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동 본당

北洞本堂

글자 크기
6
1 / 2
광주대교구 소속 본당. 광주시 북구 북동 33 소재. 1933년 5월 21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 광주의 첫 본당으로 초기의 명칭은 '광주(光州) 본당'이었으나 1949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1957~1983년에는 광주대교구 주교좌 본당이었다. 관할 구역은 북동, 누문동, 양2동 전 지역과 충수동, 대인동, 유동, 양1동, 계림2동, 중흥동 일부 지역. 〔교 세〕 1936년 778명, 1951년 765명, 1954년 1,122명, 1960년 3,866명, 1965년 3,076명, 1971년 1,665명, 1976년 1,662명, 1980년 2,031명, 1985년 3,238명, 1990년 4,676명, 1993년 4,471명, 1995년 4,430명. 〔역대 신부〕 초대 민정호(閔正鎬) 마르코(1933. 5~1934.4 2대 마리난(G. Marinan, 梅) 제랄드(1934. 4~1935), 3대 맥메나민(D. McMenamin, 明) 다니엘(1935~1937. 4), 4대 퀸란
(T. Quinlan, 具仁蘭) 토마스(1937. 4~10), 5대 델빈(P. Delvin, 정) 파트리치오(1937. 10~1941. 12), 6대 망간(K. Mangan, 萬) 첨제노(1941. 12~?), 7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1942) 8대 김창현(金昌鉉) 바오로(1942), 9대 김재석(金在石) 요셉(1943~1944. 여름), 10대 장옥석(張玉石) 루치오(1945), 11대 물켄(T. Mulkern, 강) 토마스(1945. 12~1946), 12대 쿠삭(T. Cusack, 고) 토마스(1946~1947), 13대 모나한(P.Monaghan, 牟) 파트리치오(1947~?), 14대 브란돈(P. Brandon, 부) 파트리치오(1951. 7~1953. 10), 15대 라펠티(G. Rafferty, 지) 제랄드(1953. 10~1956. 1) 16대 힐리(M. Healy, 허) 미카엘(1956. 1~1958. 8), 17대 모란(T.Moran, 안) 토마스(1958. 8~1961.8), 18대 마퀴르(D. Maquire) 데스몬드(1961. 8~1962), 19대 티어니(P. Tierney, 지) 베드로(1962~1964. 10), 20대 모란(1964. 10~1968. 6), , 21대 마퀴르(1968.6~1969.6), 22대 코터(J.Cotter) 예레미야(1969. 6~10), 23대 오닐(N. O'Neil) 노엘(1969. 10~1974. 4), 24대 모리세(M. Morrissey) 미카엘(1974. 4~1977. 7), 25대 정규완(鄭圭完) 토마스(1977. 7~1981. 9), 26대 김종남(金鍾南) 로마노(1981. 9~1987. 2), 27대 박영웅(朴榮雄) 가브리엘(1987.2 2), 28대 노완석(魯玩錫) 타대오(1988. 2~1991. 2), 29대 이천수(李淺水) 라자로(1991. 2~1996. 2), 30대 조영대(曹永大) 프란치스코 (1996. 2~현재).
〔공소 설립〕 광주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소급되지만, 본격적인 전교는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특히 나주 양천리 계량(桂良, 현 노안) 본당의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는 1929년 12월 10일 광주 지역에 살던 3가구 10여 명의 신자들을 상대로 미사를 봉헌하고 공소를 설립함으로써 이 지역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이후 박재수 신부는 광주에 성당을 마련하고자 목포 주임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와 전주 감목 대리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를 비롯한 동창 신부들에게 원조를 청하여 1930년 8월 광주읍 욱정리(현재의 북동 33번지)에 성당 부지 1,000평을 매입하였다. 이때 대구교구의 페랑(P. Ferrand, 夫) 신부는 박재수 신부의 노력에 감복하여 많은 성금을 희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금을 토대로 강당과 사택을 신축한 박재수 신부는 박재춘(朴在春, 요한) · 임 글라라 내외를 전교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본당 설립과 변모〕 공소 설립 이후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마침내 1933년 5월 21일 민정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마리난 신부는 부임 초 1,300평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37평의 목조 성당을 건립한 데 이어 1935년 2월에는 사제관을 건축하였으며, 3대 주임 맥메나민 신부는 1936년에 가난한 아동들의 교육을 위하여 성당 구내에 혜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4대 주임 퀸란 신부는 1937년 10월 2일에 새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6월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골롬반회 신부들이 체포 · 구금되면서 본당은 김양홍, 김창현 등 한국인 신부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1942년 2월에 광주교구장으로 임명된 와끼다(脇田) 몬시놀은, 이듬해 2월 광주본당의 사제관을 수리 증축하면서 교구청을 목포에서 광주로 이전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교구청은 목포로 환원되었고, 본당은 다시 골롬반회 신부들이 담당하게 되어 13대 주임으로 모나한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는 1947년 3월 15일 예전의 목조 성당에 성심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49년 12월 8일에는 남동 본당을 분할하면서 광주 본당을 북동 본당으로 개칭하였다. 이어 16대 주임 힐리 신부 때인 1957년 1월 21일 광주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북동 본당은 주교좌 성당이 되었으며, 2월에는 담양 본당을 분할하였고, 이듬해 7월에는 본당의 레지오 마리애 꼬미시움이 세나투스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9월에는 1951년 7월 이래로 본당에서 활동하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철수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분원이 설치되었다.
이렇게 발전해 가던 북동 본당은 1964년에 신자수가 3,000명이 넘어 사목상의 어려움이 있게 되자 그 해 8월 계림동 본당을, 10월에는 월산동 본당을 분할하였고, 1967년 1월에는 임동 본당을 분할하여 관할 구역을 조정하였다. 이와 함께 1969년 6월에는 평신도 협의회가 구성되었고, 1973년에는 유치원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1976년 1월에는 수녀원 건물을 신축하였다. 한편 1977년 7월에 정규완 신부가 25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부터 본당은 다시 한국인 신부들이 담당하게 되었는데, 특히 본당 자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1981년 5월에 신협 회관을 건립하고 본당 묘지를 매입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3년에는 주교좌가 북동 본당에서 임동 본당으로 이전되었으며, 성당 건축 50주년이 되는 1987년에는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성당과 교리실을 증축한 데 이어 이후에도 교리실 · 교육관 등의 시설을 꾸준히 증 · 개축 하였다. 1993년 10월에는 본당 설립 6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고, 1997년 10월에는 수녀원 건물을 다시 신축하였으며, 그 해 12월에는 새 교육관 공사에 착수하여 1998년 11월에 완공할 예정이다. 1998년 현재 신자들의 높은 이주율로 교세는 줄어드는 추세에 있지만, 북동 본당은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전 신자가 노력하고 있다. (⇦ 광주 본당 ; → 광주대교구 ; 남동 본당 ; 임동 본당)
※ 참고문헌  천주교 광주대교구, 《광주대교구 50년사》, 1990/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