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 종교학에서의 불교
Ⅱ . 가톨릭에서 본 불교
석가모니(釋迦牟尼, Sākyamuni)를 교조(敎祖)로 하고 그가 말씀한 교법(敎法)을 신봉하는 종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법(法)이라고 하여 '불법' (佛法),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뜻에서 '불도' (佛道)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는 석가모니가 탄생한 기원전 5세기부터 현재까지 약2,500년 동안 인도와 동북 아시아, 그리고 동남 아시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여 왔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할 때,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적 특성에 맞추어 그 내용을 달리하는 응병 시약적(應病施藥的)인 교화 방법을 사용하였다. 불교의 교리가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서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Ⅰ . 종교학에서의 불교 〔인도 불교〕 불교가 일어날 당시의 인도 종교계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근거를 둔 브라만교(Brahmanism)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가 전생의 업(業)에 의하여 지배되며, 현재의 행위가 내세의 고락(苦樂)을 결정한다는 윤회 사상(輪廻思想)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모든 사상가나 종교가들의 목적은 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즉 윤회로부터의 해탈이었다. 업, 윤회, 그리고 해탈 사상은 후대 인도 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것인데, 불교는 이러한 종교적 토양에서 자라나 새로운 종교 사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기원전 500년경 인도 석가족의 카필라국에서 태어난 석가모니의 어릴 적 이름은 싯달타(悉達多, Siddhār-tha)이다. 그는 29세가 되던 해 출가하여 전통에 따라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을 수행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가 부다가야(Buddha 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7일 간의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후 싯달타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인 부처(佛陀, Buddha)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 베나레스(Benares)의 녹야원으로 간 부처는, 그곳에 있던 5명의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펴 교화시키고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것을 초전 법률(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불교는 교조와 교리(敎理) 그리고 교단을 갖춘 하나의 종교로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부파 불교 이전까지의 시기를 원시 불교 시대라고 한다.
원시 불교 시대 : 원시 불교의 중심 교리는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 연기(緣起) 중도(中道) 이렇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사성제' 는 미혹한 인간 존재의 고통스러운 모습과 중생들이 지향해야 할 이상을 설명한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의미한다. 즉 첫째는 고(苦)를, 둘째는 고의 근원을, 셋째는 고에서 해탈함을, 넷째는 고에서 해탈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방법, 즉 도제(道諦)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 여덟 가지를 '팔정도' 라고 한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벽〔正精進〕, 바른 신념〔正念〕, 바른 명상〔正定〕 등이다. 이러한 팔정도는 또한 '중도'이기도 하다. 출가 수행 당시의 극단적인 고행 역시 태자 시절의 쾌락처럼 진리를 깨닫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안 싯달타는, 두 극단을 지양하는 것으로부터 진리를 깨달았는데, 그는 이것을 중도라고 불렀다. 여기서 중도란 단순히 양극단의 중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초월한 새롭고 올바른 길을 말한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부처가 깨우침을 얻은 뒤 제일 처음 설한 초전 법륜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초전 법륜의 내용은 불교 교리의 가장 기본적인 골자를 이루고 있다. '연기' 란 모든 존재의 실상을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모든 존재나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하는 것으로, 독립하여 자존하는 것은 없으며 조건이나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것이다.
석가는 이러한 근본 교리를 중심으로 45년 동안 교화 활동을 하며 승단을 이끌다가 80세 때인 기원전 543년에 열반에 들었다. 그 후 승단은 마하가섭(摩訶迦葉) 등이 중심이 되어 석가가 제정한 계율(戒律)과 교법(敎法)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때 제자들은 불교의 교법을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것을 '제1 결집' 이라고 한다. 500명의 비구(比丘)들이 왕사성에 모여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바리(優波離)가 율(律)을, 아난(阿難)이 법(法)을 암송하여 불설을 경전으로 만든 것이다. 그 뒤 불교는 마가다국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도시의 왕후와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면서 각지로 전파되었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소카 왕이 즉위한 뒤 불교는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카슈미르, 간다라 지방을 비롯한 인도의 각 지역과 박트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스리랑카, 버마 등 국외로까지 전파되었다.
부파 불교 시대 : 불교의 급속한 팽창과 유통은 교단 자체의 질서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고, 교파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100년경에는 바이살리에서 비구의 10사(十事)를 두고 합법(合法)임을 주장하는 진보적 자유파와 이를 반대하는 전통적 보수파가 대립하여 두 개의 부파를 낳게 되었다. 전자를 대중부(大衆部)라고 하고 후자를 상좌부(上座部)라고 한다.
부파가 발생한 원인은 부처의 교설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교단 질서 확립에 대한 의견 차이에 있었다. 비법(非法)이라고 주장한 측은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2 결집' 이다. 이때 상좌부는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길은 감각적 욕망의 근원을 끊기 위해 엄격히 계율을 지키는 출가자의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고, 그 목표는 마음과 육체의 안정을 얻어 최고성자인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부처도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의 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중부에서는 중생도 본질적으로는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중생과 부처는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윤회가 그대로 열반이라는 이론을 전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부파는 계속 분열되어 서기 초를 전후해서는 각각 18개, 또는 20개 정도의 부파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분열은 계율 해석이라는 학술상의 차이에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학설보다 지도자인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 체계를 달리하였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서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많았다. 대표적인 부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독자부(犢子部), 설산부(雪山部), 화지부(化地部), , 음광부(飮光部), 경량부(經量部)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부파의 전개로 불교는 외적으로는 확대되었지만, 부처 당시의 순수함이나 참신함은 잃게 되었다. 불교는 율(律)과 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을 중심으로 하는 아비달마(論藏) 불교로 전개되었다. 또한 승원 중심 · 출가 중심의 학문 불교로 변화하여 대중성을 잃었고, 일부에서는 미신적 신앙과 접목되어 석가 당시의 탄력성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이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와 재가 불교도의 주동으로 일어났는데, 이것이 대승 불교 운동(大乘佛教運動)이다.
