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요하네스(1833~1897)

Brahms, Joha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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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 1833년 5월 7일 독일 함부르크(Hamburg)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처음 음악을 배웠는데, 브람스는 이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7세때 코셀(F.W. Cossel)에게서 규칙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0세부터는 코셀의 스승인 마르크센(E.Marxsen)의 제자가 되었다. 브람스의 가문은 그의 아버지 야곱만이 유일하게 음악 활동을 하였을 정도로 음악과는 관련이 적었다. 야곱은 1826년에 함부르크로 이주해 온 후 싸구려 선술집이나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궁핍한 생활을 하였으나, 꾸준한 노력으로 함부르크 시립 교향악단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1830년에 목사, 학교장, 시장 및 귀족을 조상으로 둔 고귀한 집안의 11세 연상의 여인 크리스티아네(Christiane Nissen)와 결혼하였다. 괴테(J.W. von Goethe)의 표현에 의하자면, 이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브람스는 아버지로부터는 강한 체격과 생활력을, 어머니로부터는 음악적 감성과 활달한 성격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피아노의 신동으로 불린 브람스는 공개 연주회뿐만 아니라 14세부터는 함부르크의 여러 음악회에 출연 요청을 받았으며, 피아노 교습과 유행가 편곡을 하였고, 후에는 극장에서 연주를 해주고 받은 보수로 가족을 부양하였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운 유년기를 보내면서도 창조적인 자질을 보인 그는 피아노곡 · 실내악곡 · 성악곡들을 많이 작곡했는데, 초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브람스 자신에 의해 파기되어 현재는 몇 개의 성악곡과 피아노 소나타 1 · 2번, 그리고 4번의 E단조 스케르초(scherzo)만이 남아 있다. 브람스는 음악 외에도 독일의 낭만주의시를 중심으로 문학적인 소양을 쌓았으며, 부모의 소박하고 독실한 신앙심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접한 성서는 그의 전생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헝가리의 바이올린 연주자 레메니(E.H. Remenyi)와 알게 된 브람스는 1853년에 니더작센(Niedersachsen) 지방으로 연주 여행을 갔다가 이곳에서 요아힘(J. Joachim)을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또 레메니와 함께 바이마르를 방문하였을 때는 당시의 대가인 헝가리의 작곡가 리스트(F. Liszt)를 만났지만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하였다. 레메니와 헤어진 브람스는 괴팅겐에서 휴가 중이던 요아힘을 다시 만났는데, 그의 권유로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R. Schumann)을 방문하게 되었다. 슈만은 《음악 잡지》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했던 인물"이라며 그와 그의 작품을 격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첫 작품이 독일의 유명한 악보 출판사인 브라이트 코프 헤르텔(Breitkopf-Haertel)사에서 출판되도록 직접 주선까지 해주었다.
슈만이 정신 착란증으로 라인 강에 투신 자살하려는 소동을 일으킨 1854년 2월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2년여동안 브람스는 슈만 가족을 돌보아 주었는데, 이때 그는 그의 부인 글라라 슈만(Clara Schumann)에게 사랑을 느껴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슈만의 죽음과 함께 글라라가 베를린으로 떠난후 브람스도 뒤셀도르프를 떠나 함부르크에 머무르면서 때때로 데트몰트 궁정의 피아노 연주자로, 실내악 연주자로, 궁정 합창단의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기악 편성과 음색에 대한 체험을 풍부히 쌓았을 뿐만 아니라 합창 연습을 통해서 합창곡을 작곡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경험을 얻었다. 1858년에는 괴팅겐 대학교 교수의 딸인 지볼트(Agathe von Siebold, 1835~1909)를 사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와 여성 합창단의 지휘를 맡으면서 많은 민요풍의 곡들과 모테트, 그리고 <하늘을 향한 구세주>(O Heiland reiß die Himmel auf) 같은 까다로운 합창곡들을 작곡하였다. 이때 그의 가장 유명한 합창곡인 <독일 레퀴엠>(Ein deut-sches Requiem, 1868)이 구상되었다.
