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사회에서 관료 및 사대부들이 주도하여 만든 정치 결사. 좁게는 학연 · 지연 ·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뭉쳐서 뚜렷한 정치적 여론을 행사한 조선 시대의 정치결사를 의미한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붕당을 보통 책목'(色目)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15세기 말 조선 성종 때에 사림파가 훈구파를 견제하는 정치 집단으로 등장한 이후부터, 혹은 16세기 말 사림파 정치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선조 때부터 19세기 조선 말기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계속하면서, 지방의 농장같은 물질적 기반, 서원과 족보 같은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강한 결집력을 유지하면서 당파 싸움을 벌인 정치 집단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람들은 붕당을 성리학이 대두된 이후의 새로운 정치 현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붕당론〕 신하들의 세력 결집체인 붕당은 본래 군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는 유교 정치 사상에서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중국 송(宋) 시대에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이 대두되고, 중소 지주층에까지 정치 참여 자격이 확대됨에 따라, 전통적인 붕당관은 커다란 변모를 겪게 되었다. 즉 11세기 초 북송 때에 성립하여 13세기 말 남송의 주자(朱子)에 의하여 집대성된 새로운 성리학파가 성립되면서, 정치적으로 붕당 현상을 긍정하게 되었다. 성리학파의 성립과 함께 붕당의 역사도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신하들이 결성한 붕당이 어떤 성격이든지 간에 다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북송의 구양수(歐陽修)는 가장 전형적인 붕당론을 남겼다. 그는 붕당을 도덕과 도리, 곧 공도(公道)의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군자의 당' 과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소인의 당' 두 가지로 나누고, 전자를 진짜 붕당〔眞朋〕 후자를 가짜 붕당〔僞朋〕이라고 규정하였다. 곧 군주가 진짜 붕당의 승세를 유지시킨다면 정치가 바르게 되는 시대를 맞는다는 것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朱熹)도 구양수의 붕당론을 받아들여, 붕당 현상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싫어하기보다는 현명하고 충성스러운 군자를 추천하여 군자의 당을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군주도 군자의 붕당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견을 펴기도 하였다.
붕당 현상이 신하들이 주도하는 정치 현상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신유학은 군주가 아닌 신하들이 주도하는 붕당 현상을 긍정적인 정치 현상으로 인정하였다. 하늘의 뜻을 받드는 군주와 자기 수양을 완성한 사대부가 함께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군신 공치론'(君臣共治論)도 붕당 긍정론으로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즉 붕당의 결성은 정치적인 면에서 신하의 역할이 상승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붕당 현상의 밑바탕에는 집약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대두된 중소 지주층에게도 정치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정치 참여층의 확대를 도모하였던 송 시대 이후의 사회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파 형성의 모체인 붕당에 대한 긍정론이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붕당은 전 · 현직 관료만이 아닌 재야의 예비 관료들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사대부 집단들이 참여하는 정치권이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였다. 다시 말해 사론(士論) 또는 공론(公論)이라고 불리는 사대부의 정치 여론을 수렴하여 정치에 반영하는 정국 운영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붕당이 출현하였던 것이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훈구파 사대부들 역시 학문적으로는 남송 사대부 체제 속에서 개화한 주자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자의 성리학과 붕당론은 받아들였지만, 붕당 현상 자체는 군주권에 대한 도전으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오랜 이민족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긴요했던 강력한 군주 전제권을 긍정한 중국 명나라의 법전 체제를 일반 형법에 그대로 수용하였다. 《대명률》 (大明律)에서는 관료들의 붕당을 군주의 권위에 도전하여 조정을 문란시키는 행위로서 사형에 처한다는 엄격한 처벌 규정을 두고 있었다. 곧 조선 왕조 개창기에 유교 국가를 만들기 위한 과감한 개혁 정치를 펴려면 강력한 군주권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는 주자 성리학의 붕당 긍정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는 임금에게 붕당 현상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도덕과 도리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의 복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이이(李珥)는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의 붕당에 대해서, "지금 조선의 이른바 동인, 서인은 모두 군자의 무리이므로 정치를 함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곧 조선의 현실에 입각해서 붕당 정치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군자가 하나의 붕당을 만드는 것이지만, 여러 개의 붕당으로 나라가 시끄러워진다고 해서 그것을 군자의 붕당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소인들이 만든 가짜 붕당이 군자들의 붕당을 공격하는 사태가 빚어지면 나라가 망하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仁祖反正) 이후 구양수나 주자의 붕당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며, 이이의 조선 현실에 입각한 붕당론이 실제 정치 운영에 받아들여져 남인까지도 기본적으로 '군자의 당'으로 인정하는 바탕에서 정국이 운영되었다. 