보이지 않게 다가와 함께 걸으며 자신을 현재 체험하게 한다. 즉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마태 18, 20), 성서 말씀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만찬에서(루가 24, 30-32), 신앙에서(에페 3, 17 : 갈라 2, 20), 보잘것없는 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데서(마태 25, 31-45), 예수의 말씀을 행하는 데서(요한 8, 31 이하 ; 3, 21 : 마태 28, 20), 또 때로는 특별한 (신비의) 체험을 통해 체험하게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부활 체험 장소는 실천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연대성 안에서이다.
부활 증언의 신앙 가치 : 부활 증언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까닭은 여러 요인들을 수렴한 결과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요인들이란 첫째, 부활 증언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숙이에 있는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희망과 관계하며, 이 희망이 이미 지금 현재에 작용하면서 최종적으로 채워졌음을 말해 준다. 둘째, 예수의 부활에 대한 복음은 예수의 지상 활동의 계획과 창조 신앙과의 내면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만, 이를 벗어나 그 자체로도 고유한 내면적인 논리와 내용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셋째, 역사 연구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 신앙은 실제 일어난 일에 근거하고 있다. 비록 부활을 증명할 수 없다 해도 믿을 만한 것으로 증명된다. 넷째, 공동체가 들어 높임을 받은 주님의 살아 있는 현존을 체험한 것에는 여러 부활 증언들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다섯째, 신앙인들이 부활절 행사를 하는 것은 부활을 믿게 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징이다. 이 실천은 부활 복음이 신앙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가장 강력한 동인(動因)이다. 물론 부활 증 언이 신앙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증언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개인적인 결단에 달려 있다.
〔교의 신학적 고찰〕 신론적 고찰 : 부활은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구원자로 제시하는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행위로 이해된다. 죽은 이를 살리신다는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부활은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죽은 이를 살리시는 하느님의 행위인데, 부활은 이러한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 예수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살았으므로, 그의 죽음과 삶 가운데에 하느님의 자비가 현존하며 인간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예수는 죽으면서 자신과 자신의 일을 아버지 하느님께 넘겨 드렸고, 하느님은 예수가 죽음에 삼켜져 하느님과의 공동체에서 벗어나게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예수는 아버지가 일으키시는 행위에 자신을 맡기며 죽음으로써 무(無)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부활은 아버지 성부께서 성령을 통해 아들인 예수에게 하신 행위이다(갈라 1, 1 ; 로마 1, 4 : 8, 11 : 1베드 3, 18 : 에페 1, 19 이하 등).
예수를 살리시는 하느님은 예수와 함께 죽음에까지 이르신 하느님과 동일시되고, 이로써 죽은 자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실재로 정의된다. 예수가 하느님 자비의 실제적인 상징이기에 하느님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실제로 이 세상 안에서 죽으신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방해받지 않고 인간들을 위해 현존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예수가 하느님의 자비와 가까움의 실제적인 상징이었다면, 그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멀리한 세계에서나 이 세계를 위해서도 현존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느님의 가장 고유한 일一예수 안에서 완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Immanuel)一이 드라마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과거 한 시점의 존재에 넘기셨다면, 이는 하느님이 우리와 완전히 같이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자기 자신을 과거의 존재로 만들고, 인간을 향한 자기의 길을 스스로 다시 무효화함을 의미하게 된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자기로부터 소원(疎遠)하게 된 세계에 보이신 구원의 관심을 거두어들일 수 없다는 자기 약속에 대한 결정적인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론적 고찰 : 부활 체험은 하느님께서 살리신 예수의 현존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내용으로 한다. 이 체험으로부터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들어올림을 받았다', 즉 '구제되었다'는 결론이 나오고, 또 '예수가 하느님에 의해 보장되었다', 즉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정말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신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2고린 5, 19). 부활에는 다음과 같은 관점이 전개된다(로마 8, 34 이하 : 에페 1, 20-23 : 1베드 3, 18-22 : 사도10, 38-43 ; 사도 신경에 종합).
① 예수의 구제와 보장 : 하느님은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예수의 복음과 삶의 실천)만을 일깨우신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최종적으로 죽음으로부터 구제하시어 '완전하게' 하셨다(히브 5, 9). 부활을 이런 식으로 인격적으로 해석할 때 신약성서의 증언과 일치한다. 구원자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수의 죽음과 삶으로 '돌아오시면서' , 예수의 죽음과 삶의 구원의 의미를 강화하셨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으로 행하셨으며, 예수는 종전의 모든 것을 능가하고, 다가올 그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자(使者)이며 구원자이고, 하느님의 메시아 · 아들 · 말씀이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고, 고통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냈다.
