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영〕Republic of Bulg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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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남동부 발칸 반도 동쪽에 위치한 중앙 집권 공화제 · 단원제의 국가로 공식 명칭은 불가리아 공화국
(Republika Bǎlgarija). 북쪽은 다뉴브(Danube) 강을 중심으로 루마니아와 경계를 이루며, 그리고 서쪽은 유고슬라비아, 남쪽은 그리스와 터키, 동쪽은 흑해와 접해 있으며, 수도는 소피아(Sofia)이다. 면적은 110,994k㎡이고, 인구는 8,470,000명(1995)이며, 공용어는 불가리아어 국민 대다수가 불가리아 동방 교회를 믿고 있다.
이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500년경 트라키아인들이 정착하면서부터였다.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세워진 트라키아 왕국은 150여 년 동안 투쟁한 끝에 끝내 서기 초에 로마 제국에 흡수되고 말았고, 6세기 중엽부터는 농사를 짓는 슬라브족이 이 지역의 대부분에 정착하게 되었다. 7세기에 다뉴브 강을 넘어 남쪽의 슬라브족 공동체들을 예속시킨 불가르족이 681년경에 국가를 세웠고, 보고리스 1세(Bogoris Ⅰ, 853~865)황제는 864년에 동방 교회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1018년부터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185년에 독립을 되찾았으나, 14세기 후반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입을 받아 1396년에는 완전히 귀속당했다. 1877년경부터 시작된 '민족 부흥' 운동으로 주체 의식이 널리 확산된 가운데, 이듬해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불가리아는 독립 국가가 되었지만 1879년에 개최된 베를린 회의에서는 작은 자치 공국의 성립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885년에 동 루멜리아를 합병하고, 1908년에는 독립 왕국임을 선포하였다. 1912~1913년 발칸 전쟁에 가담하여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많은 영토를 잃은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측에 가담하였으며, 1944년에는 소련군의 침입을 받아 좌익 연합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1946년 군주제가 폐지되고 불가리아 공산당이 통치하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89년에는 동유럽에 몰아 닥친 민주화의 물결에 휩싸여 공산당이 사회당으로 개명하였다. 1990년 국회 의원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한 사회당은 겉으로는 다소 개혁 노선을 펼치는 듯하였으나 이전의 공산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1996년 11월 3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범야권 후보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변화가 예상되지만, 대통령과 집권당인 사회당과의 불화로 정치적 ·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 343년에 개최된 사르디아(Sardia, 현 소피아) 교회 회의로 불가리아에 전해진 그리스도교 는, 슬라브족이 이 지역에 들어오면서 거의 사라졌다가 865년에 보고리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의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현재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되었다. 보고리스 1세는 개종 이후 비잔틴 황제와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총대주교좌를 설립하려 하였으나,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포시우스(Photius)가 거절하였다. 이에 보고리스 1세는 866년에 로마에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는 불가리아에 교황 대사로 포르모소(Fommosus) 주교를 파견하는 동시에 훗날 불가리아에 대주교좌를 설립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해결책에 불만을 품은 보고리스 1세는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870)에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비잔틴의 주교들은 교황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하에 두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9세기 들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 주요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의 관할하에 비잔틴 전례를 따르는 동방 교회 국가가 되었다.
동방 교회 : 보고리스 1세의 아들 시메온은 불가리아의 대주교를 총대주교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929년에 시메온이 사망한 후에야 프레슬라프(Preslav)에 있는 불가리아 총대주교좌를 인정하였다. 1018년부터 불가리아는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동방 교회를 따르게 되었다. 1235년에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 이반 아센 2세는 트르노보(Trnovo)에 불가리아 총대주교좌를 부활시켰으나, 오스만 투르크족이 이도시를 함락하고 총대주교를 추방함으로써 총대주교좌는 없어졌고, 그 후 400년이 넘도록 이들의 지배를 받는 동안 불가리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파견한 사제를 통해 사목되었다. 1767년에는 많은 불가리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로마 교회와의 재일치를 원하면서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벗어나기로 결의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870년에 불가리아 총대주교좌가 설립되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불가리아 교회를 파문하였으나, 1945년에 이를 인정하였다. 19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허락 없이 불가리아 교회가 세 번째 총대주교좌를 설립하자 또다시 파문이 일어났으나, 1961년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인정하였다.
가톨릭 교회 : 17세기에 프란치스코 수도회 선교사들에 의해 개종하는 이들이 생기면서, 다른 수도회와 선교회의 활동에 의해서도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1758년에 소피아와 플로브디프(Plovdiv)에 대목구가 설정되었고, 1789년에는 니코폴리(Nikopoli) 교구가 설립되었으며 1859~1860년에는 일부 불가리아의 동방 교회 신자들이 로마 교회와 일치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1861년에는 불가리아인으로는 최초로 소콜스키(Joseph Sokolski)가 로마에서 교황 비오 9세(1846~1878)에 의해 대주교로 서품되었으나, 곧 러시아인에게 납치되어 18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불가리아의 가톨릭 교회는 8만 명의 신자를 확보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1872년에는 6만여 명의 신자들이 동방 교회로 돌아가면서 점차 로마 가톨릭 신자수가 감소했다. 1947년 이래로 새로운 공화국 헌법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선언하였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로 희생되었고, 1948년에는 가톨릭 학교와 기관들이 폐쇄되고 외국인 수도자들이 추방되었다. 이듬해에는 교황사절이 추방당한 데 이어 1952년에는 플로브디프의 대목구장인 로마노프(Ivan Romanoff)가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보실코프(Eugene Bosilkoff) 주교도 같은 해에 감옥에서 사망하였는데, 그의 사망은 불가리아 정부가 1975년에 교황청에 알리기 전까지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었다. 불가리아의 모든 교회 활동은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으며, 사목 활동도 엄격히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 전례와 불가리아 전례의 대목구장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1975년 불가리아와 바티칸의 관계가 다소 개선되어 그 해 6월 19일에 불가리아의 대통령이 교황 바오로 6세를 방문하였고, 이어 7월 말에 개최된 헬싱키(Helsinki) 회담을 통해 교황청과 불가리아 대표자들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1979년에 소피아-플로브디프 대목구가 교구로 승격되었고, 공석이었던 니코폴리 교구에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1990년에는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가 정식적으로 설정되었다. 1995년 현재 총 인구의 0.9%인 80,000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고, 교구 2, 동방 전례 대리구 1, 본당 52개에, 주교 2, 사제 35(교구 소속 9, 수도회 소속 26), 신학생 22, 수사 8, 수녀 60명이 있다.
(→ 니콜라오 1세)
※ 참고문헌  M. Lacko, (NCE》 2, pp. 862~865/ 《EU》 3, p. 637/ 《EU》 Les Chiffres du Monde, p. 144/ Petit Robert Dictionnaire Universel des Noms Propres 2, Paris, 1988, pp. 297~298/ 1996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1994.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