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물치지

格物致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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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의 8조목 중 처음 두 조목으로 유교 인식론의 기본 개념. 그 원문에서는 이를 "나의 지식을 극진하게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궁극에까지 이르는 데 달려 있다" '(致知在格物)는 말과 "사물의 이치가 궁극에까지 이른 다음에야 내 마음의 지식이 극진한데 이른다" (物格而後知至)는 말로 언급하고 있다. 주희(朱熹)는 《대학》의 체제를 재구성하여 주석을 붙인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이 '격물치지' 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여 나의 지식을 극진함에 이르게 한다"고 해석하였다.
〔해석과 쟁점〕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격물치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한 이후 이것은 유교 전통에 인식론의 기초를 제공하고, 도덕적 각성과 수양론의 근거를 밝혀 주는 문제로 중시되어 왔다. 또 주희는 <대학> 본문에 격물치지에 관해 결손된 곳이 있다 하여 스스로 이를 128자로 보충하였는데, 이 보충 부분을 '보망장' (格物致知補亡章)이라 일컫는다. 이 보망장을 통해 제시된 주희의 격물치지설은 주자학의 핵심 문제의 하나로 중시되었으며, 훗날 여러 가지 논란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왕수인(王守仁)은 주희의 보망장을 전면 거부함으로써 나아가 주희의 《대학장구》 체제를 부정하고, 본래의 《대학》 곧 《고본대학》(古本大學)을 경전으로 다시 확인하였다. 한편 주자학과 양명학의 특징을 비교할 때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주희가 《대학》의 8조목 가운데 핵심 개념으로 '격물치지' 를 내세운 반면에 왕수인은 성의정심 (誠意正心)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격물치지와 관련된 쟁점은, 첫째로 격물의 '격' (格) 자가 갖는 의미에 대한 해석이다. 정현(鄭玄)은 '격' 자의 의미를 '오는 것' 〔來〕이라 하여 대상의 사물이 주체에 다가와서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장재(張載)는 '제거하는 것' 〔去〕이라 하여 대상으로서의 사물을 제거할 때 마음이 평정하게 물을 지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정이(程頤)와 주희는 '이르는 것' 〔至〕이라 하여 인식의 주체가 대상인 사물에 나아감으로써 사물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으며, 호안국(胡安國)은 '헤아리는 것' 〔度〕이라 하여 대상 사물에서 법칙적 요소를 헤아림으로써 지식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왕수인은 이를 '바로잡는 것' 〔正〕이라 해석하여, 주체인 마음의 작용에서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아 앎〔知〕을 이루는데, 이는 본심에 갖추어진 양지(良知)에서
찾아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격' 에 관한 해석은 학자와 학파의 입장에 따라 다양하며,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 하는 입장의 차이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로 이해되고 있고, 주체인 마음을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구실로 파악하는 차이를 드러내 준다.
둘째로, 격물에 있어서 '물' (物)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정현 이후 주희나 왕수인의 입장에 공통성이 있다. 곧 그 '물' (物)을 '사' (事)와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물' 이 '사' 와 같다고 하면,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등을 '격물' 의 '물' 로 파악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주희나 왕수인의 격물론은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도덕적 이해를 통합하는 입장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러한 송대 이후의 격물론은 객관적 대상과 도덕적 의미를 혼합한 관념론적 격물론이라하여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셋째로, 치지의 문제에서 '지' (知)는 주희에 의하면 지식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희의 지식은 인간 마음의 지각 능력을 전제로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 닿아서' 〔卽物〕 그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 〔窮理〕으로써 각성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왕수인은 '치지' 를 '치양지' (致良知)의 개념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곧 그는 '지' 를 《맹자》에서 말한 '사려하지 않고 알 수 있는 것' 으로 보아 '양지' (良知)의 의미로 파악하였으며, 이 '양지' 는 곧 지각의 구체적 경험성을 넘어선 것으로 성범(聖凡)이나 고금(古今)에 차이가 없는 본심의 보편적 이치〔天理〕라고 하였다.