대승 불교의 흥기 : 대승 불교가 흥기한 것은 대략 기원전 1세기경이지만, 그 태동은 훨씬 이전부터이다. 이들은 그 이전의 불교를 소승 불교(小乘佛教)라고 하여 자신들과 구분하였다. 그러나 대승 불교로 인하여 소승 불교가 곧 쇠퇴하여 몰락해 버린 것은 아니고, 이 둘은 각자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로서 발전하였다. 대승 불교는 수행관에 있어서 소승 불교와는 달리 대중의 구원이 우선임을 주장하였고,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소승의 최고 성자 아라한 대신에 보살(菩薩)이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새로이 제시하였다. 또한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부처 대신에 미래의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조직적으로 종합되면서 새로운 대승 경전이 만들어졌다. 대략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세기 사이에 수많은 대승 경전들이 출현하였는데, 초기 대승 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반야경》, 《법화경》, 《유마경》, 《아미타경》, 《십지경》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담긴 공(空) 사상, 즉 중관(中觀) 사상은 대승 불교의 기본 교리이며, 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그 뒤 공 사상을 확립한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로서 그의 《중론송》은 부파 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 이후에는 여래장 사상(如來藏思想)을 천명한 《승만경》, 《해심밀경》, 《능가경》 등이 나타나며,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은 270~480년 사이에 미륵(彌勒), 무착(無着), 세친(世親)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용수의 공 사상과 함께 불교 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공 사상과 유식 사상은 세친 이후 2대 학파를 형성하였고, 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두 학파는 인도 대승 불교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불교 사상이 가장 완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으며, 나란다 사원과 발라비 사원이 불교 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밀교의 성립과 인도 불교의 쇠퇴 : 7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는 새로운 불교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것이 밀교(密敎)이다. 7세기 중엽에 《대일경》, 《금강정경》과 같은 문헌이 등장함으로써 밀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밀교가 발생한 이유는 대체로 세친 이후 대승 불교가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경향으로 흘러 일반 대중과 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아비달마 불교가 빠진 것과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인도에 탄트라 문학이 유행하게 됨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중관 사상이 밀교화되었으며, 밀교는 힌두교 사회에서 환영을 받아 급속히 보급되었다. 8세기 후반에 와서는 밀교가 대중화됨에 따라 저급한 의례를 도입하기까지 하였다. 밀교의 대중화는 또 다른 하나의 불교 유파인 금강승(金剛乘)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인드라 브후티(Indrabhūti)였다. 그의 아들 연화생(蓮華生)은 밀교를 티베트로 전하였고, 이때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인도에서 티베트로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불교를 전파하였다.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라마교로 발전하여 티베트 고유의 종교로 정착하였다. 금강승 불교는 팔라 왕조(750~1199)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 지방과 서벵골 지방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나, 이 당시의 불교는 힌두교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어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이유는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질을 일으켜 미륵불(彌勒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 薩), 대일여래(大日如來) 같은 불보살들이 힌두교의 제신과 거의 동일한 성격과 기능을 갖게 되어 자체의 특성 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10세기 말에 아프가니스탄 지방에 있던 터키계의 가즈니 왕조는 1001~ 1027년 사이에 17회나 북인도를 침략하여 많은 노예와 전리품을 약탈해 갔다. 이때 점령지를 오래 지배하지는 않았으나, 불교와 힌두교의 사원이나 성지에 대한 파괴와 약탈 및 승려의 학살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철저하였다. 1203년 비쿠라마실라 사원의 파괴와 더불어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오히려 중국 · 한국 · 일본 등에 전해져 흥왕(興旺)을 보았다.
〔중국 불교] 불교의 전래와 역경 사업 :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있다. 다소 전설적이지만 《위략》(魏略)의 서융전(西戎傳)에 나타나는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년에 대월지왕(大月氏王)의 사자 이존(伊存)이 불교를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65년에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이복 동생 초왕영(楚王英)이 황로(黃老)와 함께 불교를 믿었다고 한다. 이 같은 기록에서 불교는 기원을 전후하여 실크 로드의 무역로를 따라 중국의 북쪽 황하 유역에 전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북부 지역인 낙양과 장안에 처음 전래되었던 불교는 그 뒤 역경승 지겸(支謙)과 월남에서 북상한 강승회(康僧會)에 의하여 남부 중국까지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 무렵 중국의 일반 사상계에는 노장 사상(老莊思想)이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중국인들은 불교를 노장 사상에 의하여 이해하려는 풍조가 현저하였다. 이를 격의 불교(格義佛敎)라고 하는데, 불교의 공(空)을 노장 사상의 무(無)와 대비하여 설명 · 해석하려는 경향이 그 특징이다. 이는 불교가 중국에 정착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중국 사대부층이 불교에 접근하는 길을 터놓은 것이기도 하였다. 또 불교의 윤회 사상이 도입되어 전생(前生) · 현생(現生) · 내생(來生)에 대한 인과응보 개념이 중국인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때였다. 중국 불교의 역경사(譯經史)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인물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다. 중앙 아시아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소승 불교를 공부하였던 그는 《대품반야경》, 《금강반야경》, 《묘법연화경》, 《유마경》, 《아미타경》 등의 대승 경전과 용수의 《중론》, 《십이문론》 등 중관학파의 논서들을 번역하였다. 특히 중관 사상은 그의 한역을 근거로 중국에서 연구되기 시작하였으며, 그가 번역한 《중론》, 《십이문론》은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전개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그 후 인도 불교의 주요 경론들이 계속 번역되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불타발타라의 《화엄경》, 담무참(曇無讖)의 《열반경》, 보리류지의 《십지경론》(十地經論), 진제삼장(眞諦三藏)의 《섭대승론》과 《대승기신론》 번역은 각각 중국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육조 시대의 불교 : 이 시기의 불교의 특색은 육조 문화의 일반적인 특색과 마찬가지로 귀족적 · 고답적 · 학술적이었으므로 북조(北朝)의 국가적 · 주술적 · 실천적인 불교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육조 시대의 불교는 전반적으로 지배자들의 보호를 받아 정치에 참여하는 승려도 많았고, 북조에서 있었던 폐불(廢佛) 사건도 없었으며, 왕후나 귀족에 의해 웅대한 사원이 건립되었고, 불교의 연구 시대라고 할 만큼 경전의 연구와 강설이 왕성하였다.