결국, 사림 붕당 사이의 조화와 견제를 통하여 정치 통합을 달성해 가는 새로운 조선적 붕당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조선적 붕당론은 숙종 즉위 이후 외척의 대두 및 정탐 정치 현상 등을 긍정하는 '환국'(換局)으로 불리는 일당 전제적 정치가 대두하면서부터 현실 정치에서 부정되었고, 이 때문에 숙종 5년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박세채(朴世采)가 군주 주도의 탕평론을 제기하였다. 이후 18세기 영 · 정조 시대에는 붕당론 대신 탕평론이 정국 운영에 적용되었다. 이는 중소 지주층을 기반으로 하는 붕당 체제가 17~18세기 유통 경제의 발달과 상업적 농업의 대두, 도시와 농촌의 신흥 중간 계층의 대두 같은 상공업 사회로 전진하는 새로운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붕당〕 조선의 붕당은, 성리학적 붕당이 존재하였던 송나라 이후 중국의 경우와도 상당히 다른, 조선사회 고유의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종 당시 조광조로 대표되는 기묘 사림들은 주자처럼 사림의 붕당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긍정하였지만, 결국 붕당을 만들어서 군주를 협박하였다는 죄목으로 처벌되었다. 군주와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는 이른바 훈구 대신들이 "옛부터 붕당이란 국가의 큰 화근이었다" 라고 하면서 사림의 세력 결집을 비판하고, 《대명률》의 규정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곧 16세기에 새 정치 세력으로 대두한 사림파는 기본 정치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정치 운영과 관행을 변화시켜 도덕 정치와 사대부의 여론인 공론(公論)이 반영될 수 있는 사림 정치 체제를 만들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특권을 누려 왔던 정치 세력인 훈구파를 '소인' 으로 지목하면서 격렬한 정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때부터 중종 때까지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을 붕당간의 대립으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조선적 성리학파의 성립이 전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4차례에 걸친 사화(士禍)에도 불구하고 사대부들의 학문적 성취는 기묘 사림 단계를 넘어서서 계속 발전하였고,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조선 성리학의 학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학파 성립에 잇달아서 붕당도 성립되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붕당 긍정론, 곧 군자당 긍정론은 이황(李滉), 이이, 조식(曹植), 서경덕(徐敬德) 학파가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곧 17세기 전후 사림파는 성리학의 정착으로 나타난 학파 성립과 지방 문화의 상승을 바탕으로 신하가 주도하는 정치 기구인 붕당을 결성했던 것이다.
이후 조선의 붕당은 크게 동서 분당 · 남북 분당 · 노소분당을 거치면서 계속 이어졌다.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나누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보통 선조 당시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이조전랑(吏曹銓郞) 관직을 둘러싼 개인적 대립이었고, 이에 모든 관리와 유생들이 참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서 분당을 '공론' 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심의겸으로 대표되는 세조 당시의 한명회(韓明澮) 이래 지속된 훈구의 구체제적 기반을 가진 특권적 정치 세력을 제거하여 사림 정치의 기반을 확립하자는 것이며, 서인의 '공론'은 훈구의 구체제적 기반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림 정치 이념을 긍정한다면 포용 · 흡수 · 변화시킬 수 있으므로 사림 정치의 기반을 보다 넓게 확립하자는 주장이었다.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지게 된 원인은 보다 복잡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보통 정여립(鄭汝立)의 반란 모의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1축옥사(己丑獄事) 처리 문제를 둘러싼 이산해(李山海)와 유성룡(柳成龍)의 개인적 대립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축옥사는 왕권이 전제성을 띠어서 공론을 무시 악용하고 사림 정치적 질서를 파행화시키는 가운데서 나타났다. 이 당시 기축옥사로 사형당한 북인계 인물들이 "일을 함께할 수 없다", "어리석음이 날로 심해진다", "시기심이 많고 성격이 괴곽하다"고 군주를 평가하였다는 지적들은 왕권의 전제성이 사림 정치의 질서를 파행시킨 데 대한 강한 반발을 잘 말해 준다. 곧 남북 분당을 '공론' 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왕권에 대한 공론의 우월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편이 북인이며, 왕권의 공론에 대한 조절권과 인재에 대한 보합권(保合權)을 부정하면 용납할 수 없다는 편이 남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지역으로 가는 길목을 지켜 냄으로써 이후 전란의 역전을 가능하게 했던 진주 일대의 의병 운동을 북인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북인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집권기까지 대체로 붕당 연립 성격이었던 당시의 정국에서 주도 세력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인은 훗날 광해군 후반기의 권력 독점 추구, 북인 붕당의 공론에 대한 산림(山林)의 조정 · 견제 기능 약화 등 자기 제어능력을 상실한 결과, 인조 반정 이후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와해되었고, 이후에는 붕당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 세력이 되지 못하였다. 인조 반정 이후 효종과 현종 때까지는 서인과 남인의 공존과 상호 견제를 바탕으로 한 평화적 붕당 정치 체제가 계속되었다. 인조 초에는 기축옥사를 위시한 이전 붕당간의 현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서 많은 논쟁점들이 해소되었다.