주희는 격물치지론에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에 지식에 극진하지 못하는 것이라 지적함으로써 지식의 대상적 근거를 중시하였다. 나아가 그는 인식의 방법을 말하면서, 이미 알게 된 이치를 기초로 점점 지식을 축적시켜 나가는 경험적 축적의 노력을 오래 계속해 간다면, "하루 아침에 시원하게 꿰뚫어져〔豁然貫通〕 모든 사물의 겉과 속이나 정밀한 세부와 거친 대강에 모두 이르고, 내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모두 밝혀질 것이다"라고 하여 격물치지의 궁극적 경지를 밝히고 있다. 사물의 이치와 마음의 지식이 시원하게 꿰뚫리는 완성 단계는 오랜 노력의 숙성 과정으로서 여러 축적 단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왕수인의 치양지(致良知)에서는 '양지' 가 본래 환히 트여 지극히 공번된(廓然大公) 본체이므로, 이것이 흐리거나 은폐 될 때는 물욕을 제거하면 그 본체가 드러날 수 있다고 하여 본체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조선 학자의 해석〕 조선 시대 유학자들도 격물치지의 문제를 활발하게 논의하였다. 이황(李滉)은 '격' 을 '궁구하여 이른다' 는 뜻으로 파악하고, 격물을 궁구하는 데 비중을 두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 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물격(物格)은 이른다는 데 비중을 두어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 로 해석하여 '격' 의 주체를 인간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김식(金湜)은 '사물의 이치가 이른다'로 해석하여 '격' 의 주체를 사물의 이치로 파악하고 있다. 이황도 만년에는 '사물의 이치가 이른다' 는 해석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물의 이치가 인간에게 드러날 수 있는 이(理)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이도설(理到說)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물격을 '사물의 이치가 극처에 이르는 것' 이라 하여 이(理)의 능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격물설의 해석 입장은 성리설과 연결되어 이황과 이이로 대표되는 영남 학파와 기호 학파의 학파적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 실학의 대표적 인물인 정약용(丁若鏞)은 '물' 의 대상을 '사' 와 엄격히 구별하였다. 그는 '격'의 의미도 '온다' 거나 '이른다' 는 뜻이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하고, 왕수인이 '바르게 한다' 고 해석한 것을 인정하였다. 또 주자가 《대학》의 8조목을 제시하고 그 8조목을 명명덕(明明德)과 신민(新民)의 강령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 데 반해, 격물 · 치지는 다른 6조목과 구별되 어야 하며, 이 6조목이 격물 · 치지에 속하는 것이라 하여 '격치 6조목설' 을 제시하는 새로운 격물치지의 체계를 내세웠다. 그는 격물의 '물' 은 본말(本末)이 있는 것이고, 치지는 선후(先後)하는 바를 아는 것이라 하여, 의(意) · 심(心)이 근본〔本〕이요 가(家) · 국(國)이 지말〔末〕임을 알며, 성(誠) · 정(正)이 시작이요 제(齊) · 치(治)가 마침임을 아는 것이 격물이라 하였다. 아울러 '바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뜻을 참되게 하여야 한다' 고 하나, '뜻을 참되게 하고 난 뒤에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 는 일의 선후를 아는 것이 치지라 분석하고, 이를 조합하여 <격치도>(格致圖)로 제시하고 있다.
주희의 《대학장구》 보망장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의 찬반론이 예리하게 대립하였는데, 이를 지지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주자학[道學]의 정통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언적(李彥迪)은 정통 도학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장구보유》를 저술하여, 주희의 보망장이 없이도 《대학》의 첫머리에서 격물치지장의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전(李銓)과 최수지(崔收之) 등은 이언적과 같이 보망장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이황과 유성룡(柳成龍) 등은 주희의 보망장 체제를 지지하여 이들을 비판하였다. 또 조선 후기의 양명학을 대표하는 정제두(鄭齊斗)는 왕수인의 주장과 같이 《대학장구》 자체를 거부하고 《고본대학》에는 결손이 없다고 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의 실학 또는 기(氣)철학의 격물론에서는 사물의 대상을 도덕성으로부터 분리하는 객관적 내지 과학적 격물론을 제시하였다. 정약용이 《대학》의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에서 '의(意) · 심(心) · 신(身) · 가(家) · 국(國) · 천하(天下)' 를 대상적 존재인 '물' 이라 하고, '성(誠) · 정(正) · 수(修) · 제(齊) · 치(治) · 평(平)' 을 행위적 사실인 '사' 라고 분석한 것도 대상의 사물과 인격적 도덕성을 구분하는 객관적 격물론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서양의 근대 과학이 수용될 때, 중국에서 서양의 물리 · 화학을 '격치학' (格致學)이라 번역하였던 것이나, 조선의 사상(四象) 의학을 체계화한 이제마(李濟馬)가 그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격치고' (格致藁)라는 표제로 저술한 사실은, 그만큼 격물치지의 개념이 유교 전통의 이해를 벗어나 자연 과학적 탐구 방법 내지는 새로운 사유 체계에로의 연결 통로가 된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 참고문헌  裴宗鎬 《韓國儒學史》,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琴 章泰, 《韓國儒敎의 再照明》, 전망사, 1982/ 唐君毅, 신동아연구소, 1966/ 金道基, 《朝鮮朝儒學에 있어서 認識理論에 對한 研究》, 성균 관대학교 대학원, 1986, 〔琴章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