역경 사업도 육조 시대에 가장 성행하였다. 이 시기는 아직도 인도의 불교 문헌들이 소개되던 역경기로서, 인도 불교의 주요 경전들이 번역될 때마다 그 문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주석적 학파들이 성립하였다. 《열반경》을 연구하는 열반종(涅槃宗), 《십지경론》을 연구하는 지론종(地論宗), 《섭대승론》을 집중 연구하는 섭론종(攝論宗), 중관학파의 논서인 《중론》, 《십이문론》, 《백론》을 연구하는 삼론종(三論宗), 《능가경》의 연구를 주로 하는 능가종(愣伽宗) 등의 종파가 성립되었고, 《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의 연구를 기초로 한 중국 정토 신앙의 전통도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수 · 당나라의 불교 :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중국 불교가 새롭게 전개된 시기였으며, 우리 나라의 불교에도 가장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남북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통일 국가에 맞는 새로운 불교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래서 특정의 경전에 입각한 새로운 조직화가 진행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특색이 종파 불교이다. 수 · 당 이전에도 여러 종파가 있기는 하였지만,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 학파라고 불러야 할 것이고 후대에 생겨난 종파와는 다른 것이었다. 학파로부터 종파로의 발전을 촉진한 계기가 된 것은 사원 경제의 독립과 교판(敎判)의 확립이다. 수나라의 지의(智顗)는 《법화경》을 중심으로 교판을 세워 천태종을 만들었고, 당나라의 법장(法藏)은 《화엄경》을 중심으로 화엄종을, 도선(道宣)은 계율 중심의 율종을, 현장(玄奬)과 규기(窺基)는 유가 유식설(瑜伽唯識說)을 기초로 법상종(法相宗)을 세웠다. 또한 선무외(善無畏) 등이 들여온 밀교의 융성도 간과할 수 없다.
천태종과 화엄종이 수 · 당 불교의 사상적 절정이라고 한다면, 선종(禪宗)과 정토교(淨土敎)는 불교의 민중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선은 인도에서 기원된 것이지만, 중국에 전해지면서 새로운 발전을 이루어 유력한 종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선종은 조사인 보리달마(菩提達摩) 이후로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에게로 차례로 전해졌다. 선종은 5조 홍인의 시기에 귀의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6조 혜능은 그 당시까지 없었던 도시에 대한 포교를 중요시하였다. 홍인으로부터 갈라지게 된 혜능의 계통은 남종선(南宗禪)이라 불렸고, 신수(神秀)의 계통은 북종선(北宗禪)이라 불렸는데, 북종선은 점오(漸悟)를, 남종선은 돈오(頓悟)를 표방하였다. 이 두 파는 처음에는 대등한 교세를 유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북종은 쇠퇴하고 말았다. 특히 혜능 이후 5대에 걸쳐 위앙(潙仰), 임제(臨濟), 조동(曹洞), 운문(雲門), 법안(法眼) 등의 5가(五家)가 성립됨으로써, 송대 이후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은 6조 혜능의 남종선을 이어받아 신라 말에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성립되었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5가 중 임제종의 선을 이어받아 현재의 조계종(曹溪宗)에까지 그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정토교는 담란(曇鸞) 이후에 도작(道綽)과 선도(善道)가 나와 구칭 염불(口稱念佛)을 보급함으로써 무지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신자들을 얻었다. 845년에 폐불과 연속된 전란으로 불교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한 선종과 민중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 정토교는 그 세력을 더하여 갔다. 수 · 당의 불교는 중국 불교 융성의 정점에 위치한다. 송나라의 불교 : 송나라의 불교는 염불선(念佛禪), 송학(宋學)과 선의 교류, 거사 불교의 성립, 백련교(白蓮敎) 등으로 집약된다. 당나라 중기에 일어난 교선 일치(教禪一致) 운동은 송나라 때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지게되었다. 연수(延壽)의 교선 일치설이 확립되자 천태종 · 화엄종 · 정토종의 학도로서 선을 연구하거나, 선가(禪家)에서 교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출현하였다. 그리고 정토종은 특별한 하나의 종파로서보다는 이들 각 종파의 사람들이 염불 신앙을 가지게 됨으로써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선불교는 당나라 중엽부터 송나라 초에 이르기까지 중국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켰으며, 송학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유학자로서 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은 주돈이(周敦頤), , 장재(張載), 정이(程頤), 주자(朱子) 등이 있다. 선이 당시의 이름있는 유학자를 사로잡게 된 이유는 간단 명료한 교리에 의거한 적절한 수행 방법으로 지심견성(指心見性)을 터득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송나라 이후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도 중국 불교는 삼종 일원(三宗一源), 민간 불교 등의 독특한 성격을 띠면서 발달하였다. 인도의 불교가 원류로서 한국 불교의 뿌리를 점한 것이라면 중국 불교는 각 시대마다 한국 불교가 새로운 옷을 입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고려 말까지 중국 불교의 큰 특색은 한국에 수용되고 변형되어 새로운 물결을 조성하였다.