1862년 9월 8일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빈(Wien)으로간 브람스는, 이곳에서 피아니스트로, 작곡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음악 아카데미(Singakademie) 원장이 되었으나 행정 업무에 시달린 끝에 이듬해 4월 사임하였다. 또 1872년에는 빈 음악 애호가 협회 음악회의 지휘를 맡으면서 확실한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으나, 1875년에 이 자리를 사임하고 나서부터는 리스트-바그너파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이 시대에는 브람스파니 바그너파니 하는 논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는 공존하기 어려운 특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논쟁의 와중에도 브람스는 자신의 명성을 지킬 수 있었으며 악보 출판으로 물질적인 면에서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1873년에는 독일 비스바덴에서 알토 가수인 스피스(Hermine Spieß)를 사귀면서 좋은 가곡들을 작곡하였으며, 1878~1893년 사이에는 여덟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여행을 하였다. 1870~1880년대의 활약으로 얻은 명성으로 브람스는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명예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에 대한 감사와 기념으로 <대학 축전 서곡>(Akademische Festouvertiire) 작품 80번을 작곡하였다. 또 1889년에는 고향 함부르크에서 명예 시민으로 예우받자 <판결 기념 축제>(Fest Gedenksprüche) 작품 109번을 감사의 뜻으로 작곡하였으며, 그의 60세 생일을 기념하여 빈 음악 협회의 친구들은 기념 주화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1893년 이후 국내외적인 음악회에서 열렬히 환영받는 작곡가가 된 브람스는, 1896년 5월 본(Bonn)에서 치러진 글라라 슈만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후 황달병에 걸렸고 결국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여름 브람스는 마지막 작품이 된 <11개의 오르간 코랄>(Eleven Chorale Preludes for Organ) 작품 122번을 작곡하였다. 1897년 3월 초 빈에서 개최한 음악회를 마지막으로 4월 3일 사망하여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 가까이에 묻혔다.
〔평 가〕 그의 음악에서 기악곡과 성악곡은 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 특이한 것은 오페라를 한 곡도 쓰지 않았다는 것인데, 마음에 드는 대본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독일의 낭만파 작곡가이지만 비교적 보수적인 경향을 취한 브람스는, 넘치는 힘과 폭 넓은 음색은 일반적인 낭만파 작곡가들의 작품과 다르며, 떠오르는 음악적 영감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고된 작업을 통해 음악으로 표현하였다. 초기에는 리스트나 바그너풍의 음악에 접근하였지만 자신의 음악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결국에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15~16세기 대가들의 작품과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구하였고, 그를 토대로 서정성을 곁들인 음악 작품을 만들기에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풍만한 음색이 가져다 주는 장중한 무게감과 브람스 고유의 부드러움과 그리움이 가득한 몽상 또는 체념적인 애조가 느껴진다.
동시대의 작곡가들이나 후배 작곡가들은 브람스의 예술이 다만 학구적이고 모방적이며 형식적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브람스를 1850~1900년 사이에 큰 영향을 미친 진보적 음악가로 꼽고 있다. 물론 그는 과거 지향적인 전통주의자여서 당시 진보적인 전위 물결 속에서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퇴보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고수해 오던 것들을 유지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로부터 얻은 거대한 예술적 아이디어를 통해 자신의 능력들을 미래 지향적인 가치로 새로이 단장함으로써 그의 예술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활동성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브람스는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교회 음악적인 면에서는 특별한 공헌을 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지녔던 그의 작품으로는 전례 현장을 떠난 연주곡으로서 독일어 성서 구절을 가사로 한<독일 레퀴엠>과 베이스와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엄숙한노래>(Vier ernste Gesänge, 1896) , <아베 마리아>와 몇 개의 모테트, 그리고 오르간곡으로 <11개의 오르간 코랄> 정도가 있을 뿐이다. (→ 낭만주의)

※ 참고문헌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Barenreiter Verlag, 1989/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k and Musicicans, Macmillan Publisher, 1980. 〔白南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