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사에서 계시 신학을 정초한 인물. 1889년 12월 23일 스위스 취리히 근교의 빈터투르(Winterthur)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취리히에서 교육을 받고 1908년에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취리히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1913년에 취리히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목사 안수를 받고 1916년부터 목회 활동을 한 브루너는, 1924년에 취리히 대학의 조직 신학과 실천 신학 교수가 되어 1955년까지 31년 동안 재직하였다. 1949년에 세계 기독교 청년회(Y.M.C.A.) 운동의 고문으로 재직 중 한국 Y.M.C.A.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강연을 하기도 한 그는, 3개월 동안의 심한 병고를 겪은 후 1966년 4월 6일 사망하였다.
〔사상의 배경〕 브루너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친 요소는 여섯 가지이다. 첫째는 스위스의 민주적인 자유주의 전통으로, 이에 영향을 받은 그의 사상은 한국 방문때 그가 강의한 '정의와 자유' 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둘째는 츠빙글리(U. Zwingli)로 거슬러 올라가는 종교 개혁 전통이다. 브루너의 외할아버지는 개혁 교회 목사였고, 아버지는 개혁주의 전통에 성실한 신자였다. 셋째는 독일의 루터교 목사인 블룸하르트(J.C. Blumhardt)와 그의 아들 크리스토프(C. Blumhardt)를 통하여 수정된 방식으로 스위스에 들어온 '종교 사회주의 운동' (Religious Socia-list Movement)이었다. 브루너는 개인적으로 크리스토프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받은 블룸하르트의 영향은 스위스 추종자인 쿠터(H. Kutter, 1863~1931)와 라가츠(L. Ragaz, 1868~1945)를 통한 간접적인 영향이었다. 이 두 추종자를 통하여 브루너는 그가 앞으로 전개할 변증법적 신학의 원천이 어떤 신학적 · 철학적 사상 체계가 아니라 성령의 실재 속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넷째는 바르트(K. Barth, 1886~1968)를 중심으로 하는 변증법적 신학 운동이고, 다섯째는 1931년 영국으로부터 들어온 옥스퍼드 그룹 운동이다. 브루너는 이 운동의 잠재력을 보면서 열성적인 참여자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영적 실재와 친교 또는 공동체 사이의 긴밀한 관계' 에 대하여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섯째는 에브너(F. Ebner, 1882~1931)와 부버 (M. Buber, 1878~1965)가 제창하였던 '나-너의 인격적 철학' (I-Thou personal philosophy)이다. 이 인격적 철학의 도움으로 브루너는 주관과 객관을 대립시키는 전통 이성주의적 사고 도식을 극복하고, 하느님 앞에서 책임적 존재가 되는 인간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착상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인격적 철학은 1938년부터 그의 신학 사고를 지배하는 지표가 되었다.
〔저서와 사상〕 변증법적 신학의 단계 : 브루너는 1914년에 신학 박사 학위 논문 <종교적인 인식에 있어 상징적인 것>(Das Symbolische in der Religiösen Erkenntnis)을 출판하였다. 이 논문은 그가 종교 사회주의 운동의 이념적인 틀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 깊이 심취하였을 때, 특히 칸트(I. Kant)의 인식론적 저서와 후설(E. Husserl)의 현상학적 저서에 심취했을 때 쓰여진 것이다. 또 1921년에 펴낸 《체험, 인식과 신앙》(Erlebnis, Erkenntnis und Glaube)에서는 신앙을 떠나서 체험과 지식을 결합하고자 하였던 동일성의 철학을 주장하면서, 추상적 체계 즉 슐라이어마허(F.D. Schleiermacher, 1768~1834)의 체험 신학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하였다. 1924년에는 《신비주의와 말씀》 (Die Mystik und das Wort)을 출판하였는데, 이 저서 또한 슐라이어마허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박서였으며, 그리스도를 믿기에 스스로 너무 지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복음의 제시였다. 이 두 저서로 브루너는 취리히 대학의 조직 신학과 실천 신학 교수로 임명을 받았다.
