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파

北學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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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현실과 이념의 개혁을 주장한 학문 · 사상계의 한 유파를 지칭하는 역사적인 용어. 일명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넓게는 북학을 실학(實學)의 한 조류로 이해하는 데 반해 북학 자체만을 실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탈성리학(脫性理學)의 입장에서 기존의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하고, 특히 이용후생에 필요한 청(淸)의 선진 문물과 서학(西學)을 받아들여 부국 강병을 꾀하였으며, 상업 위주의 사회 개혁과 해외 통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북학 사상은 훗날 개화 사상(開化思想)으로 연결되었다.
〔북학과 북학파〕 '북학'이란 용어는 《맹자》(孟子) 등 문공장구 상(滕文公章句上)에서 "초(楚)나라의 진량(陳 良)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흠모하여 북으로 중국에 가서 학문을 배워 용화변이(用華變夷)를 꾀하였 다"는 데서 유래되었다(朴齊家, 《北學議》, 序). 조선 후기에 원용된 북학의 의미 또한 중국, 즉 청조 문화의 선진성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북학파 인물들은 비록 그것이 오랑캐의 문화라고 할지라도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명분(名分)을 중시하던 북벌론자(北伐論者)들에 반대하여 실사(實事)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북학의 수용은 한양과 북경을 잇는 연행사(燕行使)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박지원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제시한 것처럼 '이용(利用)→후생(厚生) →정덕(正德)'의 과정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여기에 속하는 인물들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비롯하여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9~?),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인데, 넓게는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그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홍대용과 박지원은 북학파의 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1768년(영조 44) 무렵부터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 등과 교유하면서 이용후생을 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는 1776년(정조 즉위년)에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이름을 청나라에까지 알렸다. 한편《청장관 전서》(青莊館全書)를 남긴 이덕무의 학풍은 손자인 이규경에게 전해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낳았으며, 김정희는 어린 나이에 박제가의 제자가 되면서 그의 학풍을 이어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지원의 학문은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에게로 이어졌으며, 박제가와 김정희의 학문은 오경석(吳慶錫)에게 영향을 주어 개화 사상을 낳게 되었다.
북학 사상가들 가운데는 서얼 출신으로 1779년(정조 3)에 설치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을 역임한 인물들이 있었고, 연행사 일행으로 북경을 다녀온 뒤에 연행록(燕行錄)을 남긴 인물들이 있었다. 또 청조 고증학(考證學) 의 영향을 받아 경전의 사실 여부를 규명하고자 하면서 새로운 경세 이념을 수용한 인물도 있었다. 우선 홍대용은 1765년에 북경에 가서 이듬해 초에 청나라의 학자들과 교유하고 독일계 선교사 할레르슈타인(Augustinus von Halerstein, 劉松齡)과 고가이슬(Antonius Gogeisl, 鮑友管)을 만나고 귀국한 뒤 연행록인 <연기>(燕記), <유포문답>(劉鮑問答), 과학서인 《의산문답》(醫山問答), 수학서인 《주해수용》(籌解需用) 등을 남겼다. 또 이덕무와 박제가는 1778년에 직접 북경으로 가서 청나라의 석학들과 교류함으로써 명말 청초 이래의 실학을 접하고 고증학에 관한 서적들을 가져왔으며, 박제가는 이때 《북학의》(北學議)라는 연행록을 저술하였다. 또 그는 1780년에 북경을 다녀온 후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겼으며, 홍양호와 김정희도 북경으로 가서 청나라의 석학들과 교유하고 고증학을 수용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 동안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 등은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1779 년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학문과 사상〕 북학파 인물들은 노론 낙론계(洛論系)의 학맥을 이어 가던 집안이나 학자에게서 학문을 배운 경우가 많지만, 기존의 학풍과는 달리 탈성리학적(脫脫性理學的)인 경학관(經學觀)을 지니고 있었으며, 고증학풍의 영향을 받아 경전 내용의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하여 원시 유교(原始儒敎)의 경전들을 연구하였다. 아울러 남인계인 유형원(柳馨遠)이나 이익(李潔)의 학문을 존중하였고, 박지원 · 이덕무 · 박제가 등과 같이 당대에 맞는 새로운 문학과 문체를 추구하다가 문체 반정(文體反正)을 꾀하던 정조에게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화이론' 에 입각하여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로 보거나 그 연장선상에서 명분에 입각한 북벌론을 주장하던 종래의 학자들과는 달리 새로운 화이관을 지니게 되었다. 즉 홍대용이 《의산문답》에서 화이지분(華夷之分)을 부정하면서 "공자(孔子)가 구이(九夷)에서 살았다면 역외 춘추(域外春秋)를 썼을 것"이라는 역외 춘추론을 내세운 것처럼 그들은 "조선을 곧 동이(東夷)”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유득공처럼 공리 공담에 머물던 북벌론 대신 동이족의 옛 땅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영토 회복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경학관이나 세계관, 역사 인식뿐만 아니라 북학 사상가들은 전곡(錢穀) · 갑병(甲兵) 등의 명물(名物)과 율력(律曆) · 산수(算數) 등의 도수(度數)를 중시하는 새로운 경제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입각하여 그들은 조선 사회에 긴요한 구빈(救貧)과 부국 강병책을 제시하였으며, 상업과 대외 무역을 중시하고 선진 기술이나 산법 · 책력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으로써 생활을 개선하고 이에 필요한 화폐(통상) · 수레(운반) · 벽돌(건축) 등과 관련된 각종 정책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북학 사상가들은 자연스럽게 선진의 청조 학술과 문물의 수용을 주장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용→후생→정덕'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작업으로 이해되었다.