② 들어 높임으로서의 부활 : 예수가 하느님과 하나되고, (자기가 아니라) 남을 위하여 사셨다면, 그의 부활도 그가 (개인적인 보답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로 일으켜 세워졌음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예수는 하느님과 최종적으로 일치하셨다(은유, 들어 높임, 하느님의 아들로 대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음). 이는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완전히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관계를 그리스도론적으로 반성하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 예수 안에 사람이 되신 선재(先在)하는 (본질이 동등한)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개념 안에서 이해된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영원한 아들은 이미 창조와 육화 이전에 이 영광을 지니고 계신다(요한 17, 5). 여기서 자기 자신의 신적인 힘에 의한 자기 부활, 즉 육화한 하느님 아들의 스스로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요한 2. 19 ; 10, 18 ; Ign. Smyrn. 2 : DH 539). 둘째,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낮춘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협력자이며 구원의 중재자이다. 즉 하느님의 오른편에 오르신 우리의 구원자(사도 5, 31 : 1데살 1, 10 ; 로마 5, 9 이하 : 디도 2. 13 이하),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시는 분(로마 8, 34 ; 히브 7, 25 : 9, 24 ; 1요한 2, 1), 구원의 원천(히브 5, 9 사도 4, 12), 중재자(1디 모 2, 5 이하), 우리에게 자리를 마련하시는 분(요한 14, 2 이하)이다. 그는 모든 이에 대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제공하였고 또 그런 자로 남아 있다. 들어 높인 자의 이러한 구원론적인 활동은 성령론적으로 전개된다.
성령론적 고찰 : 감각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예수의 공동체는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중단되었다(사도 1, 9 ; 요한 14, 3 이하 ; 16, 5-7 ; 필립 1, 23). 그런데도 신약성서는 그분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주장한다. 하느님께로 들어 높임을 받은 십자가에 처형된 자는 저승에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으로(1고린 15, 44-46 : 필립 3, 20 이하) 세상과 새롭고 내면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는 하느님 곁에 그리고 하느님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주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모든 실재의 한복판에" (Nikolaus v. Kues, De docta ignorantia 3, 8) 계시며, 그곳에서부터一자기의 영(πνεῦμα)을 통해一살아 있는 현재와 미래가 되신다(사도 2, 32 ; 2고린 3, 17 이하 ; 요한 14, 16-26). ① 부활한 자의 현재는 아직은 감추어지고 임시적인 현재이며 (실현되는) 표징을 통해 보증된다. 즉 말씀과 성사(루가 24, 30-32 : 복음에서 예수 자신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시고, 식사에서 자신을 주신다)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형제애의 공동체(마태 18, 20), 자신의 몸(1고린 12, 12-13. 17), 자신의 편지(2고린 3, 3),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위한 자신의 '징표와 도구 (교회 19항, 48항)를 통해서, 그리고 세상의 보잘것없는 이들을 통해서(마태 25, 31-45 : 마르 9, 37) 드러내신다. ② 부활을 통하여 죽음이 승리 안에 삼켜졌고(1고린 15, 54-57 ; 요한 16, 33), 이제 더 이상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그럼에도 죽음의 세력은 늘 새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나, 그리스도는 늘 죽음과 죽음의 협력자들을 쳐부순다(1고린 15, 24-27 ; 8, 5 이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도 이 싸움을 한다. 그럼으로써 전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일한 "부활, 즉 죄에서 은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의(不義)에서 정의로 건너가는 것이며(G.Gutiemez),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인도된다. ③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세상이 알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지(1고린 15, 28) 않는한, 부활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부활한 자는 자기의 모든 형제들을 '기다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메시아로서 내림하실 것을 기다린다(1데살 3, 13 ; 1고린 15, 23; 16, 22 : 마태 24, 3. 27 : 1요한 2, 28 : 2베드 3, 4 ; 신경). 그리스도인들은 미래가 그에게 속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삶과 새 생명 안에 자리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그들이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고, 비통에 쌓인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한다. 부활과 함께 세상은 이미 그 만물 안에서 하느님께 도달하였으며(1고린 15, 20 ; 골로 1, 18 : 사도 26, 23 : 묵시 1, 5), 그분에게서 우리가 기다려도 좋은 미래가 시작되었다.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저당(抵當)이고 근원이다. 그분은 "생명의 주관자"(사도 3, 15),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로마 8, 29), "모든 조물의 맏이"(골로 1, 15 ; 로마 8, 19-24 : 묵시 21, 1-6)이시다. 부활은 그분이 육화하시면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완성의 시작이다(Jon Scotus Eriugena, De div. nat. 5, 24). 이시작 안에 인류와 전 우주의 최종적인 운명이 가장 심오하게 결정되었고, 이미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전 창조를 위한 희망의 보증인이다.
Ⅴ . 몸의 부활, 인간의 부활
그리스도교는 예수 한 사람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예수는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 (1고린 15, 20)이며, 그의 부활은 죽은 모든 이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인간의 부활을 '육의 부활' 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영(靈)만의 부활을 주장하는 그노시스주의에 대항한 표현으로서, 몸과 마음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그리스도교 인간론에 근거하고 있는 전인(全人)의 부활로 알아 들어야 한다. 이 인간론에 따르면 몸과 마음은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개의 물체가 아니다. 마음도 몸도 '전인' 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영혼만의 인간이나 육만의 인간은 있을 수 없으며, 영혼만의 부활(구원)이나 영혼만을 위한 천국이란 있을 수 없다. 하느님 나라에는 인간의 영만이 아니라, 영과 육의 통일체로서 인간 전체가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바라시며 명하신 십자가는 단순히 영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영과 육의 통일체로서의 전 인간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다.