현종 당시에 있었던 기해년의 예론 논쟁(己亥禮訟)도 국가의 종통(宗統)과 왕실의 가통(家統)이 일치해야 하느냐 별개의 것이냐 하는 공론이 대립하였던 문제였는데, 결국 군주권의 지위에 대한 공론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견해 모두 《의례》(儀禮)에 근거를 둔 주장이었으나, 서인의 별개의 것이라는 공론은 군주 집안의 가례도 사대부 집안의 가례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자 이래의 '천하 동례론' (天下同禮論)에 근거한 것이었다. 반면에 일치해야 한다는 남인의 공론은 군주 집안의 가례는 주자가례보다 오래된 '고례' (古禮)에 입각한 주장으로서 군주권의 우위성을 더 긍정하는 입장이었다. 이 대립도 군주인 현종이 두 견해를 조절할 수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국조례(國朝禮)를 채택함으로써 붕당 정치가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가지고 서인을 역적당으로 지목한 남인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는 당연히 배척될 수밖에 없었고, 남인 안에서도 윤선도의 처벌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숙종 즉위 전후의 갑인 예론 논쟁(甲寅禮訟) 이후부터 50년 간은 상대 붕당을 역적당으로 몰아 서로 죽이는 격렬한 당파 싸움을 거치기도 하였다. 17세기 말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로, 조화를 통해 사회 통합을 유지해 왔던 붕당 정치 체제가 이후 8번 정도 일진일퇴하는 일당 독재 체제로 변화된 때문이었다. 숙종 당시에 노론과 소론의 붕당으로 나누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스승 송시열(宋時烈)과 제자 윤증(尹拯)의 개인적 대립 때문이라고 보통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분립 이유를 윤증과 박세채의 대담을 통해서 이해해 보면, 소론은 첫째, 서인과 남인의 원한 관계를 해소하는 데 노력하며, 둘째, 청풍 김씨 · 여흥 민씨 · 광산 김씨 등 왕실 외척 문벌의 정치 간여를 막고, 셋째, '나를 따르는 사람은 군자 아니면 소인' 이라는 식의 송시열의 독단적 판단을 견제해야 한다는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이를 반대하고, 일당 전제를 주장한 붕당이 곧 노론으로 결집되었다.
군주는 1당이 전권을 장악하는 정치 운영 체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외척에게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고, 왕실 외척 문벌은 특권적 권력 행사의 정치적 정통성을 보장받기 위하여 궁중 세력과 결탁하고, 역모를 조작한다든지 상대 붕당을 함정에 빠뜨리는 정탐 정치를 자행하였다. 결국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 붕당은 이런 정치 방식을 합리화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노론 붕당은 그 학통의 연원은 충청도에 두고 있지만, 결국 서울 · 경기 지역의 양반 문벌〔京華閥閱〕의 특권을 반영하는 세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론 학통의 연원이 서울 · 경기 지역으로 이동해 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진행 과정 속에서 중앙 권력이 몇몇 문중의 사적인 권력으로 타락하였다는 것과, 이제까지 학문 발전을 이끌어 오면서 많은 산림 학자들을 배출해 오던 서원이 이제는 한갓 개인이나 일개 가문을 위한 문중 서원으로 타락하였다는 문제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대세를 저지하려던 윤증으로 대표되는 사림 계열은 결국 소론 붕당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증의 견해에 동의하였던 박세채는 노론에 대항하는 새로운 붕당의 결성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중도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이러한 대립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정치적 해결 방안으로 '탕평론' 을 주창하였다. 탕평론은 군주권 강화를 전제로 하되, 관료 인사권이나 군대 통수권 같은 군주의 권한을 사적으로 행하지 않고 공평 무사하게 행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박세채 사후 그의 제자들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버렸다. 하지만 대체로 각 붕당 안에서 청류(淸流)를 표방하였으며, 영 정조 당시에는 탕평책 추진을 적극 지원하였다. 결국 붕당에 의한 정치는 18세기 초 영조와 정조가 붕당의 타파를 표방하는 탕평책을 실시함으로써 이전과 같은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점차 소멸되어
갔다.