〔한국 불교〕 한국의 불교는 인도나 중국 불교의 단순한 연장이나 퇴화가 아니다. 삼국 시대에 육로나 해상을 통하여 만주나 한반도 등 우리 민족 문화권으로 불교가 흘러 들어온 뒤 우리 나라의 지역과 풍토 및 민족성 안에서 독특하게 전개되었다.
삼국의 불교 : 삼국 중에서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이다. 고구려의 불교는 372년(소수림왕 2년)에 전진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함으로써 시작되었고, 백제의 불교는 384년(침류왕 1년)에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 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 수도인 광주(廣州)의 남한산으로 들어옴으로써 시작되었다. 반면에 신라의 불교 수용은 가장 험난하였다. 신라 눌지왕 때 이미 불교가 들어왔으나, 국가적 공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신라 왕실은 불교의 공인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씨족 중심적 귀족 세력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527년에 법흥왕은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排佛派)들을 제압하고 불교 공인을 선포하였다.
불교 수용 후 불교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활용하였던 것은 신라였다. 진흥왕은 554년에 흥륜사(興輪寺)의 낙성과 더불어 백성들의 출가를 허용하였으며, 말년에는 스스로 출가하여 호를 법운(法雲)이라고 하였다. 그 후 왕비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미륵 사상과 전륜성왕(轉輪聖王)사상을 근거로 국선(國仙)과 화랑도(花郞徒)를 창설하여 삼국 통일의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진흥왕의 뒤를 이은 역대의 모든 왕들도 그를 본받아 불교를 진흥시켜서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신라 불교를 꽃피게 하였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삼국은 현세 구복적인 관심 속에서 불교를 받아들였기에, 깊은 교리적 이해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승려들이 인도나 중국에 유학하여 중요한 경전들을 배우고 돌아오거나, 또는 중국에서 명성을 떨치거나 일본에 불교를 전해 주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 활약한 고구려의 승려로는 승랑(僧朗), 혜편(惠便) 혜자(惠慈), 승륭(僧隆), 담징(曇徵) 등이 있다. 백제의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 주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총(惠聰)은 고구려의 승려 혜자와 함께 일본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다. 신라에는 세속 오계(世俗五戒)를 설하여 불교의 국가적 적응성을 확인시켜 준 원광(圓光)과, 중국에 유학하고 귀국한 후 신라 불교를 정비하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자장(慈藏)이 있었다. 한편 이 시대에는 일반 대중의 생활속에 뛰어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를 골고루 전파한 선각자적인 고승들도 많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혜숙(惠宿), 혜공(惠空), 대안(大安) 등이다.
통일 신라의 불교 : 민족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여 통일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불교 역시 안정된 환경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문화까지 합쳐 내면적인 심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는 훌륭한 고승들의 끊임없는 교화 활동과 교학적인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다. 특히 원효는 한국 불교 최고의 고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한국의 불교를 정리하여 사상적으로 토착화시킨 이론의 대가이자 불교 정신을 실천적으로 발휘한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일찍이 중국으로 구법(求法)할 뜻을 품고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길을 떠났다가 중도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있어 신라로 되돌아온 그는, 불교의 참뜻을 알리고 불교의 혜택을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전하기 위해 교화를 위한 실천의 길에 나섰다. 그는 당시 신라 사회의 잘못을 지적하여 올바른 진로를 제시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의 영원한 실상(實相)의 의미를 깨닫도록 깊은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시해 준 고승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뜻은 85종 18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저술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현재 그 가운데 20여 종이 남아 있다. 의상은 661년 (문무왕 1년)에 당나라 화엄종의 대가인 지엄에게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곳에서 화엄을 가르쳐 크게 이름을 떨쳤다. 671년에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화엄을 널리 펴기 위하여 태백산에 부석사를 짓고 대중을 교화함으로써 해동 화엄(海東華嚴)의 초조(初祖)가 되었으며, 대표적인 저술로 《화임일승법계도》(華嚴一乘乘法圖)가 전해진다.
