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허, 테오도르(1889~1950)

Breher, Theo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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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허 주교가 집전한 서원 미사 후의 행렬(왼쪽)과 1936년 8월의 간도 천주교 전래 40주년 경축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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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허 주교가 집전한 서원 미사 후의 행렬(왼쪽)과 1936년 8월의 간도 천주교 전래 40주년 경축 행사.

아빠스. 초대 연길 대목구장.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한국 선교사. 수도명은 테오도로. 한국명은 백화동(白化東). 1889년 8월 23일 독일 슈바벤(Schwa-ben)의 오토보이렌(Ottobeuren)에서 태어나 성 오틸리엔 베네딕도회에 입회하여 1911년 10월 8일 서원한 후, 딜링겐(Dillingen) 신학교에 들어가 1915년 7월 16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곧 이어 뮌헨(München) 대학교 신학부에서 1년 동안 공부한 브레허 신부는, 베를린(Berlin) 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학을 전공하면서 중국어 · 몽고어 · 일본어 · 산스크리트어 등을 연구하여 1921년 6월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베버(N. Weber) 총아빠스로부터 아시아 지역의 선교에 대해 연구하라는 임무를 받고 같은 해 6월 말 독일을 출발하여 한 달 후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후 간도(間島)의 팔도구(八道構)본당에서 사목하던 동료 퀴겔겐(C. Kügelgen, 具傑根) 신부로부터 한국 언어와 풍습을 익힌 그는, 이듬해 여름 원산 대목구 초대 교구장인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의 지시에 따라 주임 신부가 공석이던 삼원봉(三元峰)본당에서 5개월 동안 사목하였다.
이에 앞서 남만주 일대와 간도 지방이 1921년 3월 19일에 원산 대목구 소속이 되면서 5월 1일자로 사목권이 베네딕도회에 이관됨에 따라 사우어 주교는 1922년 11월 말에 간도의 중심지인 연길(延吉, 즉 局子街)에 본당(연길 하시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브레허 신부가 연길 본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브레허 신부는 1925년 여름부터 간도의 성 오틸리엔 선교부 분원장직을 맡게 되면서 주교의 공식적인 대리자가 되었으며, 1928년 7월 19일 연길 지목구가 설정되자 이듬해 2월 5일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간도에는 8개 본당에 11,764명의 신자들이 있었는데, 그는 우선 연길 하시 본당 옆에 수도원 겸 사무실을 마련하고 교육 · 출판 · 자선 사업을 통해 교구의 발전을 모색하는 한편, 1930년에는 스위스 캄(Cham)의 하일릭크로이츠(Heiligkreuz) 수녀원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여 이듬해 11월 6일 6명의 수녀들이 연길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연길 수녀원이 설립되었으며, 1933년에 오틸리엔 연합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본국을 방문하였다가 돌아오는 1935년 7월에는 독일인 선교 의사 레너(Lehner) 박사와 함께 입국하여 연길에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쇄소를 개설하여 《가톨릭 소년》을 비롯한 각종 전례서, 교리서, 기도서 등도 간행하였다. 그 밖에 1936년부터 가톨릭 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8월에는 간도 복음전래 40주년 행사를 개최하였다. 또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양로원, 고아원, 구제회 등을 설립 · 운영하여 신자는 물론 외교인들에게도 혜택을 주는 등 활발하게 가톨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연길의 베네딕도 수도원이 1934년에 대수도원으로 승격되자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어 그 해 9월 5일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축성식을 가진 브레허 신부는, 1937년 4월 13일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9월 5일 '십자가는 승리한다'(Vincit Crux)라는 사목 표어 아래 주교 성성식을 거행하였다. 대목구 승격 당시 연길에는 12개 본당과 79개 공소에 약 14,000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그 후 중일 전쟁, 일제의 탄압과 경제난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해방 후 소련과 중국의 공산 정권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은 브레허 주교는, 1946년 5월 20일 동료 성직자 및 수도자들과 함께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어 연길 공산군 보안 제1단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두도구(頭道溝), 삼도구(三道溝)를 거쳐 그 해 7월부터는 인근의 남평(南坪)에서 수용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지병인 심장병과 당뇨병이 악화되면서 폐렴 증세까지 보이자 9월에 석방되어 연길에서 머무르다가 1948년 4월 하얼빈으로 가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1일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추방령이 내려지자 본국으로 송환되어 오틸리엔 수도원에 머무르던 중, 1950년 6월에 열린 오틸리엔 연합회 장상 총회에 참석한 후 쓰러져 그 해 11월 2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사망하여 수도원 내에 있는 예수 성심 성당의 십자가 경당에 묻혔다. (⇦ 백화동 ; → 간도 교회 ; 베네딕도회 ;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 연길교구 ; 연길 하시 본당)
※ 참고문헌  Hwan Gab 60 Jahre(還甲), Miunsterschwarzach, 1973/ 韓興烈, 〈延吉教區 天主教略史〉, 《가톨릭 청년》 41호(1936. 10)/ 왜관성 마오로 플라치도 수도원, 《옛 등걸에 새순이》, 분도출판사, 1985/一, 《死亡者 名簿 1910~1989》 , 분도출판사, 1990/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은혜의 60년》, 199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P.H. Walter, 정학근역, 《승리의 십자가》, 분도출판사, 1978.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