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 청초 북경에 건립된 4개의 성당 가운데 본래의 형태가 남아 있는 유일한 천주당.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드 풍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 신부가 키니네를 사용하여 강희제(康熙帝)의 학질을 고쳐 준 공로로 하사받은 서안문(西安門) 밖의 부지에서 1701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03년 12월에 봉헌하였다. 이에 앞서 프랑스에서는 1684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중국 전교권을 인정받은 뒤 예수회 선교사 중에서 드 풍타네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보호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로 마카오를 경유하지 못하고 1687년 말에 영파(寧波)에 도착한 후 이듬해 천진(天津)을 경유하여 2월 8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중에서 부베(Bouvet, 白晉) 신부와 제르비용(Gerbillon, 張誠)신부는 북경에 남아 궁정에서 봉사하였으며, 드 풍타네 신부와 르 콩트(LeCompte, 李明) 신부, 비들루(Visdelou, 劉應) 신부는 지방 전교에 착수하였다. 그러다가 강희제가 하사한 부지 위에 북당(北堂)을 건립하여 전교의 본거지로 삼게 되었다.
〔변모 과정〕 당시 북경에는 1650년 선무문(宣武門)안(자금성 밖의 남서쪽)에 건립한 남당(南堂)과 1655년 동안문(東安門) 밖에 건립한 동당(東堂)이 있었다. 한편 서당(西堂)은 라자로회(Lazaristae)의 페드리니(Pedrini,
德理格) 신부가 옹정제(雍正帝) 때인 1725년에 서직문(西直門) 대로에 있던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건립한 것이다. 남당은 1652년에 살 폰 벨(J.A. Schall von Bell, 湯若望) 신부에 의해 확장되면서 순치제(順)(帝)로부터 흠 숭천도'(欽崇天道)라는 편액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690년에 북경이 포르투갈의 보호 교구로 설정되면서 선교 단체들 사이에는 알력이 생겨나게 되었고, 1640년대부터 계속되어 온 의례 논쟁(儀禮論爭)의 결과로 옹정제 때부터 박해가 시작되면서 각 성당의 선교 단체마다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1773년 7월에 예수회가 해산되면서 북경의 선교 단체들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때까지 남당과 동당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북당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당은 포교성성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3년에 프랑스 국왕과 포교성성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라자로회의로(N.J. Raux, 羅廣祥) 신부 등이 1785년 4월 29일 북경에 도착하여 5월 8일부터 북당에 거처하게 되었다. 당시 북당에는 프랑스 예수회 회원인 그랑몽(J.J. de Grammont, 梁棟材 신부 등 6명의 선교사가 남아 있었다. 그 후 가 경제(嘉慶帝) 초기에는 남당과 동당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흠천감의 실권과 직예(直隸) · 산동성의 포교권을 장악하려고 하면서 서당의 이탈리아 선교사들이나 북당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11년 이후의 박해는 북경의 성당들을 다시 한번 변화시켰다. 먼저 서당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추방되고 성당은 몰수되었으며, 동당은 가경제의 압류와 파괴로 인해 선교사들 모두가 남당으로 이전해야만 하였다. 남당은 1838년 이후 한때 러시아 정교회의 수중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또 북당은 1819년에 프랑스 라자로회의 라미오(Lamiot, 南彌德) 신부가 마카오로 추방되면서 대신 포르투갈 라자로회의 세라(Serra, 高守謙) 신부가 관리하였으나, 1826년에는 세라 신부마저 마카오로 떠나면서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중국에서의 박해가 1844년의 황포조약(黃埔條約)으로 종결되면서 라자로회에서는 북당을 재건하였으 나, 나머지 성당들은 폐허로 남아 있었으며, 그마저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남당과 동당은 그 후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가 다시 파괴되었으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북당은 중국 공산화 이후인 1951년에 폐쇄되어 오랫동안 학교와 창고로 이용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 북경 시내에 있는 4개의 성당은 북경을 방문하는 외국 사신들에게 훌륭한 관광 명소였는데, 그중에서도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 즉 南小館) 가까이에 있는 남당과 동당은 조선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서학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되었다. 1644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예수회의 살 폰 벨 신부를, 1720년에 이이명(李頤明)이 쾨글러(Ignatius Kögler, 戴進賢) 신부를, 1765년에 홍대용(洪大容)이 할러슈타인(A. Haller-stein, 劉松齡) 신부를 만난 것도 모두 남당에서였다. 반면에 프랑스 선교사들
의 전교 근거지였던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직접 관계가 있었다. 우선 1783년 말에는 한국 최초의 신자가 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북당을 방문하고 예수회의 그랑몽 신부를 만났으며, 이듬해 초에는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 해 말에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북당과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는 그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784년 말에는 이승훈이 밀사를 선발하여 그랑몽 신부에게 보냈는데, 이 밀사는 1785년 4월(음)에 귀국하다가 체포되어 교회 서적과 편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또 1789년 말에는 한국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 북경으로 가서 북당의 선교 단장인 라자로회의 로 신부를 만나 조건 세례를 받고 이듬해 귀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1785년 초에 프란치스코회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가 북경교구장에 임명되어 남당에 부임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북당보다 남당과 밀접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관계가 1831년 조선교구 창설 때까지 지속되었다. (→ 북경대교구 ; 서울대교구)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A. Thomas, Histoire de la Mission de Pégin, Paris, 1923/ 上智大學 편, 《カトリック大辭典》 Ⅱ · Ⅳ, 東京 : 富山房, 1954/ 羅光主 편, 《天主教在華傳教史集》, 光啓出版社, 1967/榎一雄 編, 《西歐文明と東アジア》, 東京 : 平凡社, 1971/ 崔奭祐, <李承薰 관계 書翰 자료>, 《教會史研究》 8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車基真〕
북당
北堂
글자 크기
6권

1 / 5
1703년 12월에 건립된 북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