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을 보면〔見性〕 부처(Buddha)가 된다〔成佛〕. 곧 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뜻으로 선종(禪宗)의 근본 입장 가운데 하나. 특히 중국의 육조(六祖) 혜능(慧能, 637~713)을 시조(始祖)로 하는 남종선(南宗禪)에서 강조한다.
〔어원 및 배경〕 '견성 성불' 이란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은 중국의 양(梁)나라 보량(寶亮, 444~509)이 지은 《열반경집해)(涅槃經集解)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성품을 보아 깨치면 그대로 부처라는 사상은 혜능의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비로소 확립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육조단경》 <반야품>(般若品)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나온다. "우리 본래의 자성이 청정(淸淨)하니 만약 자신의 이 마음을 알면 그대로 견성이라 모두 도를 이루리라" (我本元自性清淨 若識自心見性 皆成佛道)"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부처이며 이 본래 성품을 떠나 부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本性是佛 離性無別佛). 이와같이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주장은 인간의 가능성, 인간 심성의 깊은 신뢰 위에 성립되었다. 즉, 《열반경》에서 나오는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一切衆生悉有佛性)라는 대승의 불성설(佛性說)은 선(禪)불교에서 '마음이 곧 부처' (心卽佛), '자성이 부처'(自性是佛)라는 심성(心性) 이해로 수용되고 이런 기초 위에서 견성 성불의 사상이 성립되었다.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4구게(四句偈)에 포함되어 선종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어로 오늘날까지 널리 전한다. 경전 밖에 따로 전하는 것(敎外別傳)/ 문자를 세우지 않으며(不立文字)/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直指人心)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見性成佛) .
〔내 용〕 불교는 깨달음(覺)의 종교이다. 깨달음이야말로 불교의 처음이요 끝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새벽 별을 보고 깨쳤다. 그 깨달음이 불교의 시작이다. 경전이나 가르침을 포함해서 오늘날 불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것은 그 깨침의 연장이요 설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부처가 깨친 진리는 언제나 항상(恒常)하며 그 항상한 진리를 깨치는 사람이 다름아닌 부처이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사람이 다 석가모니 부처와 같이 깨쳐서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교에서 어떻게 깨칠 것인가,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선종이 일어나기 전 전통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전에 나타난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의 몸과 입을 다스리고〔戒〕, 마음을 맑게 하여〔定〕 지혜(慧)를 얻는 이른바 계, 정 혜 삼학(三學)의 점차적이고 단계적인 수행(修行)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하여 선불교(禪佛敎)는 교불교(敎佛敎)와는 전혀 다른 혁신적 방안을 제시하였으니 그것이 다름아닌 '성품을 보면 부처가 된다' 는 견성성불이다. 이 선불교의 입장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언어나 문자를 통한 것이 아니라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마음의 성품을 보아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 그 자체가 '달' 이라면 깨침의 내용을 설명하는 표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다. 따라서 달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먼저 달을 보려는 사람의 시선이 손가락을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시선이 손가락에만 머물러 있는 한, 달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경전이나 가르침에 대한 집착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선불교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경전 밖에 따로 전하는 것,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이러한 선불교의 입장은 언어, 문자로 표현된 가르침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데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주장이다. 선불교가 성립되기 전까지의 불교, 특히 중국 불교는 경전을 중심으로 다양한 종파로 발달하였다. 이러한 경전 중심의 종파 불교에서 경전에 대한 연구와 주석, 체계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선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교불교는 지나치게 가르침에 집착, 본래의 목적인 깨침을 소홀히 한 오류를 범하였다. 즉, '손가락' 에 집착, '달' 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졌다. 따라서 '손가락' 이 아니라 달을 직접 보라는 것이다.
둘째, 성품을 보는〔見性〕 깨달음은 단계적이고, 점차적인 것이 아니라 '담박' 에 가능하다. 즉 돈(頓), 돈오(頓悟)라는 말은 이런 깨달음이 곧장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리킨다. 마치 어두운 방에 전기 스위치를 올릴 때 방안이 일시에 밝아지듯 깨침은 담박 가능하다는 것이다. 《육조단경》 <오법전의품>(悟法傳衣品)에는 이러한 견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가 나온다. 혜능이 스승홍인(弘忍)의 법을 받아 남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혜능의 뒤를 좇았다. 그중 진혜명(陳惠明)은 끝까지 혜능을 추격하여 법을 청하자 혜능은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말아라. 바로 이럴 때에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 모습인가?"라고 물었다. 이 물음에 혜명은 본래의 성품을 깨쳤고 "제가 비록 오랫동안 황매산에 있었으나 본래 모습[本來面目]을 살피지 못했는데 가르침을 받고 보니 마치 물을 마셔 그 차고 더운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예에서 보듯이 혜능은 밖으로 법을 찾아 묻는 혜명에게 마음의 성품을 보도록 똑바로 가리켰고(直指人心), 그에 따라 혜명은 선 · 악 이전의 마음의 본래 성품을 분명히 보았다. 이처럼 마음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見〕이 깨달음이며, 과정도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돈(頓)이요 순간적이다.
