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대교구

北京大敎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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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옛 시가 모습(왼쪽)과 북경대교구장을 역임하였던 물리 주교(위)와 파비에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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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옛 시가 모습(왼쪽)과 북경대교구장을 역임하였던 물리 주교(위)와 파비에 주교.

중국의 북경시와 그 인근 지역을 관할하는 수도 대교구. 북경 관구(北京管區)에는 북경대교구를 비롯하여 하북성(河北省)의 북쪽 지역을 제외한 여러 교구와 지목구들이 포함된다. 본래 북경에는 원(元)나라 때인 1307년에 대교구가 설정되었다가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된 후 청(淸)나라 때인 1690년에 다시 교구로 설정되었으며, 1696년 이래 여러 교구로 분리되었다. 그 후에도 북경교구는 1856년에 3개의 대목구로 다시 분리되었는데, 그중에서 북직예(北直隸) 대목구가 1924년에 북경교구로 개칭되었다가 중국 교회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던 1946년에 북경대교구로 승격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는 이미 교회 창설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1831년 9월 9일 조선(朝鮮)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제도적으로는 단절되었으나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지속되었다.
〔교 세〕 1949년 공산화되기 직전의 교세는 다음과 같다. 성당 202개, 사제 139명(교구 소속 80, 수도회 소속59), 수도회 20개(남자 12, 여자 8), 수도자 700명(수사 400, 수녀 300), 신학생 19명, 학교 118개(남학교 57, 여학교 61), 학생수 10,631명(남학생 5,627, 여학생 5,004), 인구 500만 명에 총 신자수 215,918명. 〔청대의 교구장〕 키에사(Bernardinus della Chiesa, 伊大仁) 주교(1690~1721), 프란치스코(Francisco de la Purification) 주교(1725~1731), 수자(Polycape de Souza, 索智能) 주교(1740~1757), 남경교구장 라임베코벤(G.X. de Laimbeckhoven, 南懷仁) 주교 겸임(1757~1778), 살루티(J.D. Salutti, 安德義) 주교 (1778~1781),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 주교(1782~1808) , 수자 사라이바(J. de Souza-Saraiva) 주교(1808~1818), 리베이로 누네스(J. Ribeiro-Nunes, 李拱震) 신부 총대리(1818~1826),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G.Pires-Pereira, 畢學源) 주교 겸임(1826~1838), 카스트로 무라(J. Franca-Castro e Moura, 趙) 신부 대리(1838~1846) 몽고교구장 물리(J.Martial Mouly, 孟振生) 주교 겸임(1846~1856) 및 대목구장(1856~1868), 귀에리(Guiery, 蘇發王) 주교(1868~1870), , 들라플라스(L. Gabriel Delaplace, 田類斯) 주교(1870~1884), 타글리아부(Frangois Tagliabue, 戴濟世) 주교(1884~180) 사르투(J.B. Hippolyte Sarthou, 都士良) 주교(1890~189) 파비에(P.M. Alphonse Favier, 樊國樑) 주교(1899~1905), , 자르랭(S. Frangois Jarlin, 林懋德) 주교(1905~1933) , 몽테뉴(Paul Montaigne, 滿德貽) 주교(1933~ 1946), 전경신(田耕莘, 토마스) 추기경(1946~1949).
〔원대의 교구〕 북경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원나라 때인 13세기 중엽이었다. 그에 앞서 당나라가 멸망한 후 쇠퇴하였던 경교(景敎)는 11세기 이래로 다시 몽고(蒙古)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갔으며, 1264년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캄발레크(Kambalek)로 불리던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경교 신자들이 북경으로 진출 하여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천주교회에서는 1245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피아노 디 카르피네(G. Piano di Car-pine) 신부를 처음으로 몽고에 파견하였고, 이어 1254년에는 같은 회의 루브룩(Guillaume de Rubruck) 신부와 크레모나(Bartolomeo da Cremona) 신부가 몽고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 1271년에는 마르코 폴로가 북경에 도착하여 세조를 알현하고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친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사제가 북경(즉 上都)에 들어간 것은 천도 후 30년 만인 1294년으로, 이때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친서를 휴대한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몬테 코르비노(Giovanni de Monte Corvino, 孟高味諾) 신부가 세조를 알현하였다.
