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수동 본당

北水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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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최초의 벽돌조 고딕 양식으로 건립된 수원 성당(왼쪽)과 1957년 3월 3일에 있은 회장단 묵상회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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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최초의 벽돌조 고딕 양식으로 건립된 수원 성당(왼쪽)과 1957년 3월 3일에 있은 회장단 묵상회 기념.

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북수동 316 소재. 1891년 갓등이(加等里, 현 왕림) 본당 관할 공소였다가 1923년 11월경에 수원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959년 11월 25일 고등동(高等洞) 본당을 분리하면서 본당명을 북수동 본당으로 변경하였다. 주보는 대천사 성 미카엘. 관할 구역은 남수동, 매향동, 북수동, 신풍동, 연무동, 영동, 이의동, 장안동, 남창동, 팔달로 전 지역과 우만 아파트 3~4단지와 지동 일부 지역. 〔교세〕 1960년 4,200명, 1964년 3,117명, 1970년 3,600명, 1976년 3,129명, 1981년 2,686명, 1986년 5,616명, 1991년 6,652명, 1996년 7,221명. 〔역대 신부〕 초대 르 메르(L. 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1923. 11~1928. 11), 2대 크렘프(H. Krempff, 慶元善) 헨리(1928. 11~1930. 11), 3대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1930. 11~1931.5), 4대 폴리(D. Polly, 沈應榮) 데시데라도(1931. 5~1948. 8), 5대 이복영(李福永) 요셉(1948. 8~1958. 8), 6대 임종구(林鐘求) 바오로(1958. 9~1962. 7) , 7대 장금구(莊金龜) 요한 그리소스토모(1962. 9~1964. 7) , 8대 류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1964. 7~1970. 7), 9대 이계항(李啓恒) 베드로(1970. 7~1971. 9), 10대 정덕진(丁德鎮) 루가(1971. 9~1973.6), 11대 정주성(鄭主成) 요셉(1973. 6~1975. 4), 12대 최경환(崔敬煥) 마티아(1975. 4~1981.6), 13대 김병열(金炳烈) 보니파시오(1981. 6~1985.2), 14대 이명기(李命基) 베르나르도(1985. 2~1990. 12), 15대 장덕호(張德鎬) 갈리스도(1990. 12~1995. 9), 16대 김학렬(金學烈) 사도요한(1995. 9~현재).
〔공소 시대〕 경기도 지역 전담 신부로 임명되어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旺林里)에 정착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앙드레(J. André, 安學古) 신부는, 1888년 7월 갓등이 본당을 설립하였는데 당시의 교세는 25개 공소에 신자수는 1,790명이었으며, 북수동 본당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수원 공소가 갓등이 본당의 공소로 편입된 것도 이때였다. 1890년 3월경 갓등이 본당의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는 이듬해부터 수원공소를 방문하였는데, 이 무렵 수원 읍내의 신자 차재형, 나기원, 최동필, 이규채 등은 알릭스 신부와 협의하여 남수리(南水里) 황학정 부근의 밭 800평을 매입한 후 공소 강당을 마련하고, 인근에 있는 25칸의 한옥 한 채를 매입하여 초등 과정을 가르치는 사설 강습소 '화양학교' (華陽學校)를 개설하였다. 또 1897년 3월에는 북수리에 소재한 일명 '팔 부잣집' 이라는 기와집과 행랑채 300여평을 매입한 후 내부를 개조하여 강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페네(Peynet, 裴嘉祿) 신부에 이어 1900년부터는 다시 알릭스 신부가 수원 공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8년에 갓등이 본당 신자들이 2명의 강도 교우를 화형시킨 데 대한 조치로 알릭스 신부에게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이 내려지면서 그는 그 해 3월부터 1911년 4월에 귀국할 때까지 갓등이 본당 대신 수원 공소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알릭스 신부가 귀국한 뒤에는 하우현(下牛峴) 본당의 르 각(Le Gac, 郭元良) 신부가 갓등이 본당까지 겸임하였으며, 1914년 5월 르 각 신부가 사망한 뒤에는 행주(幸州) 본당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갓등이 본당을 겸임하였다. 