〔붕당 정치〕 조선 왕조에서 17세기 초 · 중반의 인조 · 효종 · 현종 연간에 나타난 전형적인 사림 정치 체제로서, 붕당 사이에 공론에 의한 상호 비판과 이의 조절에 의한 공존에 동의하는 정치 형태가 붕당 정치이다. 당시 정치 사회는 관료 체제를 견제할 수 있는 서원 · 향약 조직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연결망을 구축한 향촌 사회에서 학문적 성취가 높은 유학자들을 '산림' 으로 예우하고, 관료 조직 안에 산림직을 설치하여 공론의 주도 세력으로 인정하였다. 붕당 사이의 공론에 의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용인하고, 군주 또는 산림의 조절 · 보합 노력에 바탕한 공존 원칙을 지켰다. 또 당하관 추천권을 가진 이조전랑, 백성과 관료의 풍속을 규찰하는 사헌부 장령(掌令), 학문 정치를 담당하는 홍문관원, 군주와 신하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는 예문관 한림(翰林) 같은 요직을 맡은 소장 관료들이 통청권(通淸權)이라는 상급자가 간섭할 수 없는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언론과 감찰 기능을 규제함으로써, 삼공(三公)의 정책 결정권을 제한하고 감시하는 관료 체제를 운영한 것도 특징이다. 이상과 같은 운영 체제를 바탕으로 서인과 남인의 붕당 정치가 오래 지속되었다.
다시 말하면, 17세기 이후의 조선적 붕당 정치란 훈신 · 척신 세력을 권력 집단에서 약화시키는 등 특권적 권력 집단의 출현을 억제하고, '정파' 및 그 모집단인 붕당의 대립 · 조화의 관계는, 군대를 제어하는 군주와 붕당을 제어하는 산림에게 동시에 정책 결정을 조정하고 인재 등용을 보합하는 권한을 주어 정국을 운영하는 정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붕당 정치 시기는 군주와 재상의 권한이 강력하였던 15세기의 전형적인 경국 대전적 관료제 운영 방식과는 성격이 다른 언관과 학술관인 관료들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쥐고, 붕당 조직을 통하여 표출된 공론을 정치에 반영하는 사림적 정치 운영 방식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남 · 북 · 노 · 소 4색 붕당 안에서 또다시 청론 · 탁론 · 중도론 등으로 나누어진다거나, 정조 중반 이후처럼 노 · 소 · 남 3색 붕당 안에서 정조의 탕평책을 따른다는 시파(時派)와 이에 반대한다는 벽파(僻派), 남인 안에는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 구분 방식처럼 시파에 속해서 서학을 수용한 신서파(信西派)와 벽파에 속해서 서학을 배척한 공서파(攻西派)의 대립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모두 붕당간의 대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정파들은 그 성격과 규모가 관점에 따라 상당히 큰 편차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거나 모두를 비판하는 중도파도 많았고 장기간 지속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 조선 사회를 붕당간의 대립이라기보다 일정한 정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결집되는 정파간의 대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 남인과 천주교)
※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黨議通略》/ 《擇里志》/ 安廓, 《朝鮮文明史》, 匯東書館, 1923/ 姜周鎮, 《李朝 黨爭史研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1/ 李泰鎮 編, 《朝時代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李泰鎮, 《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 變遷》, 韓國研究院, 1985/ 近代史研究會 編, 《韓國中世社會解體期의 諸問題》, 1987/ 韓國精神文化研究院 편, 《朝鮮 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1992/ 朴光用, <朝鮮後期蕩平研究>,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4. 〔朴光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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