코르비노 신부는 1297년 성종 때부터 북경에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였으나, 경교 신자들의 반대와 음모에 부딪혀 투옥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교신자였다가 천주교로 개종한 충헌왕(忠獻王)의 도움으로 1298년에는 북경 최초의 성당을 완공하고 그 이름을 '로마 공교 성당'(羅馬公敎聖堂)이라고 명명하였다. 이후 코르비노 신부는 계속 성당을 건립하면서 전교에 힘썼고, 이러한 북경 교회의 실상을 알게 된 교황 글레멘스 5세는 1307년 7월 21일에 북경대교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코르비노 신부를 북경 대주교 겸 동양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또 7명의 주교를 선발하여 중국으로 파견하였는데, 그중에서 3명만이 북경에 들어가 1313년에 코르비노 대주교의 성성식을 거행하였다. 바로 이해에 코르비노 대주교는 천주(泉州)에 교구를 설정하고 제라르도 알부이니(Gerardo Albuini)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중국 전교에 힘쓰던 코르비노 대주교는 1328년 북경에서 사망하였고, 1333년에야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요한 22세는 니콜라스(Nicolas) 주교를 북경의 제2대 대주교로 임명하여 파견하였으나 길이 막혀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한편 천주교구의 제3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루지아(Andrea da Perugia) 주교는 1336년에 순제(順帝)의 명을 받고 원나라 사절단과 함께 교황 베네딕도 12세를 알현하였으며, 교황은 그 답례로 2년 후에 마리뇰리(Joannes de Marignolli) 신부를 대표로 하는 교황사절단을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이후 마리놀리 신부는 1345년에 귀국하였는데, 그 무렵부터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유럽과의 교통로가 끊어지게 되었고, 프란치스코회 에서 파견한 주교들도 도중에 피살되거나 사망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명(明)나라가 흥기하면서 천주교를 탄 압한 결과 북경대교구는 많은 손실을 입은 채 14세기 말에 이르러 폐지되고 말았다.
〔북경교구의 부활〕 북경 교회는 명말에 이르러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전교를 재개하면서 다시 설립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신부는 마카오에 도착한 지 8년여 만인 1601년 1월 24일에 북경으로 진출하여 새로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605년 8월에 땅을 하사받았다. 이후 1650년 살 폰벨(J.A. Schall von Bell, 湯若望) 신부가 그 터에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대성당 즉 남당(南堂)을 건립하였다. 예수
회 선교사들은 1616년의 남경박해(南京迫害)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이를 극복하고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중국 각처로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한편 1632년에 스페인의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입국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스페인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입국함으로써 예수회의 단독 선교는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진출은 선교 단체 사이에서 전교 방침이나 보호권(保護權, padroado) 문제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는 마침내 의례 논쟁(儀禮論爭, Rites Controversy)으로 비화되었다. 더욱이 1680년에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 1684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전교권을 인정받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그리고 1687년에는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1576년에 마카오를 보호 교구(保護敎區)로 설정한 데 이어 1690년 4월 10일에는 북경교구와 남경교구를 보호 교구로 설정하였다. 이로써 14세기 말에 폐지된 북경대교구가 300여 년 만에 북경교구로 부활되었다. 당시 북경에는 남당을 비롯하여 1655년에 건립한 동당(東堂),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1703년에 건립한 북당(北堂) 등 세 개의 천주당이 있었다.
초대 북경교구장으로는 절강(浙江)의 대목(代牧)으로 있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키에사 주교가 1690년에임명되어 1701년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당시 북경교구 관할 지역은 하북성을 비롯하여 산서성, 섬서성, 산동성, 만주, 몽고 등지였다. 북경교구장은 그 후 1725년에 이탈리아 아우구스티노회의 프란치스코 주교에 이어 1740년에 포르투갈 예수회의 수자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1757년 이후 교구장이 공석이 되면서 1778년까지 예수회의 남경교구장 라임베코벤 주교가 북경교구장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의례 논쟁의 종결을 위해 1715년 3월 19일에 교황 글레멘스 11세가 칙서 <엑스 일라 디에> (Ex illa die)를 반포하여 중국 의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면서 청의 강희제(康熙帝)가 선교사 추방령과 선교 금지령을 잇달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1705년에 신자수 30만 명에 이르던 중국 교회의 교세는 크게 감소하였다. 한편 1699년 포교성성(지금의 인류 복음화성)에 의해 중국에 파견된 라자로회(Lazaristae)에서는 옹정제(雍正帝)의 허락을 얻어 1723년에 서당(西堂)을 건립할 수 있었는데, 이미 그전해에 옹정제가 금교령을 반포함으로써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교구의 분할과 변모〕 교구로 설정된 후 북경교구는 1696년에 산서(山西) 대목구와 섬서(陝西) 대목구가 분리된 이래 1831년에 조선 대목구, 1838년에 요동(遼東) 대목구(1840년에 만주 대목구로 개칭), 1839년에 산동교구(山東敎區)를 분리하는 등 1940년대까지 70개에 이르는 교구와 지목구를 분할하였다. 뿐만 아니라 1856년에는 북경교구가 3개의 대목구로 분리되었으며, 그중에서 전교 중심지를 북경으로 삼고 있던 북직예 대목구는 1924년에 북경 대목구로 개칭되었다. 1856년 당시 북경의 신자수는 약 17,000명이었다. 그리고 1946년 4월 11일의 교령에 의해 중국 교회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전국이 20개의 대교구 관구와 79개의 교구로 개편되었으며, 동시에 북경 대목구는 북경 관구를 관할하는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옹정제 이후 건륭제(乾隆帝, 1736~1795), 가경제(嘉慶帝, 1796~1820), 도광제(道光帝, 1821~1850)로 이어지는 박해 기간 동안 북경교구장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우선 1778년에 이탈리아 아우구스티노회의 살루티 주교가 임명되었다가 1782년 12월 15일에는 다시 포르투갈 출신의 재속 사제로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인 구베아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 2월 12일에 인도의 고아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1785년 1월 18일 북경에 부임하여 남당에 거처하였다.