8세기 후반과 9세기에 걸쳐서 신라의 불교는 침체에 v빠져 들었다. 이 시기에 불교가 침체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 사회적 혼란에 있다. 통일 이후 민족 대통합과 민족 문화 창조의 저력을 보였던 신라는 혜공왕대에 이르러 왕위 쟁탈전이 잦아지면서 정치는 안정을 잃었고, 이에 따라 불교도 그 활기를 잃어 갔다. 이 시기의 불교는 그 순수성이 퇴색하고 주술적 신앙과 어우러져, 불교인지 무속인지 모를 정도로 혼탁해져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무렵 중국 불교계로부터 선불교가 신라에 전해지면서 신라의 불교는 다시 한번 생기를 띠게 되었다. 선이 신라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남종선을 중국의 지장으로부터 전해 받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821년과 826년에 각각 귀국한 후의 일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 남종선을 전수받은 유학승들이 귀국하여 선찰(禪剎)을 세웠고, 선종 선포의 거점을 형성하였다. 지방 호족들의 비호 속에 주로 지방에 자리잡았던 그들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에 걸쳐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하였다. 선불교는 교종의 전통적인 권위에 대하여 반성을 가하는 동시에,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고 방식에 맞설 만한 새로운 체질을 만드는 데 힘쓰면서 중세적인 지성으로서의 위치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을 강조하는 그들의 선풍(禪風)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교학적 종파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선(禪)과 교(敎)의 갈등은 한국 불교의 새로운 문제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의 불교 :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불교를 숭상하여 국가적으로 보호하고 크게 장려하였다. 그는 풍수 지리설(風水地說)에 입각하여 많은 사찰을 세우거나 지원하였으며, '선'과 '교'를 모두 보호하였다. 태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인 943년에, <훈요 십조> (訓要十條)를 남겨 다음 왕들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였는데, 제1조에서는 불법을 신봉하고 불사를 일으킬 것을 강조하였고, 제2조에서는 도선이 정한 곳 외에는 함부로 사찰을 짓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왕조는 집권 초부터 불교를 중시하여 외면상 불교 국가를 형성하였고 불교 전성 시대를 이루었지만, 고려인들이 부처에게 복을 비는 타력 신앙(他力信仰)과 지리 도참 신앙(地理圖讖信仰) 쪽으로 치우치게 된 것은 태조에게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4대 광종은 958년에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승과(僧科)를 신설하였는데, 승려들에게 주어졌던 최고의 직책은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였다. 이와 같이 왕실과 귀족들의 물질적인 지원을 받은 불교는 외적으로는 번창하였으나, 사상적 · 정신적으로는 창의성을 상실하고 도덕적으로도 극심한 타락상을 보였다. 또 '선' 과 '교'의 갈등과 그 대립은 국가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심화되었다. 광종은 당시 불교계의 가장 큰 과제였던 선교 통합(禪敎統合)을 정책적으로 추진하였으나, 그의 사망으로 선교 통합 운동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높이 평가받을 만한 정책중의 하나였으며, 원효의 통불교(通佛敎) 운동과 의천(義天)과 지눌(知訥)로 연결되는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지눌은 부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선이요, 부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교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 과 교 는 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무의미한 논쟁과 갈등을 매듭짓기 위하여 선교 합일(禪敎合一)을 주창한 그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구현한 실천가였다. 이러한 주장과 실천은 신라 원효의 화쟁 사상(和諍思想)이나 무애행(無碍行), 의천의 교관병수(敎觀竝修)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지눌의 출현은 적어도 부패 타락한 귀족 불교의 탁류가 나라 안 곳곳에 미치지 못하게 하고, 불교의 청신한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불교 : 고려 말부터 시작된 배불(排佛)의 기세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구체화되었다. 고려 말부터 불교 배척의 상소를 올리기 시작하였던 유학자들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본격적인 불교 배척을 꾀하였으며, 정책적인 불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조선 시대는 불교가 억압당하고 배척받던 수난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승려들은 천민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혹한 배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승가의 명맥은 유지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일은 외침으로 국가가 위태로워질 때마다 어김없이 의승군(義僧軍)이 조직되어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 앞장을 섰던 일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에 의해 왕성은 무너졌고, 선조는 북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이러한 때에 공주 갑사의 청련암에 있던 영규(靈圭)는 500여 명의 승군을 이끌고 청주성의 왜적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고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의주로 피란갔던 왕은 처음으로 승전보가 전해지자 영규에게 당상(堂上)의 직책과 상을 내렸지만, 왕의 특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영규는 의병장 조헌과 함께 다시 금산의 왜적을 물리치다가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는 묘향산에 있던 휴정(休靜)의 제자였다. 휴정도 왕의 부탁을 받고 산에서 내려와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의 직함을 받은 뒤, 전국의 승려에게 격문을 돌려 모든 불교인이 왜적을 몰아내는 싸움에 가담할 것을 호소하였다. 휴정은 순안 법흥사에서 1,500명의 의승을 모았고, 그의 제자 유정(惟政)은 금강산에서 일어나 광동 지방을 중심으로 800명의 의승을 모았으며,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일어나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1,000명의 의승을 이끌고 각각 참전하였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의승장들이 있었는데, 각처에서 일어난 의승의 총수는 모두 5,000여 명에 이르렀다.
