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경제학자. 철학자. 신학자. 러시아 정교회 사제. 교회 일치 운동에 있어서 동방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20세기 러시아의 종교 철학적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지혜론'(sophiology)이라는 신학을 개 발하였다.
〔생 애〕 1871년 7월 16일 중앙 러시아 오룔(Oryol)지역의 리브니(Livny)에서 아버지가 대사제인 종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리브니의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학교를 그만두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재입학한 불가코프는, 1889년에 그곳을 졸업하고 2년 후 모스크바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졸업 이듬해인 1895년부터 모스크바 기술 학교에서 정치 경제학을 가르치던 그는, 2년 후에는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1898년 1월 엘레나 이마노프나 토크마코바와 결혼한 후 베를린, 파리, 런던 등지에서 공부하였으며, 1901년 석사 학위를 받고 약 6년 동안 키예프 대학교와 키예프 정치 대학원에서 정식 교수로 재직했다. 1906년에 모스크바 상업 대학교의 정치 경제학 교수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플로렌스키(P. Florensky), 베르댜예프(N.A. Berdyajev, 1874~1948)와 친분을 맺기도 한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1912년에 논문 <경제의 철학>(Filosofia Khoziaistva)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7년에는 모스크바 대학교 정치 경제학 교수가 되었는데, 이 당시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환멸을 느껴 철학자 베르댜예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로 돌아와 그 해 6월 10일 부제 서품을 받고 다음날 사제로 서품되었다. 1918년에는 모스크바 최고 학문 연구 기관들이 그를 전(全) 러시아 정교회 교회 회의의 대표로 선출하였고, 이 회의에서 그는 최고 교회 회의 위원이 되었다. 이듬해에 크리스메아로 옮긴 그는 심페로폴(Simferopol) 대학교에서 정치 경제학 및 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가 된 불가코프를 볼세비키 정부는 대학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3년 1월에는 러시아에서 추방하였다. 처음에 프라하로 갔다가 다시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로 가 그곳의 러시아 법학부에서 교회법과 신학을 가르친 불가코프는, 1925년부터는 파리에 정착하였는데, 에브로지(Evlogij) 주교는 그를 파리의 러시아 정교회 신학원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신학원 최초의 교수이자 첫 번째 학
과장이었던 불가코프는,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신학을 가르쳤는데, 이 기간 동안 그의 명성은 영국과 미국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또한 그는 러시아 그리스도교 학생운동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교회, 영국 성공회, 그리고 교회 일치 운동의 대표들과도 접촉하였다. 1936년에 미국을 방문한 불가코프는 많은 장로교 회의에 참여하여 강의하였고, 1938년에는 그리스에서 개최된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들의 첫 학술 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인후암으로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인생의 마지막 5년 동안 가장 큰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인한 의지로 강의와 종교 봉사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신학 협회는 1943년에 경의의 표시로 교회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1944년 7월 12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파리 근교의 묘지(St. Genevieve-des-Bois)에 묻혔다.
〔저 서〕 불가코프의 저술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저술 시기는 불가코프가 석사 과정 중인 때로, 그는 석사 논문 <자본주의와 농업>(Kapialalism i zemledelie, St. Petersburg, 1900)을 통해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이 더 이상 농촌의 발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그는 칸트 철학과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 저술 시기는 모스크바의 잡지 가운데 하나인 《철학과 심리학의 문제들》(Voprosy filosofi i psikhologii)에 많은 논문을 기고하였던 때이다. 그 후 몇몇 학자들과 함 께 《관념주의의 문제》(Problumy idealizma, Moscow, 1902) 에세이 모음집,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서 관념주의로》 (Ot marksizma k idealizmu, St. Petersbug, 1903)를 간행하였는 데, 이러한 작품들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관념론들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불가코프는 전 자가 후자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칸트는 항상 마르 크스보다 명백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사상은 칸트의 사상으로 점검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관념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흐름은 불가코프를 전통적 인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정교(政敎)에 대한 보다 혁명적인 저술은 《두 도시들》 (Dva grada, Moscow, 1911)이다. 그는 박사 학위 논문 <경제의 철학>에서 그의 사회 철학을 체계화하였는데, 경제적 기능을 전세계의 생활 환경에서 연구하면서 반증된 마르크스주의와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결론들을 분석하였다. 《시들지 않는 빛》(Svet nevechernyi, Moscow, 1917)에서는 종교 철학 · 부정 신학 · 존재론 · 우주론 · 인간학 · 역사 · 문화 철학 등을 언급하였고, 《고요한 묵상들》(Tikhie dumy, Moscow, 1918)에는 레온툐프,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 슈미트, 솔로비예프, 고룹키나, 피카소에 대한 비판적 논술과 종교 철학 논문들을 수록하였다. 시민전쟁 시기에는 《현대의 대화들》(Contemporary dialogues)과 《신들의 축제》(Na piru bogov, Sofia, 1921)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러시아 혁명의 의미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와 비교되는 다양한 시각들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철학의 비극》(Tragediia filosofii)에서는 칸트적 내재주의에 대하여 논박하였다. 그리고 《이름의 철학》(Filosofiia imeni, Paris, 1953)에서는 인식론 체계로 인도하면서 단어로 표현된 사상의 본질을 시도하고 철학과 언어학을 조합하였다.