한편 1773년 7월 21일 예수회가 해산되면서 북경교구는 큰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까지 남당과 동당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북당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그리고 서당은 포교성성에서 파견한 선교사가 관할하고 있었는데, 예수회 해산과 함께 교황청에서는 1783년 12월 7일부터 이전에 예수회가 담당해 오던 전교 사업을 라자로회에서 인수받도록 하였으며, 프랑스 국왕이 그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 프랑스 국왕과 포교성성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라자로회의 로(N.J. Raux, 羅廣祥, 혹은 羅旋閣) 신부와 길랭(Ghislain, 吉德明) 신부, 파리(Paris, 巴茂正) 수사가 1785년 4월 북경에 도착하여 5월부터 북당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북당에는 궁정에서 수학자로 활동하던 그랑몽(J.J. de Grammont, 梁棟材) 신부, 방타봉(Ventavon)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예수회 회원들과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회원으로 궁정 화가였던 판지(J. Panzi, 潘廷璋)수사 등이 남아 있었다. 로 신부는 북당의 프랑스 선교단장으로서 흠천감(欽天監) 부감(副監) 일을 맡기도 하였는데, 1801년 11월에 로 신부가 사망한 뒤에는 길랭 신부가 선교 단장을 맡아 1812년까지 중국인 성직자 양성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가경제 초기에는 남당과 동당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흠천감의 실권을 장악한 데 이어 직예(直隸)와 산동성의 포교권을 장악하려고 하면서 서당의 이탈리아 선교사들이나 북당의 프랑스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1805년에 정점에 달하였다. 바로 이해에 다시 한번 박해가 재연되었다.
구베아 주교는 1808년 7월 6일 사망하기까지 건륭제의 신임을 얻어 흠천감 감정(監正)과 국자감(國子監)의 산학관장(算學館長)을 역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북경신학교를 설립하여 중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그의 사망에 앞서 1804년 12월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라자로회 수자 사라이바 신부가 계승권을 가진 북경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마카오에 있었는데, 구베아 주교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1805년에 재개된 박해 때문에 북경에 부임하지 못하고 1818년 1월 6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1811년에도 다시 박해가 일어났는데, 이때 서당 선교사들이 먼저 마카오로 추방되었고 성당은 몰수되었다. 동당 선교사들은 1813년부터 감시를 받게 된데다가 화재로 인해 성당을 제외한 건물이 전소되었으며, 결국 가경제의 성당 압류와 파괴로 선교사들이 모두 남당으로 이전해야만 하였다. 한편 북당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프랑스 라자로회 라미오(Lamiot, 南彌德) 신부가 1819년에 마카오로 추방되면서 포르투갈 라자로회 세라(Sera, 高守謙) 신부가 대신 북당을 관리하게 되었다.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사망한 뒤 북경교구는 남당에 있던 포르투갈 라자로회의 리베이로 누네스 신부가 총대리의 자격으로 교구를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리베이로 누네스 신부가 1826년에 사망하면서 남경교구장인 포르투갈 라자로회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가 1838년까지 북경교구를 아울러 관할하였다.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1806년에 이미 남경교구장에 임명되었으나 박해 때문에 그대로 북경의 남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결국 북당은 1826년에 세라 신부가 마카오로 떠나면서 일시 폐쇄되었고, 남당은 1838년 이후 한때 러시아 정교회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중국 교회의 박해는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고 문호가 개방되면서 완화되기 시작하였고, 1844년의 황포조약(黃埔條約)으로 신앙의 자유가 획득되면서 북당이 재건되었다.