휴정이 교화력을 펼친 뒤, 불교계는 조선 건국 이래 최대의 고승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구국을 위한 의승 활동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혜명(慧明)을 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고승은 휴정과 선수(善修)이다. 휴정은 조선 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좌선(坐禪) · 진언다라니 · 염불(念佛) · 간경(看經) 등의 경향으로 나뉘어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휴정은 선교 불이(禪敎不二)를 강조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선(禪)을 통하여 견성(見性)을 이룩하는 우리 나라의 불교 전통을 다시 한번 새로운 각도에서 재확립시켰다. 휴정 이후 우리 나라의 불교 승단은 거의가 휴정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그의 영향은 큰 것이었다. 선수는 휴정과 동문으로서 휴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대선사였는데, 그는 평생 신도로부터 받은 시물(施物)을 그 자리에서 대중에게 나누어 주어 자신이 갖는 일이 없었으며, 뛰어난 인품과 덕화에 도를 묻는 무리가 항상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있어서 사찰은 착취의 대상이었고, 승려들은 여전히 천민 취급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승단 안에는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의 구분이 생겨나게 되었고, 승려의 수행도 선(禪)과 교(敎)와 염불(念佛)의 3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수도에 전념하는 수좌(首座)와 강사(講師)를 이판승이라 하고, 사원의 제반 업무를 맡아보는 주지 등의 승려를 사판승이라고 한다. 이판승은 잡무를 멀리하고 공부에 의하여 교단의 혜명을 계승함으로써 불교의 명맥을 이어 갔고, 사판승은 비록 공부에는 힘쓰지 못하였으나 유생들과 위정자의 횡포를 견디면서, 사찰의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여 사원의 황폐를 방지하고 교단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 동안 불교는 총독부의 사찰령(寺剎令)에 의해 엄격히 통제를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한 탄압적 조치들이 폐지됨에 따라 승려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가는 한국 불교의 고유한 전통과 독립성을 지키려는 세력과 일본식 불교를 신봉하도록 회유당한 친일 세력으로 나누어졌고, 이에 따라 비구승(比丘僧)과 대처승(帶妻僧)의 구분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해방 후 승단 분열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30여 개의 불교 종단이 있는데, 최대의 종단인 대한 불교 조계종(曹溪宗)과 통합 종단의 구성에 반대하여 별립한 한국 불교 태고종(太古宗), 그 밖에 대한 불교 천태종(天台宗), 대한 불교 진각종(眞覺宗), 대한 불교 진언종(眞言宗), 대한 불교 불입종(佛入宗), 대한 불교 법화종(法華宗), 대한 불교 일승종(一乘宗), 대한 불교 원효종(元曉宗), 대한 불교 화엄종(華嚴宗), 대한 불교 총화종(總和宗), 대한 불교 보문종(普門宗) 등이다. (→ 고통, 불교에서의 ; 대승 불교 ; 돈오 점수 ; 목탁 ; 밀교 ; 《반야심경》 ; 부처 ; 사성제 ; 상좌 불교 ; 승려 ; 윤회)
※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海東高僧傳》/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王朝實錄》/ 權相老, 《朝鮮佛教略史》, 新文館, 1917/ 李能和, 《朝鮮佛教通史》, 新文館, 1918/ 禹貞相 · 金煐泰, 《韓國佛教史》, 進修堂, 1969/ 李箕永, 《韓國의 佛教》,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1974/ 《佛教文化史》, 東國大學校出版部, 1980/ 安啓賢, 《韓國佛敎史研究》, 同和出版公社, 1982/ 金煐泰, 《韓國佛教史槪說》, 經書院, 1986/ 忽谷快天, 《朝鮮禪教史》/ 高橋亨, 《李朝佛教》. 〔李箕永〕
Ⅱ . 가톨릭에서 본 불교
불교는 오랜 역사 속에서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왔으며, 시대 상황에 따라 많은 국가와 사회에, 그리고 문화와 인간 가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는 국가 통치만이 아니라 각 민족의 심성까지 변화시켰으며, 때로는 국가의 흥망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불교에 대해 가톨릭 교회의 견해를 단정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와 불교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하였으며, 교의에 있어서도 서로 대치되거나 배타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불교와 그 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도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상호 대화의 실천을 주저하는 일부 주장도 계속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와 가톨릭 교회의 만남]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첫만남은 선교사들에 의해 아시아에 복음이 전해지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ier)는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1549~1551) 선불교와 접촉하였으며, 리치(M. Ricci, 1552~1610)를 비롯한 예수회의 중국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에 불교식 복장과 삭발을 하고 서방의 승려〔西僧〕로 행동하였다. 특히 리치는 조경(肇慶)에 최초로 세운 성당을 '선화사'(僊化 寺)라는 사찰식 이름으로 명명할 정도로 불교의 형태로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주의 선교 방식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이후의 선교사들은 유학자들의 관습을 좇아 행동하는 서방에서 온 학자〔西士〕로 행세하였으며, 복음과 교의를 전하고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이 전하는 그리스도교가 불교와 어떠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보유 역불론' (補儒易佛論)은 그 후에 발행된 많은 한역 서학서(漢譯 西學書)에도 그대로 담겨지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선교사들은 불교나 불교 신자들과 만나는 이러한 선교 방식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는 현지인 성직자들에게까지 전달되어 자신들이 성장해 온 문화적 전통을 비하 또는 이단시하거나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극히 소수의 선교사들과 현지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불교의 정신과 참선(參禪) 그리고 신비주의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더욱 풍요로워지리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결국 이노력은 교회의 타종교관에 변화를 가져오는 기초가 되었다.
〔교회의 입장〕 공의회의 견해 : 가톨릭 교회가 불교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타종교 전통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깊이 성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였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에서 "불교는 여러 학파에 따라 무상한 현세의 근본적 불완전성을 긍정하는 동시에 열심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완전한 해탈 상태에 이르든지 혹은 자신의 노력이나 위로부터의 도움에 의하여 최고 조명(照明)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2항)라며 불교의 존재 의미를 분명하게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불교와 힌두교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면에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혹은 윤리적 선과 사회적 혹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에게 권하는 바이다" (2항). 이러한 선언의 내용은 불교가 인간을 교화와 드높은 조명에 이르게 할수 있는 길로 존중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반면에 아시아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적인 것보다는 불교나 불교의 사찰 및 사상에 보다 더 쉽게 노출되어 있 음을 간과한 것이기도 하였다.