셋째, '돈' 이기 때문에 깨달음은 점진적인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깨달음은 수행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육조단경》의 유명한 신수(神秀)와 혜능의 게송(偈頌)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5조(五祖)의 법을 전하기 위하여 공부한 바를 게송으로 보이라는 홍인의 지시에 따라 신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바쳤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心如明鏡台)/ 때때로 부지런히 열어(時時勤拂拭)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勿使惹塵埃) " 그에 비하여 혜능의 게송은 완전히 달랐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菩提本無樹)/ 거울 또한 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明鏡亦非台)/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날까 보냐(何處惹塵埃). 신수의 게송은 우리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고 있고 따라서 티끌이 끼지 않도록 열심히 닦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먼지가 끼지 않도록 열심히 닦는 수행에 초점이 있다. 그러나 혜능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신수가 거울에 비유한 마음은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며 본래 한 물건도 없는〔本來無一物〕 바탕일 뿐이다. 한 물건도 없기 때문에 티끌이나 먼지가 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혜능에 의하면 티끌을 없애는 수행이 아니라 오직 한 물건도 없는 본래의 성품에 눈뜨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앉아서 "마음을 응시하고 고요함을 관조" 〔看心觀靜〕 하는 것으로 알려진 신수의 가르침은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것, 혹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
남악회양(南嶽懷讓, 674~744)과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다음과 같은 일화는 성품을 볼 뿐 수행의 방법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선종, 특히 남종선의 특색을 잘 드러내 준다. 마조는 남악의 문하에서 열심히 앉아 좌선(坐禪)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회양이 물었다. "좌선으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회양은 벽돌 하나를 가져다가 바위에 갈기 시작했다. 이상히 여긴 마조가 "스님, 그것을 왜 가십니까?" "갈아서 거울 만들려고 하네." 그러자 마조는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스승은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을진대 좌선을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되려는가?"라 답하였다고 한다. 성품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것이 앉아서 참선하는 등의 일정한 형식에 있지 않다는 선종의 입장을 잘 볼 수 있다. 깨달음을 닦음의 결과로 보지 않는 이러한 입장은 깨달음이나 부처가 되는 것을 대상화하는 유위(有爲)의 수행으로는 결코 깨칠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튼 견성 성불은 언어나 문자를 통한 우회적 방법이 아니라 본래의 마음을 단도 직입적으로 보아 단번에 깨쳐서 부처가 된다는 선종 특유의 전통이다.
〔연구 동향〕 어떻게 깨치고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선종의 답변이 견성 성불이라 하였다. 그러나 선종이 중국에서 성립된 이래 이 주제에 대한 논의와 견해는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는 선종 내의 다양한 흐름과 가풍도 깨달음과 수행 등의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당(唐)의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1)이 지은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에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선종 내의 네 가지 견해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다른 견해나 논의는 성품을 보는 즉시 바로 부처가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집약될 수 있다. 즉, 깨달은 즉시 부처가 되는가 아니면 깨달은 다음에도 수행이 필요한가 두 가지이다. 앞의 입장을 돈오돈수(頓悟頓修), 뒤의 입장을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한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은 《수심결》(修心訣), 《법진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의 저술을 통하여 뛰어난 근기의 경우 깨달은 즉시 행(行)이 일치하여 더 닦을 것이 없는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돈오돈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스스로의 성품을 본(頓悟) 뒤에 깨달음과 삶을 일치시키는 닦음[漸修]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깨달음 뒤에는 수행, 곧 점수(漸修)가 필요한 이유로 그는 오랫동안 '나' 라는 생각으로 쌓여 온 습기(習氣)가 깨친 즉시 일시에 없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눌의 이러한 입장은 혜능의 제자인 신회(神會, 670~758)를 정점으로 하는 하택종(荷澤宗)과 종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하여 최근 퇴옹 이성철(退翁 李性徹, 1912~1993) 전 조계종 종정은 깨친 즉시 그대로 부처라는 돈오돈수를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본래의 성품을 깨치는 돈오(頓悟)는 잠재 의식 속에 있는 미세한 망념(妄念)까지도 멸했을 때 가능하며 따라서 깨치면 더 닦을 것이 없다고 한다.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그는 돈오돈수야말로 혜능 이래 마조, 대혜 (大慧), 임제(臨濟) 등으로 전해온 선종의 바른길이라고 한다.
〔영향 및 의의〕 선종의 '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 는 견성 성불의 종지는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몇 가지 사실들을 다시 확인하고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첫째, 깨달음과 성불은 불교의 처음이요 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과 성불을 향한 실천은 불교의 생명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둘째,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긍정이다. 성불은 특별한 사람이나 이룰 수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본래의 성품에 눈뜨면 바로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의 성품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자기 회복의 가장 직접적인 길이다. 진리는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면목을 여실히 알고 실현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자기 회복의 길은 자기 상실의 깊은 늪에서 허덕이는 현대인들에게 큰 설득력을 가질 것임에 틀림없다. 한국의 불교는 불교 내의 다양한 전통과 흐름을 포용하는 회통(會通)적 성격이 있다. 신라 말에 처음 들어온 이래 선불교는 이러한 한국 불교의 가장 중요한 전통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불교는 염불(念佛), 주력(呪力), 간경(看經), 참선(參禪) 등 깨달음을 향한 다양한 실천을 수용하고 있지만 견성 성불이야말로 불교를 참답게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높은 목표이다.
※ 참고문헌 지눌, 《普照全書》, 보조사상 연구원, 1989/ 성철, 《禪 門正路》, 해인총림, 1981/ 강건기 · 김호성 편, 《깨달음, 돈오점수인 가 돈오돈수인가》, 민족사, 1992/ 혜능, 《六祖壇經》, 정병조 역해, 한 국 불교 연구원, 1978/ 柳田聖山 저, 徐景洙, 李沅河역, 《禪思想》, 한 국 불교 연구원, 1979/ 吳經熊, 《禪學의 黃金時代》, 서돈각, (이남영 역, 삼일당, 1982)/ D.T. Suzuki, Essays in zon Buddhism, First Series, New York, Random House, 1961/ Philip B. Yampolsky, The Platfom Sutra of the Sixth Patriarch,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7. 〔姜健基〕
견성 성불 見性成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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