이 무렵 북경교구의 선교는 라자로회의 카스트로 무라신부 등이 담당하였는데, 특히 그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보호권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 북경교구는 1840년 초대 몽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라자로회의 물리 주교가 1846년부터 관리를 맡게 되었고, 1856년에는 그가 북직예 대목구(즉 북경 대목구)의 대목을 맡아 1868년까지 활동하였다. 당시 북경 대목구의 신자수는 24,000여 명이었다.
물리 주교가 사망한 후 북경의 대목으로는 귀에리 주교 등 모두 7명의 라자로회 주교가 1946년까지 계속 임명되었다. 한편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북당을 제외한 남당 · 동당 · 서당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는데, 남당과 동당은 그 후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가 다시 파괴되었다. 이어 중국 사회는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이듬해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성립되었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과 분열이 계속되었다. 그 동안 미국의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는 1925년 북경에 도착하여 그 해 10월 1일 보인(輔仁) 가톨릭대학(처음 명칭은 보인 아카데미)을 설립하였으며, 1930년대까지 프란치스코회, 마리아회, 라자로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등에서 중등학교 3개와 연구소, 병원 3개소, 양로원 · 기숙사 · 인쇄소 등을 설립하였다. 1933년 북경시의 신자수는 12,500명이었고, 이듬해 북경 대목구 전체의 신자수는 26만 3,494명이었다. 그 후 1946년에 북경 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되면서 1년 전에 동양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된 신언회(神言會)의 전경신 추기경이 1946년 5월 10일자로 초대 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933년에 신언회에 입회한 전경신 추기경은 1939년에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1942년 이래 청도(靑島)의 대목을 맡아 왔었다.
〔공산화 이후〕 중국의 공산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다시 국 · 공(國共) 분열이 이루어진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1949년 10월 1일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에 승리하고 북경에 공산당 정부를 수립하면서 완전히 공산화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북경대교구뿐만 아니라 중국 교회 전체가 새로운 변화를 겪어야만 하였다. 이후 9년 동안 공산당은 애국 대중 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자양(自養) · 자전(自傳) · 자치(自治)라는 3자 운동(三自運動)을 전개하였으며, 이를 통해 중국 교회를 교황청과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이에 동조하지 않는 북경의 외국 선교사들이 추방되기 시작하였고, 교회 학교와 시설들이 폐쇄되었으며, 1951년 6월 28일에는 교황 대사 리베리(Riberi)가 체포, 추방되었다. 아울러 북당도 폐쇄되어 오랫동안 학교와 창고로 이용되었다. 1950년에만 해도 중국을 떠난 선교사수는 2,274명에 달하였다.
공산당의 3자 운동은 교황청이나 서양 제국과의 관계 단절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지지하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1955년에 이르러 애국회(愛國會) 결성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적어도 100명의 중국인 사제, 50명의 신학생, 30명의 수도자, 약 4,000명의 신자가 수감되어 있었으며, 남아 있는 외국인은 27명(사제 16, 수녀 11)에 불과하였다. 이어 1957년에 결성된 '중국 가톨릭 애국 협회'(일명 애국 교회)는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이듬해부터는 독자적으로 주교를 임명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0년 뒤에 시작된 문화 혁명(1966~1976)으로 중국 천주교회는 다시 한번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모든 교회는 폐쇄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성직자들은 추방되거나 살해되었다. 그 결과 전국의 교회가 지하로 숨어 들게 되면서 종교 활동 또한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택동 생존시인 1971년에 와서 다시 문을 열 수 있던 곳은 남당뿐이었는데, 이곳에서의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던 사람은 외교관이나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다가 1976년에 모택동이 사망하면서 불게 된 중국의 개방 정책으로 부분적인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기 시작하였다. 신학교가 개교하였고, 1978년부터는 20~30년씩 옥고를 치른 사제들이 석방되었으며, 애국 교회는 다시 활성화되어 갔다. 이어 1979년 7월 25일에는 애국 교회의 부철산(傅鐵山) 신부가 북경의 주교로 선임되어 오랫동안의 공석을 메우게 되었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 북경교구는 1780년대 초부터 1830년대까지 약 50년 간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의 조선 전래를 매개로 하여 간접적인 교류가 있어 왔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을 전후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1783년 말에는 한국 최초의 신자가 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북당을 방문하고 그랑몽 신부를 만났으며, 이듬해 초에는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 해 말에 한국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아울러 이승훈은 밀사를 선발하여 그랑몽 신부에게 보냈는데, 그는 1785년 4월(음)에 귀국하다가 체포되어 교회 서적과 편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된 북경교구와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는 1785년 초에 신임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북경에 도착하면서 더욱 밀접해지게 되었다. 1789년 말에 한국 교회에서는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으로 보냈으며, 그는 북당의 선교 단장 로 신부와 남당의 구베아 주교를 만난 뒤 이듬해 2월 9일에는 판지 수사를 대부로 하여 로 신부로부터 조건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받아 귀국하였다. 