아시아 가톨릭 교회의 견해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불교를 포함한 타종교와의 대화를 공식적으로 촉구한 이후 아시아 교회는 불교에 대한 이해와 대화를 위해 각 국가별로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1974년 4월 타이베이(臺北)에서 개최된 아시아 주교 회의(FABC) 제1차 총회에서는 불교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 총회의 최종 성명서에서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종교들 안에서 우리는 심오한 정신적 · 윤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또 존중한다. 수많은 세기에 걸쳐 그 종교들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 온 종교적 체험의 보고(寶庫)였으며, 거기에서 우리 동시대인들도 계속하여 빛과 힘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 종교들은 마음의 고귀한 열망을 드러내는 진정한 표현이 되고 명상과 기도의 집이 되어 왔으며 또 계속하여 그러할 것이다. 그 종교들은 우리 민족들의 역사와 문화 형성에 이바지하여 왔다. ··· 그렇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그 종교들에 대하여 존경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종교들을 통하여 우리 민족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오직 이러한 종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그 종교들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시아 주교 회의 제1차 총회 이후, 불교 신자들과의 대화는 물론 불교 사상과 전통에 관한 좀더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는 선교사와 신학자와 수도 단체들은 개별적으로 여러 형태의 대화에 한층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불교 연구소들을 개설하여 불교 사상에 관한 학문적 평가와 해설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유사성 및 상이성에 관한 논문들을 저술하였고, 그 사회의 사회적 · 경제적 문제나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다른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공동 계획에 착수하였다. 또 1980년대에 3차까지 개최된 타종교 문제 아시아 주교 연수회(BIRA)에서는 그리스도인과 불교, 이슬람교 등의 다른 종교 전통의 수행자들 사이의 대화가 활성화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1991년 2월 태국에서 개최된 제4차 타종교 문제 아시아 주교 연수회에서는 12회에 걸친 회의를 통해 종교간 대화 신학의 전개를 시도하는 한편 이를 위한 계획의 수립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1992년 11월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개최되었던 '아시아 복음화 대회' (Asian Congress on Evangelization) 때 김수환 추기경은, 아시아 교회의 상황을 설명하는 가운데 불교 · 유교 · 힌두교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불교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종교는) 분명히 인간 실존의 깊이를 드러내고 인간의 삶을 순화시킨 종교들입니다. 이 종교들이 인간 생명의 불멸성과 후세에 대한 동경을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 주는 한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에 도움이 되는 요소로써 고려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공자나 석가모니나 노자를 들어 '참된 하느님', '참된 인간' 또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즉 '임마누엘'이라고 칭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을 일컬어 이러한 사람임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인도자, 스승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해 준 분들로 고려할 수 있을것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불교를 평가하는 것에 불과하며, 특히 불교에서 역사적인 부처 즉 석가모니는 방편적으로 눈에 보일 수 있게 나타난 것(示現)이라는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간과한 것이었다. 불교의 교리를 인정하기보다는 가톨릭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려 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힌 타종교와의 대화에 도움이 될 수 없으며, 타종교인을 개종시키려는 교활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993년 11월에 개최된 '아시아의 새 복음화 안에서 토착화와 교육에 관한 범아시아 학술 회의' 에서는 최종 성명서를 통해 불교의 전적 초탈(超脫)과 무아(無我), 모든 형태의 생명에 대한 경의와 공경에 대하여 공동으로 검토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아시아의 대종교들이 지닌 특정한 가치들을 숙지하도록 노력하고 복음의 빛 안에서 이들을 긍정적으로나 비판적으로 사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4. 1. 2)고 권고하였으며, 보다 수용적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형성되어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씨앗들이 그들 안에서 이미 존재함을 식별하도록 경의와 존중심을 가지라 (4. 2. 1)고 하였다. 이후 아시아 교회에서 불교와의 대화는 더욱 진전되어 이듬해 4월 아시아 주교 회의 일치위원회의 후원으로 태국에서 개최된 '종교간 대화' 폐막 성명서에서는, 불교인과 그리스도인이 보는 개인과 사회의 부조화에 대한 진단과 이에 대한 처방의 차이점과 유사점, 두 종교가 조화를 위한 순례의 여정에서 서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추구하였다. 또 1995년 7월 말 대만에서 개최된 '불자 · 그리스도인 공동 토론회'에서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주제로 토론을 벌인 결과 인간 조건과 자유에 대한 요구, 궁극적 실재와 열반의 경험, 붓다와 그리스도, 개인의 초탈과 사회참여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아시아 가톨릭 교회는 타종교와의 대화' 와 '복음화' 또는 '새 복음화' 라는 현대 가톨릭 교회의 사명 실천에서 혼란과 종교적 상대주의, 혼합주의라는 위험을 느끼며 불교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 왔다. 그러나 일부 가시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불교 전통에 대한 결론적인 견해에 접근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서 타종교와의 대화가 강조되거나 반대로 복음화가 강조되는 등 불교에 접근하는 방식이 일관된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불교와의 유사점 및 차이점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이 충분하지 못한것도 그 이유라 할 수 있다.
〔교황청의 견해〕 교황 바오로 6세의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975. 12. 8)에서는 불교를 포함한 "비그리스도교 종교가 많은 사람들의 산 표현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종교들을 존중하고 높이 평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어서 "이 종교들을 존중하고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 과업을 교 회가 포기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결코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53항)고 천명함으로써 불교 신자들에 대한 복음 전파에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또한, 교황청 인류 복음화성과 타종교위원회가 1991년에 공동으로 발표한 문 헌 <대화와 선포 : 종교간 대화와 복음 선포에 관한 고찰과 방향>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 1990. 12. 7)의 대화 및 대화와 선포의 관계에 관한 내용(55~57항)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종교간 대화가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점검하면서 하나의 분명한 방향과 자세를 매우 조심스럽게 표명하였다.
