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교구 소속 본당. 전남 목포시 북교동 46 소재. 1958년 9월 3일 산정동(山亭洞) 본당으로부터 분리·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비오 10세. 관할 구역은 북교동, 남교동, 달성동, 죽동, 죽교3동, 자은면 전 지역과 양동, 죽교2동, 호남동 일부 지역. 관할 공소는 신안군 자은면의 대율, 구영, 고장 등 3개소. 〔교 세〕 1958년 2,062명, 1967년 3,400명, 1978년 3,842명, 1987년 4,534명, 1990년 4,804명, 1992년 4,909명, 1995년 4,360명. 〔역대 신부〕 초대 사바즈(J.G. Savage, 원) 사도요한(1958. 9~1960. 1), 2대 라펠티(G. Rafferty, 지) 제랄드(1960. 1~6), 3대 마과엘(D. Maguire, 매) 데스몬드(1960.6~1961. 11), 4대 브라질(S. Brazil, 진) 요한(1961. 11~1962.11), 5대 브란던(P. Brandon, 부) 파트리치오(1962. 11~1965. 4), 6대 라반(L. Lavan, 심) 라우렌시오(1965. 4~8), 7대 로한(P. Lohan, 한) 파트리치오(1965. 9~1969. 4), 8대 벨진(J. Bergin, 박) 요한(1969. 4~11), 9대 물라니(F.Mullany, 탁) 프란치스코(1969. 11~1971. 10), 10대 장지권(張志權) 요한(1971. 10~1976. 11), 11대 서상채(徐相彩) 유스티노(1976. 11~1981.9), 12대 최형락(崔炯洛) 바오로(1981. 9~1985. 6), 13대 장홍빈(張烘彬) 알로이시오(1985. 6~1989. 4), 14대 안호석(安虎錫) 안드레아(1989. 4~1993. 2), 15대 정형달(鄭亨達) 바오로(1993. 2~1996. 8), 16대 박재완(朴宰完) 아우구스티노(1996. 8~1997. 2) , 17대 이준형(李濬炯) 모세(1997.2~현재).
〔본당 설립과 초기 상황〕 1897년에 처음으로 목포(현 산정동) 본당이 설립된 이래 초대 주임 데예(A. Deshay, 曺有道) 신부의 노력으로 목포와 인근 도서 지역 곳곳에 공소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그중 1900년에 설립된 자은도(慈恩島, 현 대율) 공소의 신자수는 58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뿌리를 내리게 된 천주교 신앙은 1900년대 초에 일어난 '지도교안'(智島敎案)으로 일시 위축되기도 하였지만, 목포 본당의 교세는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증가하여 광복 이후에는 신자수가 2,000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해안과 도서 지역의 공소들이 본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사목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광주 지목구를 맡고 있던 골롬반 외방선교회에서는 한국 전쟁 중인 1952년에 경동(京洞) 본당을 분리 · 설립하였다. 이후 목포의 남쪽 지역과 자은 공소 신자들은 경동 본당 소속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교동 일대의 신자수가 급증하여 산정동 본당과 경동 본당만으로 이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신자들은 본당 분할을 기대하면서 두 본당의 중간 지점인 현 본당 소재지의 부지를 감리(監理) 김성규로부터 기증받은 후, 골롬반 외방선교회와 한 미국인의 도움으로 1958년 5월에 성당을 완공하였다. 그 후 광주대목구장 헨리(H. Henry, 玄海) 주교는 9월 3일자로 산정동 본당의 사바즈 신부를 북교동 본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새 성당의 축성식을 집전하였다. 설립 당시의 관할 구역은 목포시 일원과 신안군 압해도 공소였다. 다행히 성당은 건립되어 있었으므로 종전(終戰)으로 인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사바즈 신부는, 가톨릭 구제회(N.C.W.C)의 원조를 바탕으로 관할 구역 내의 가난한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에게도 구호 물품을 배급하는 데 힘쓸 수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사제관과 교리실을 마련하였고, 1959년에는 까리따스 수녀회를 초청하는 등 본당의 정착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하였다. 그러나 사바즈 신부 이후에는 본당 신부의 잦은 이임 탓에 안정을 찾기가 어려웠다.
〔안정과 성장〕 1962년 11월에 5대 주임으로 부임한 브란던 신부는 신자들의 신심 함양에 노력하면서 본당의 외적 환경을 조성해 나갔고, 7대 주임 로한 신부는 본당의 안정을 위한 사목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그 일환으로 1971년 8월 9일에 본당 주보를 창간하였다. 이어 같은해 10월 25일에는 대성동(大成洞) 본당이 설립되어 신안군 압해면과 목포시 죽교동 일부 지역이 새 본당으로 이관되면서, 경동 본당 소속의 자은면 대율 공소가 본당관할로 이관되었다.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장지권 신부는 1972년부터 영성 생활의 자립과 재정적 자립을 꾀하면서 신자 배가 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11대 주임 서상채 신부는 1977년 3월부터 반 모임의 활성화를 모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당 신자들간의 친교와 경제적 도움을 위해 1979년 10월 28일 '목포 신용 협동 조합' 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레지오 마리애를 비롯한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활성화와 전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또 12대 주임 최형락 신부는 1981년 10월 말에 공소 활성화를 위하여 대율 · 구영 · 고장 · 암태 공소 등에 전교 회장을 파견하였고, 신자들의 친교 활동과 불우 이웃 돕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북교동 본당은 1980년대 후반부터 점차 성장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신자수도 4,000명을 넘어서게 되었고, 평신도 사도직 단체도 증가되었으며, 신심 및 재교육 활동도 더욱 활성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15대 주임 정형달 신부 때에는 노인들의 공동체를 운영하거나 지속적으로 방문하였는데, 최근에는 소공동체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광주대교구 ; 산정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광주대교구 편, 《광주대교구 50년사》, 빛고을출판사, 1990. 〔편찬실〕
북교동 본당
北橋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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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