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알로이시오. 한국명은 백류사(白類斯). 1858년 12월 17일 프랑스 코트도르(Cote-d'Or)의 디종(Dijon)에서 태어나 플롱비에르(Plombie-res) 소신학교와 대신 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79년 9월 12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1882년 3월 4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
다. 같은 해 4월 12일에 말레이 반도의 페낭(Penang) 신학교에 파견되어 약 12년 동안 수사학과 교회사를 강의하여 아시아 지역의 사제 양성에 기여한 브레 신부는, 그 후 학생수 감소로 페낭 신학교가 폐쇄되자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1894년 4월 21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입국한 지 얼마 안 되어 함경도 원산(元山) 본당 주임으로 임명된 브레 신부는, 그 해 4월 30일 안변(安邊)본당 주임으로 있던 동료 불라두(T. Bouladoux, 羅亨默) 신부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5월 11일 원산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전임 샤르즈뵈프(J.M.E. Chargeboeuf, 宋德望) 신부가 물색해 둔 새 성당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신학생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으로부터 한국어와 풍습을 배우면서 전교 활동에 나섰다. 그리고 성당 및 수녀원 건립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나 자금 사정으로 1895년 7월에 사제관만을 완공하였다. 한편 같은 해 9월 18일 브레 신부는 원산 성당 부지에 무단 침입한 주민 배중현(裴中玄)에게 발포하여 위협하다가 중상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사건 처리를 위해 파견된 경무관 이장오(李章五)까지 폭행함으로써 '원산 교안' (元山敎案)을 유발시켰는데, 이 교안 사건으로 그가 관가 및 지역 주민들과 갈등을 겪게 되자 1896년 1월 5일 서울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전임되었다.
신학교로 전임된 지 약 1년 반 만인 1897년 5월 8일 다시 원산 본당 주임에 임명된 브레 신부는, 성당 건립과 학교 운영에 중점을 두고 사목하면서 지역 주민들과의 융화에도 노력했다. 또 1896년에 베르모렐(Vemorel, 張若瑟)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간도(間島)의 김영렬(金英烈, 요한)이 회령(會寧)과 간도에서 예비자들을 이끌고 찾아오자 그들 중 12명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북관(北關)의 12종도' 를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이어 그는 1897년 12월 21일부터 1898년 3월 28일까지 약 3개월에 걸쳐 회령과 간도 지방의 여러 공소를 순방하였는데, 이때 작성한 전교 기행문이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펴내는 포교 잡지 《미시옹 가톨리크》(Les Mission Catholiques)에 연재되었다.
이처럼 브레 신부는 한국에 입국한 이래 대부분의 기간을 원산 본당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의 활발한 전교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이주와 외교인들의 방해로 교세는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북관의 12종도에 의해 천주교가 전파된 간도 지역의 교세가 날로 성장해가자 브레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본당설립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1907년 9월 3일 요청이 허락됨으로써 그는 그 해 11월부터 용정(龍井)에 거주하면서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1908년 10월 24일 사망하여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교안 ; 원산 본당)
※ 참고문헌 Bret, 임충신 역, 《원산에서 북간도까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 李元淳, <朝鮮末期社會의 教案 研究>, 《韓國天主敎會史研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pp. 167~240/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Ⅰ ~ 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86~199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선교사 서한집》 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MEP., Compte Rendu 1908. 〔李裕林〕
브레, 루이 에우제브 아르망(1858~1908)
Bret, Louis Eusébe Arm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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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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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