사실 교황청 신앙 교리성은 갈수록 빈번해지는 타종교들과 이들의 상이한 기도 유형과 방법들과의 접촉으로 최근 수년 동안 야기된 그릇된 기도 방식, 기도 방법상의 심리적 · 신체적 문제 등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면서 <그리스도교적 명상의 일부 측면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1989. 10)을 발표하였다. 이 서한에서는 그리스도교 명상을 비그리스도교적 명상과 혼동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불교 이론에 근거한 것으로서 표상이나 개념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것을, 유한한 실재를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위엄과 같은 수준 위에 서슴없이 올려 놓으려 한다"(12항)고 비판하였다. 또 "그리스도교적 관상의 유일한 대상인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이 방법이나 기교에 의해 '얻어질' 수 없는 실재" (31항)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기도에 동양적 특히 불교적인 선(禪)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서한이 발표된 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절대자에 대한 갈망, 해방을 위한 신비 체험, 영성 훈련의 기술, 우주적 일치 안에서의 자아 체험 등으로 표현되는 '동양적' 또는 '초월적' 정신적 요가(yoga) 등에 심취하는 현상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그리스도와 크리쉬나 :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활용되는 동양 명상법에 대한 찬반 견해>라는 글이 발표되었다(L'Osservatore Romano, N. 11, 1990. 3. 12). 이 글에서는 또한 '신체적 방법'이 야기시킬 수 있는 신체에 대한 우상화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교황청이 발표하는 문헌에서 드러나는 불교에 대한 견해는 불교의 일부에 대한 입장 표명에 불과하다. 프로테스탄트와의 대화처럼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면도 없으며, 충분한 이해도 부족한 상황이다. 일부 문헌에서는 여전히 개종시켜야 할 집단으로 보는 인상까지 주고 있다.
〔전 망〕 불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대화의 장은 무한히 열려 있다. 상보적 관점에서 서로를 끊임없이 조명하고 서로를 더욱 성숙으로 초대할 수 있는 장은 무한하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각각 오랜 역사를 거쳐 변천 · 발전되어 온 종교적 전통들이어서 사유하는 틀이 다를 수 있고, 논리적 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고 우주관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를 수 있다. 심지어는 상호 대치되거나 배타적일 수도 있다. 바로 여기서 "대화란, 모든 차이점과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마음을 엮어 주는 생명선으로서 다른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 (BIRA Ⅳ, 8. 1)이라는 의미가 한층 분명해진다. 사실 종교간의 만남 혹은 종교간의 대화란, 결코 불교도가 그리스도교인이 되고 혹은 그리스도교인이 불교도가 되는 동화(同化)의 관계도, 대체(代替)의 관계도 아닌, 오히려 서로가 더욱 성숙해지는, 서로가 서로의 조명(照明)으로 더욱 고유해지고, 더욱 풍요로워지는 관계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또 불교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 역시 필요한데, 이는 특히 한국처럼 다종교적(多宗敎的) 상황(multi-relingious situation)에서는 시급한 일이다.
한국 사회는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와 같은 세계 종교들이 공존하면서도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현재 우리의 문화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 이렇게 특별한 다 종교적 상황은 이웃 일본에서도, 중국 및 기타 유럽에서 뿐 아니라 과거 1세기 전 한국의 조선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함께 한국의 신종교(新宗敎)와 무교(Shamanism) 전통까지 그 종류와 형태는 다양하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간의 대화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양한 종교 전통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실제적으로 오늘의 한국 종교를 대표하는 커다란 축을 형성하고 있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일부 학계를 중심으로 상호간의 만남과 대화를 위한 장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고, 그 성과 또한 괄목할 만한 결실들을 거두고 있지만, 동시에 매우 불행하게도 상호간의 피상적 이해나 오해가 만연해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신앙 교리위원회에서 1997년에 발표한 <건전한 신앙 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에서는 종교 다원주의가 야기할 수 있는 종교 혼합주의 및 무비판주의라는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교회를 여러 종교들 중 하나로 여겨 교회와 그리스도를 격하시키며 타종교와 관련된 그리스도교의 고유성과 근본 핵심을 뿌리째 뒤흔든다고 비판하였다. 동시에 이는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 유일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신원을 의문시하게 하고,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부인하면서까지 타종교의 구원적 가치를 최대한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은 단순히 어떤 형태의 운동과 흐름에 대해 신학적인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을 뿐 보다 구체적이고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에는 부족함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어떠한 형태로든 체험을 한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도 전무하다.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와 복음화를 추진해야 하는 현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에게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정체성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교회의배려 역시 함께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만 보여지는 종교간의 대화는 오히려 교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는 신자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하느님과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이해에서도 타종교의 교리와 혼합된 형태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충분한 검토와 교회의 공식적인 지침 없이 시행되는 부적절한 토착화와 종교적 · 문화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태도, 식견을 지닌 인물의 부족, 타종교의 교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부족은 오히려 종교 혼합주의를 양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교회와 타종교)
※ 참고문헌 교황청 인류 복음화성과 타종교위원회 공동 문헌, <대화와 선포一종교간 대화 복음 선포에 관한 고찰과 방향>, 1991/ M.V. Cyriac, Meeting of Religions-Dialougue, No. 3, Madras, 1982/ R.Pannikkar, The Interreligious Dialogue, New York, Paulist Press, 1978/ S.J.Samartha, Couragefor Dialouge,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81/ H. Küng, Christianity and World Religions(Path of Dialogue with Islam, Hinduism and Buddhism), New York, Doubleday & Company Inc.,1988/ Alan Lace, Christian and Religious Pluralism, Maryknoll, New York, ㅜOrbis Books, 1982/ J. Hick ed., Christianty and Other Religions, Glasgow, Fount, 1980/ H. Cox, Tuming East,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771 W.C. Smith, Toward a World Theology : Faith and the Comparative History of Religion,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1/ 一, The Faith of Other Man, The New American Library, New York, 1965/ H.Coward, Pluralism : Challenge to WorldReligions, NewYork, Orbis Books, 1985. 〔吳將均〕
교
佛敎
〔라〕Buddhismus · 〔영〕Budd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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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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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이 조각된 아소카 왕의 주두(왼쪽)와 <녹야 설법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