김원영 신부는 이듬해 남수리 일대의 800평 부지를 용주사(龍珠寺)에 매각하였고, 그 후 갓등이 본당 관할의 수원 공소는 인근 공소의 분할로 점차 신자수가 감소되어 1921~1922년경에는 70여 명에 불과하였다. 한편 당시 31개의 공소를 관할하던 김원영 신부는 사목 활동의 어려움이 증대됨에 따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수원 지역을 전담할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몇 차례 요청하였다. 그 결과 1923년 10월 말(혹은 11월 초)에 평양 관후리(館後里) 본당에서 25년 가까이 사목하던 르메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수원 공소는 비로소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성장과 변모〕 르 메르 신부가 부임할 당시 수원 공소는 오랫동안 침체된 상태여서 전체 신자수가 80명도 안되었으나, 본당으로 승격된 후에는 매년 교세가 크게 증가하여 1925년경에는 300여 명에 달하였다. 1931년 5월에 부임한 4대 주임 폴리 신부는 본당을 더욱 활성화 시키기 위해 부녀자들로 구성된 '명도회' 를 조직한 데 이어 어린이 교리반, 돈 보스코회 등 평신도 단체들을 신설하여 신자들의 교육과 의식 개발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1933년 성당 신축 때에는 자신과 본국에 있는 모친의 사재(私財)를 모두 봉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도 원조를 받아 수원 최초의 벽돌조 고딕성당(75평)을 완성하였다. 이듬해에는 4년제 '소화 학술 강습소'를 개설한 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의 수녀 2명을 초청하여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이 강습소는 1946년 1월에 '소화국민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1948년 8월 8일 폴리 신부가 약 17년 동안 재임한 북수동 본당을 떠나 천안 본당으로 전임되고, 그 후임으로 이복영 신부가 부임하여 10여 년 간 사목하였다. 이어 6대 주임 임종구 신부 때인 1959년 6월 14일에 레지오마리애가 도입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25일에는 고등동 본당을 분할하면서 2,099명의 교적을 이관하고 본당명을 북수동 본당으로 바꾸었다. 1962년 9월에 7대 주임겸 수원 지구 수석 신부로 부임한 장금구 신부는 1964년 당수리(堂樹里)에 본당 묘지를 조성하였으며, 주일학교 교리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8대 주임 류봉구 신부는 예비자를 위한 교리서 《신앙으로 가는 길》을 편찬하였고, 1968년 11월에는 본당 주보 <주간 생활 안내>를 창간하였는데, 이 주보는 후에 수원시 연합 주보로, 나아가서는 교구 주보로까지 발전하였다. 또한 그는 소화국민학교 교사(校舍)를 현대식으로 신축하여 학교 발전을 도모하였으며, 행려자들을 위한 '안토니오 식당'을 약 2년 동안 운영하였고, 1970년 6월 29일에는 지동(池洞) 본당을 분리함과 동시에 670명의 교적을 이관하였다.
12대 주임 최경환 신부 때인 1976년 11월 14일에는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그 해 11월 19일에는 조원동(棗園洞) 주교좌 본당을 분할하였으며, 1978년 3월 6일에는 낡은 옛 성당을 철거하고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4월 5일 총면적 236평의 성당과 수녀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3대 주임 김병열 신부 때인 1981년 8월 21일에는 매교동(梅橋洞) 본당을 분할하고 용인군 수지면에 소재한 불우 청소년 복지 시설인 성심원(聖心院) 원아들의 교적을 이관받았다. 또 14대 주임 이명기신부 때인 1988년 2월 17일에는 풍덕천 · 손골 · 대지 · 양촌 등 4개 공소의 299세대 507명을 신갈(新葛) 본당으로 이관하였으며, 15대 주임 장덕호 신부는 본당 사무의 전산화를 비롯하여 성당 내에 특별 고해소와 성체 조배실을 설치한 데 이어 본당 7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북수동 성당 70년사》를 간행하였다. 16대 주임 김학렬 신부는 개인 성화와 선교 활동을 위한 실천 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본당 분할 계획에 따라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 105번지 일대의 부지 1,700평을 매입하였다.
(⇦ 수원 본당 ; → 수원교구 ; 왕림 본당)
※ 참고문헌  《北水洞聖堂七十年史》, 천주교 수원교구 북수동 성당, 1994.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