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넓고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양원제의 연방 공화국이며, 세계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가톨릭 국가로 공식 명칭은 '브라질 연방 공화국'(República Federative do Brasil). 동쪽 국경 전체는 남아메리카의 대서양쪽 해안선과 접해 있으며, 서쪽 · 남쪽 · 북쪽은 에콰도르와 칠레를 제외한 남아메리카의 모든 국가와 접경하고 있다. 면적은 8,547,404㎡, 인구는 157,872,000명(1996)이며 수도는 브라질리아(Brasilia)이고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다. 국교(國敎)는 없지만 주요 종교는 가톨릭이다.
포르투갈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원주민은 투피(Tupi) 인디언이었고 잉카인들과 아즈텍인들도 일부 생활하고 있었는데, 1500년에 포르투갈의 해군 부함장 카브랄(P.A. Cabral)이 인도로 가는 도중에 이 땅을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포르투갈은 이 지역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브라질(brasil)이라는 붉은 염료를 함유한 수종(樹種)을 발견하고 이지역에 대한 프랑스와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1530년부터 적극적으로 식민지화 작업을 하여 봉건적 특색이 강한 대토지 소유의 지주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토착 인디언들이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후에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이들을 대신하여 이일을 하였다. 1789년에 포르투갈의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가 시작되었으나, 독립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자 포르투갈 왕실은 1808년에 브라질로 피신하였으며, 포르투갈과 브라질로 이루어진 통일 왕국은 1815년에 수도를 리우 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로 정하고, 브라질을 포르투갈과 동등한 왕국의 범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물러가고 본국에서의 혁명으로 왕실은 왕자만을 남기고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그 후 포르투갈 의회가 브라질을 식민지 상태로 되돌리려 하고 왕자의 귀국을 종용하자 섭정 황태자 돔 페드로(Dom Pedro)는 1822년 9월 7일에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국가 체제를 군주제로 하여 독립을 획득하였으나 군부지도자가 1889년에 혁명을 일으켜 공화제 국가로 전환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군부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 인권이 억압되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에는 내륙지역을 발달시키기 위해 수도를 브라질리아로 옮겼으나, 새 수도를 건설하는 동안 부채와 정치 · 경제 · 사회적 어려움이 증가하였다. 민주화 정책은 1979년 이후 군사정부에 의해 단계적으로 시행되었으며, 1988년에 새 헌법이 승인되어 이듬해에 최초의 직접 선거가 29년 만에 실시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 교회의 역사는 1500년에 포르투갈에 의해 이 지역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식민지 기간 : 식민지 기간 동안에 복음화는 주목할만한 진보를 보였으나 정부의 정책으로 많은 방해를 받았다. 1500년 4월 26일 몇 명의 포르투갈 교구 사제들과 15명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에 의해 최초의 미사가 봉헌된 지 몇 년이 지난 후부터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1551년에 최초로 살바도르 교구가 설립되어 사르디나(Dom Pedro Fernandes Sardinha)가 최초의 바이아(Bahia) 주교이자 브라질 전 지역의 수석 주교가 되었다. 당시 브라질 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한 포르투갈의 예수회는 바이아, 리우 데 자네이루, 페르남부코(Pernambuco)등 세 곳에 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다른 수도회들도 이때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말에는 북부 브라질의 아마존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비로소 시작되었고, 카푸친회에 이어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등도 인디언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선교사들과 주교들은 식민주의자들과 정부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았다. 1593년에 예수회가 추방된 데 이어 1596년에는 프란치스코회가 추방되었지만, 1630년 이후 가톨릭 신자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승인되면서 일부 수도회들은 활동을 재개할수 있었다. 인디언들에게 세례를 주고 교육 사업을 전개한 수도회들은 특별히 아마존 인디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이 당시에 식민주의자들이 내륙을 향한 팽창 정책을 전개하면서 노예로 쓸 인디언들을 납치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예수회의 선교사 비에이라(Antonio Vieira)는 인디언 보호권을 획득하였으며, 1680년대의 활발한 인디언 선교 활동의 결과로 선교사들이 인디언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법과 인디언들의 노예화를 금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아마존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의 황금기는 1680년과 1750년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브라질의 교회는 당시 유행하였던 계몽주의 철학의 비종교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로 인해 1782년에는 예수회와 다른 선교회 회원들이 추방되었으며, 사제들은 시민의 봉사자라는 원칙이 명시화되었고 교회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독립 이후 : 독립 이후 가톨릭이 국교로 선포되면서 더욱 많은 교구들이 설립되었으나, 섭정(攝政) 동안에 만연한 왕권 신수설로 교회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더욱 엄격해졌다. 또한 자유주의와 프리메이슨(Freemasonry)에 의한 반성직주의로 인해 반교회적이고 반종교적인 행위들이 야기되었으며, 수도원 생활은 일반적으로 쇠퇴하였다. 당시 교황은 프리메이슨을 비난하는 교서를 발표하였으나, 브라질에서는 발표되지 못하였다. 1891년의 공화국 새 헌법에 의해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가 법령화된 후 로마와의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1901년부터 브라질의 주교들은 정규적으로 공동의 문제를 논의하고 공동 사목 교서를 작성 · 발표하였다. 그러나 1917년에는 브라질의 국가 공의회가 정부로부터 제한을 받았으며, 많은 사목 서한들이 무효화되기도 하였다. 또 1939년에는 최초의 브라질 주교 회의가 개최되어 20세기에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 특히 사제 부족에 관하여 거론되었다.
현대 : 브라질 교회는 강력한 영향력을 갖춘 가톨릭 정기 간행물이 부족하고 대다수의 성직자들이 외국인일 정도로 사제와 수도자도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주교 · 사제 · 수도자 평신도들이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브라질 내에서의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상호 협력하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 주교 회의가 매년 개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도회들 사이의 협력과 일치도 증진되고 있다. 1980년 6월 30일부터 12일 동안 브라질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개최된 라틴아메리카 주교 회의의 개막 연설을 통해 브라질 및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생되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비디갈(Vidigal)과 알라가도스(Alagados) 등의 빈민촌을 방문하였을 때도 연설하였는데, 이 당시에 행한 교황의 연설은 아직도 가톨릭 사회 교리에서 중요한 지침으로 활용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미국 다음으로 면적이 넓은 브라질에는 1995년 현재 총 인구의 약 85%인 1억 3,250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으며, 대교구 37, 교구 200, 면속구 13, 본당 7,917개에, 추기경 6, 대주교 49, 주교 311, 사제 14,992(교구 소속 7,429, 수도회 소속 7,563), 종신 부제 715, 수사 2,284, 수녀 36,734명이 있다. 그리고 한인 교회 1, 한인 공소 3개에 한인 사제 1, 한인 수녀 9명이 3,107명의 한인 교포 신자들을 돌보고 있다. (→ 라틴아메리카)
※ 참고문헌 M.C. Kiemen, 《NCE》 2, pp. 762~771/ 《EU》 3, p. 495/ 《EU》 Les Chiffres du Monde, pp. 138~139/ Petit Robert Dictionnaire Universel des Noms Propres 2, Paris, 1988, pp. 277~279/ 1996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한국 천주교회 교세 통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7. 〔편찬실〕
브라질
〔영〕 Federative Republic of Braz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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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