〔서학 인식〕 북학의 수용은 결국 청조 문화 안에 담겨져 있던 서학 수용론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점차 해외 통상론(海外通商論) 내지는 서사 고빙책(西士顧聘策)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북학 사상가들 가운데 일찍이 서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홍대용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서양의 천문 · 역산에 관심을 가졌으며, 서양 과학의 근본이 수학과 관측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주해수용》이라는 수학서를 저술하고, 1762년에는 스스로 농수각(籠水閣)이라는 천문대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1766년 초에 북경에서 청나라의 학자와 서양 선교사들을 만난뒤 서양의 문화, 특히 역산과 관련 의기(儀器)들에 대해 들은 뒤 지원설(地圓說)뿐만 아니라 지전설(地轉說, 즉 自轉說)까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지전설은 박지원의 <홍덕보 묘지명>(洪德保墓地銘)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북학파 인물들이 기존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천문관을 극복해 나간 사실을 의미한다. 앞에서 설명한 '화이일야'의 세계관이나 '역외 춘추론' 또한 여기에 한 배경이 있었다.
더 나아가 박지원은 《허생전》(許生傳)에서 서양 문화의 수용에 대해 적극적인 일본의 사이 정신(師夷精神)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와 같은 홍대용의 서학 수용론과 박제가의 사이 정신은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에 이르러 해외 통상론과 서사 고빙책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박제가는 1786년 정조에게 올린 <병오소회>(丙午所)를 통해 "교역의 이익을 위해서는 중국의 개항장을 이용하여 서양과 통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였으며, 부국강병과 민생 해결을 위해서는 서양의 우수한 제반 기술 뿐만 아니라 천문 · 역법 · 의학 · 군사 등에 대한 것을 배워야 하고, 이에 정통한 서양 선교사〔西士〕를 초빙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북학 사상가들의 서학 인식은 세계 지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서양 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데 바탕을 둔 사이 장기(師夷長技)식의 채서 사상(採西思想)이었다.
그러나 북학파 인물들은 천주교 수용까지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천주교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측면보다는 명물 도수(名物度數)의 학문인 서양의 과학 · 기술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즉 홍대용은 서양의 사원설(四元說)이나 삼혼설(三魂說) 등을 이해하면서도 천주교 교리에 관하여는 의구심을 나타냈고, 끝내는 그것이 "유가의 상제(上帝)란 이름을 훔치고, 불가의 윤회설(輪廻說)로 치장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그의 지우인 박지원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다만 박제가는 이와같은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천주교의 후행지구(厚行之具)만은 불교에 없는 것"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점에서 북학 사상은 동도 서기론(東道西器論)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실학)
※ 참고문헌  金龍德, <貞蕤朴齊家研究> 1 ~2부, 《中央大學校論文集》 5집, 1961 및 《史學研究》 10집, 1961/ 李成茂, <李德懋의 實學思想>, 《鄉土 서울》 31, 1967/ 金泳鎬, <實學과 開化思想의 聯關問題>, 《韓國 史研究》 8집, 1972/ 李龍範, <泠泠 柳得恭>, 《李乙浩博士停年紀念實學論叢》, 全南大 湖南文化研究所, 1975/ 李元淳, <朝鮮後期實學者의 西學認識>, 《歷史教育》 17집, 歷史教育研究會, 1975/ 朴星 來, <韓國近世의 西歐科學 受容>, 《東方學志》 20집, 延世大學校 國學研究院, 1978/ 崔完秀, <秋史書派考>, 《澗松文華》 19호, 1980/ 琴章泰, <北學派의 實學思想一洪大容의 科學精神과 朴趾源의 實用精 神, 《精神文化》 10집, 1981/ 朴星來, <洪大容의 科學思想>, 《韓國學報》 23집, 1981/ 孫承喆, <北學의 中華的 世界觀 克服一그 展開過程理解를 위한 序說>, 《江原大論文集》 15집, 1982/ 劉奉學, <北學思想 의 形成과 性格>, 《韓國史論》 8, 1982/ 池斗煥, <朝鮮後期 實學研究의 問題點과 방향>, 《泰東古典研究》 3집, 泰東古典研究所, 1987/ 姜在彥, 《조선의 西學史》, 民音社, 1990/ 崔奭祐, <朝鮮後期의 西學思想>, 《國史館論叢》 22집, 國史編纂委員會, 1991/ 徐仁源, <耳溪 洪良浩의 北學論>, 《實學思想研究》, 毋岳實學會, 1991.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