1790년에 예비 신자였던 오(吳) 요한을 데리고 다시 한번 북경으로 간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 이승훈과 유항검(柳恒險, 아우구스티노)의 편지를 전하면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때 구베아 주교는 성직자 파견을 약속함과 동시에 동양 의례에 대한 금지령 즉 조상 제사 금지령을 명하는 편지를 조선 신자들에게 보냈다. 구베아 주교는 약속대로 1791년 2월에 마카오 교구 소속이던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吳) 신부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파견하였으나, 그는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한편 구베아 주교는 1790년에 포교성성 장관 안토넬리(Antonelli)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 포교지를 담당할 책임자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으며, 교황 비오 6세는 이러한 의견을 수렴하여 1792년 4월 1일자 서한을 통해 조선 포교지를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개인적인 보호와 지도에 맡긴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그는 1808년까지 북경교구장인 동시에 조선 포교지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793년에 조선 교회에서는 지황(池璜, 사바)과 백(白) 요한을 선발하여 다시 북경으로 보내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고, 구베아 주교는 첫 번째 북경교구 신학교 출신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선발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12월 3일(양 12월 24일) 조선에 입국한 이래 1801년 4월 19일(양 5월31일) 체포되어 순교할 때까지 조선 교회를 돌보는 한편, 계속 북경교구와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1796년 겨울에는 황심(黃沁, 토마스)을, 1800년 겨울에는 옥천희(玉千禧, 요한)를 북경으로 보냈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후 조선 교회와 북경교구와의 연락은 1811년에 가서야 재개되었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사람은 이여진(요한)이었는데, 그는 조선 신자들이 연명으로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쓴 편지를 마카오에 머무르고 있던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달하였다. 이어 조선 교회에서는 1813년에 이여진을 북경으로 보내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고, 1816년에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수자 사라이바주교는 이러한 조선 신자들의 편지를 받아 보고는 남경출신으로 조선 교회의 총대리로 임명된 밤(Vam) 요한신부와 신(Xin Vellozo) 플로리아노 신부를 파견하였으나, 그들 모두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하였다. 정하상은 그후 여러 차례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24년에는 역관 출신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을, 1826년에는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동료 밀사로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북경에 있던 총대리리베이로 누네스 신부는 이러한 조선 교우들의 요청에 따라 다시 한번 성직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1826년에 조선 신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조선 교우들이 1824년에 교황에게 올린 두 번째 편지는 마카오를 거쳐 1827년에 로마 포교성성에 전달 되었다. 이 편지를 받아 본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Cap-pellari) 추기경은 그 내용에 감동되어 조선 포교지를 담당할 전교회를 물색하던 중, 1831년 2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교황은 같은 해 9월 9일자로 조선 대목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태국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브뤼기에르(Bruguière, 蘇) 주교를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북경주교에게 맡겨졌던 조선 포교지는 그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으며,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제도적인 관계도 끝나게 되었다. (→ 구베아 ; 애국 교회 ; 서울대교구 ; 중국)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A. Thomas, Histoire de la Mission de Pékin, Paris, 1923/ 上智大學 편, <カトリック大辭典》 II · Ⅳ, 東京 : 富山房, 1954/ Louis Wei Tsing-sing, La politique missionnaire de la France en Chine(1842~1856), Paris, 1957/ 羅光主 편, 《天主教在華傳教史集》, 光啓出版社, 1967/ 劉俊與 · 王玉川 譯, 《利瑪竇中國傳教史》, 臺灣 : 光啓 · 輔仁大學出版社, 1986/ 榎一雄 編, 《西歐文明と東アジア》, 東京 : 平凡社, 1971/ 平川祐弘, 《マツテオ · リツチ傳》, 東京 : 平凡社, 1981/ 徐良子, 《15世紀 以前에 東方에 온 전교사》, 계성출판사, 1986/ Roman Malek, 정한교 역, 《중국 천주교회 - 안팎에서 본 어제와 오늘》, 분도출판사, 1989/ 崔奭祐, <李承薰 관계 書翰 자료>, 《敎會史研究》 8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