세 번째 저술 시기는 볼세비키 체제하의 모스크바에서 1918년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불가코프가 사제 서품을 받아 신학적 저술이 두드러진 시기였지만, 그의 신학 작품 대부분은 파리에서 저술 · 편찬되었다. 즉 동정녀 마리아, 세례자 요한 그리고 천사들에 관한 책과 《타오르는 덤불》(Kupina neopalimaia, Paris, 1927), 《신랑의 친구》(Drug zhenikha, Paris, 1928), 《야곱의 사다리》(Lesnitsa Yakovlia, 1929)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또한, 그의 대논문은 "하느님-인간"(O Begochelovecheste)이라는 표제하에 《하느님의 어린 양》(Agnets Bozhii, Paris, 1945)과 《위로자》(Uteshitel, Paris, 1936), 그리고 《어린 양의 신부》(Nevesta agntsa, Paris, 1945)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단행본 신학서로 《성체 성혈 성사 교의》(1930) 《정교회》(L'Orthodoxie, 1932), 《교계 제도와 성사들》(1935), 《하느님의 지혜》(The Wisdom of God), 《마르크스주의에서 지혜론까지》(From Marxism to Sophiology) , 《그리스도교 인간학》(Die Christliche Anthropologie)을 저술하였다. 《교회에 대한 논제》(Thesen über die Kirche)는 불가코프에게 인후암이 발병한 1939년에 저술되었고, 유작으로는 《요한 묵시록》(Apokalipsis Ioanna, Paris, 1948), 《자서전》(Artobio-grafichekie zametki, Paris, 1946),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1961) 등이 있다.
〔사 상〕 20세기 최고의 동방 교회 신학자로 인정받는 불가코프는, 자신의 철학 · 신학적 체계 내에 모든 것을 지혜(sophia) 안에 모으는 '지혜론' 을 제시하였다. 그는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시각이 존재 또는 선과 진리, 자유, 은총, 의화 개념 등으로 표현된 반면, 동방의 시각은 오직 지혜 개념으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불가코프는 이러한 관점에서 중심 주제들을 사용하였다. 첫째로 역사 안에서의 지혜 개념은 동방 교회와 신학에서 매우 깊고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신학에서 이 개념은 오리제네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례에서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예배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하여 거룩한 지혜(haghia sophia)로 불리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전'이 건축되었다. 러시아에서도 지혜에 대한 예배는 항상 생명력이 있었다. 두 번째 이론적 질서 안에서의 지혜 개념은 오늘날 더욱 넓은 세계에 대한 오해와 거짓 개념들을 극복하는 데 필요하다. 창조물들의 적은 마니교(Mani-chaeismus)와 영성적 종교적 근본에서 세상을 분리시키는 세속주의이다.
이 대조 개념들은 지혜론 안에서 극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혜는 하느님 안에 무한의 모습으로, 그리고 인간의 세상에 유한의 모습으로 세상 어느 곳에 현존하며, 모든 것들 사이를 밀접하게 연결하는 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혜는 최초의 힘이며, 모든 운동들을 성숙하게 하며, 도와 주는 근본적인 힘이며 우주를 변모하게 한다. 지혜는 하늘에도 땅에도 있다. 지혜는 땅 위에서 휘어진 하늘의 대회전이다.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이 있다. 지혜 안에 같은 신성이 살고, 지혜는 세상 위에 신적인 지혜이다. 지혜는 우주적 · 절대적 신전이다. 지혜는 보편적 교회, 보편적 인간성에 속해 있다. 지혜는 교회의 보편 미래에 속해 있다" 라고 불가코프는 주장하였다.
불가코프는 교회 일치의 정신으로 화해(Sobornost, 친교, 연대감, 형제적 일치)를 제시하였다. 그는 교향악과 같 은 조화를 통해 교회들 사이의 일치를 전망하였고, 참된 종교는 권위주의와 해방된 개인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동방 교회는 교향악적 일치, 찬동, 신성의 시간에 대한 충만한 힘에서 모든 이가 형제로서 모두 함께 살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러시아 정교회의 모스크바 총대주교와 소련 밖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를 대표하는 유고슬라비아 카를로브스키(Karlovskii)의 교회 회의는 1935년에 공식적으로 불가코프의 지혜론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불가코프의 신학적 관점을 수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신학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제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동방 교회 신학자들도 불가코프가 정리한 지혜론에서 동방 교회와의 깊은 일치와 이해를 인정하였다. 특히 감동을 자아내는 동방 교회의 전례, 그리고 반감보다는 자연적 성격 안에서 그의 신학은 구소련의 붕괴와 러시아 교회의 새로운 시작 안에서 발전하고 있다. 사실 동방 교부들과 사상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 불가코프는 동방 교회 신학의 선구자들인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와 오리제네스의 먼 상속인이라 할 수 있다. (→ 러시아 ; 지혜)
※ 참고문헌 Wieczynski, The Modern Encyclopedia of Russian and Soviet History, Academic International Press, 1977, pp. 6~10/ J. Papin, 《NCE》 2, p. 862/ S.S. Harakas, 《ER》 2, pp. 563~564/ C. Lialine, Le debat sophiologique, Irenikin, 1936, pp. 168~205/ G. Lo Verde, La filosofia della Trirutà in S.B., Logos, 1938, pp. 414~425/ B. Mondin, I grandi teologi del secolo 20, vol. 2, Borla, 1969, pp. 273~290/ P. Coda, Una introduzione storica e metodologica alla cristologia di S.G., Lateranum, 1989, pp. 435~469/ 곽승룡, 《아름다움의 사랑》, 만남출판사, 1997/ 一, <동방교회의 공동체관>, 《사목》 218호(1997. 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38~69. 〔郭承龍〕
불가코프,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1871~1944)
Bulgakov, Sergei Nikolae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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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