영육을 분리시키며 영의 부활을 주장하는 사고가 나타난 것은 그리스의 그노시스주의와 만나면서부터이다. 바오로와 요한이 성서를 쓰게 된 동기도 부분적으로는 그노시스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공동체에 이단이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육의 부활을 부정하고 영혼만이 승천한다고 해석하면서 육체를 경멸하였고, 구원을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실존에서의 해방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에 대항하여 육체가 구원의 장소임을 강조하였다. 바오로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 자신이 육체적 헌신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의 육체가 그리스도에게 속할 때 우리는 완전하게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노시스주의에 대한 이런 방어적 대결은 여러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 Antiochenus, 35?~107)는 부활한 그리스도에게서 영과 육의 일치를 강조했고, 유스티노(Justinus, +165)는 육에 대한 이중적 · 그노시스주의적 평가 절하에 대항하여 하느님이 육을 창조하였으며, 영혼은 육 없이 즉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육이 부활할 때 비로소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강조하였다. 유스티노는 죽은 자의 부활' 또는 '몸의 부활' 대신에 '육의 부활'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 150/160~220/240)는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그노시스주의에 대항하여 인간의 단일성뿐만 아니라, 영혼의 단일성과 전인류의 단일성을 변호하였다. 테르툴리아노에게 있어서 육체성은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와 사회적 현실을 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육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며, 인간 구원의 현실을 진지하게 보장하는 곳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였다. 육은 영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영은 육에 아주 강하게 종속되어 있어 육이 없다면, 영은 마치 몸에서 잘려 나간 손 같은 것이된다(《신학 대전》 Iq 75a, 2).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육은 영의 감옥이거나 영을 구속하고 방해하는 도구가 아니다. 영과 육의 단일체로서 영혼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며, 육체는 선(善)의 원천〔泉〕이지 타락의 결과가 아니다(《신학 대전》 Iq 89a Ic). 영혼과 육체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가 영의 불사불멸을 이야기하는 것은 육에 대하여 영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영과 육을 이러한 전인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의 구원은 전인적으로 이해된다. 영혼만의 구원이란 있을 수 없고, 영혼만을 위한 천국이란 있을 수 없다.
육의 부활은 인간의 실존을 강조한 표현이다. 부활은 육을 가지고 사는 인간이 이 지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지상에서 자기의 부활 존재를 체험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육을 받아들인 것은 죽고 말 인간의 육신 안에서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육의 부활은 옛 세계의 한복판에 새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2고린 5, 17 ; 갈라 6, 15).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살리신 하느님을 향한 회개는 십자가에 달려 육이 되신 예수께 마음을 돌리는 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느님께서 소생시킨 예수의 몸은 십자가에 못박힌 바로 그 몸인 것이다. 예수는 육 안에서 자기의 구속 행위를 완수하였고, 마음만이 아니라 자기의 온몸을 헌신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고자하신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실현하였다. 바오로는 이를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되었다"고 표현하였다. 그리스도교적 구원은 육적(肉的) 구원이다. 이 구원은 우리의 삶 '저 위'나 '저 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 삶 안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부활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한 구원의 소식이기 때문이다. (⇦ 육신의 부활 ; → 종말론)
※ 참고문헌 J. Kremer · H. Kessler, Auferstehung Christi, 《LThK》 1, pp. 1177~1191/ H. Kessler, Auferstehung, 《NHThG》 1, pp. 78~95/ W. Marxsen, Die Auferstehung Jesu als historisches und theologisches Problem, Göttingen, 1965, Aufl. 3/ X. Léon-Dufour, Résurrection de Jésus et message pascal, Paris, 1971/ A. Vögtle · R. Pesch, Wie kam es Zu Osterglauben? Düsseldorf, 1975/ J. Kremer, Die Osterevangelien-Geschichten um Geschichte, Stuttgart, 1981, Aufl. 21 K. Rahner, Dogma-tische Fragen Zur Osterfrömmigkeit, 《ST》 4, pp. 157~172/ G. Stemberger · J. Kremer · G. Greshake, Auferstehung der Toten, 《LThK》 1, pp. 1191~1206/ J. Ratzinger, Eschatolgie-Tod und ewiges Leben, Regnsburg, 1977, 1990, Aufl. 6/ G. Greshake · G. Lohfink, Naherwartung Auferstehung-Unsterblichkeit, Freiburg-Basel-Wien, 1975, 1982, Aufl. 5/ F.P. Fiorenza · J.B. Metz, Der Mensch als Einheit von Leib und Seele, 《MySal》 2, pp. 584~636. 〔李濟民〕
부활
復活
〔그〕ἀνάστασις · 〔라〕resurrectio · 〔영〕resurr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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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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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부활 신앙과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기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