대부분 목회 활동 중에 작성된 브루너의 저서들을 현대 신학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카를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에게 매주일 설교하는 목회자로서의 관심이 그의 신학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1927년에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종교 철학》 (Religionsphilosophie Evangelischer Theologie)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종교 철학이 일반적 · 이성적 종교 철학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기 계시 아래 있는 이성의 종교 철학이라고 강조하였다. 같은 해에 펴낸 변증법적 신학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론을 다룬 《중재자》(Der Mittler)에서는, 고대 교회의 그리스도론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내재적 삼위 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의 인격 부재성
(Anhypostasie)을 받아들였으나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인정하지 않았다.
인격적 신학의 단계 : 1929년 가을 네덜란드 대학의 초빙 강연과 다른 강연들을 모아 《하느님과 인간》(Gottund Mensch)이 출판되었는데, 브루너는 특히 이 강연에서 '인격적 존재의 본성 문제' 를 다루면서 인격적 신학을 준비하였다. 1931년에 그가 행한 강연들은 《말씀과 세상》(The Word and the World)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이듬해에 출판된 《계명과 질서들》(Das Gebot und Ordnungen)은 브루너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랑의 계명과 창조 질서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학을 전개하였으며, '사랑하라' 는 하느님의 첫째 계명으로부터 다른 모든 계명들이 파생된다고 이해하였다. 또한 그는 창조 질서에 따라 인간 실존에 근본적인 공동체의 5가지 차원, 즉 가정, 직장, 국가, 문화, 교회를 규정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적 윤리학은 인간 실존의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은총에 의한 의화(義化)를 통하여 인간 실존의 모순은 지양되고 선(善)은 정초된다는 것이다.
1929년에는 은총과 계시에 관한 인간의 본유적 능력에 관해 바르트와 브루너 사이에 의견 대립이 생겼다. 브루너는 자연적 인간 안에서 복음을 받기 위한 접촉점(Anknüpfungspunkt)을 강조하면서 '신학의 또 다른 과제'는 특별 계시를 인간 의식의 이러한 요소와 관련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자연과 은총》(Naturund Gnade, 1934)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명료화되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바르트의 은총 일변도의 신학을 비판했다. 옥스퍼드 그룹 운동을 지지한 이래 1935년에는 《성령의 역사(役事)에 관하여》(Vom Werk des Heiligen Geistes)와 《우리의 신앙》(Unser Glaube)을 출판하였다. 전자는 인간 실존의 세 가지 차원에서 일하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다루었고, 후자는 신학에 대한 대중적 개관을 다루면서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서술하였다. 이 기간 동안 브루너는 모든 정치적 · 사회적 체계는 인간에 대한 선(善) 이해에서 결정된다는 확신을 갖고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성과 함께 베버(M. Weber, 1864~1920)의 사회 사상, 키에르케고르(S.A.Kierkegaard, 1813~1855)의 실존 철학, 에브너와 부버의 인격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브루너는 신학적 인간학을 모색하였으며, 그 결과 《모순 속의 인간》(Der Mensch im Widerspruch, 1937)을 출판하였다. 여기서 그는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며, 이 형상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가능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적인 인간은 창조자에 대하여 반항하는자이며 죄인이라고 하였다. 1937년 가을에는 스웨덴 웁살라(Uppsala) 대학의 초빙을 받아 '만남으로서의 진리'에 관해 강연하였다.
교의 신학의 단계 : 브루너는 계시 신학적 관점에서 1941년에 《계시와 이성》(Offenbarung und Vernunft)이라는 교의 신학 책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하느님의 인식은 그분의 자기 계시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 출판된 《정의》(正義, Gerech-tigkeit)에서는 정의와 사랑을 구분하였다. 정의 개념을 정의하면서 자연법 개념을 도입한 브루너는 그리스도교적 자연법을 창조 질서 개념과 동일시하였으며, 사회 질서론에 있어서는 바르트와는 달리 그리스도론적인 입장없이 창조론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와 하느님에 관한 언급 없이 정치와 경제, 법론과 사회론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1946년에 그의 교의 신학 제1권인 《그리스도교 신론》 (Die Christliche Lehre von Gott)이 출판되었다. 신론을 기술함에 있어 브루너는 바르트처럼 삼위 일체론을 사용하지 않고 하느님의 성성(聖性)과 사랑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삼위 일체론이 성서적이고 교회적 신앙을 위한 호교론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바르트와는 대조적으로 브루너는 '선택' 보다는 '부르심' (Berufung)을 강조하면서 창조 질서에 대한 인간 인식 능력을 강조하였다. 섭리론과 보존론에 있어서도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독자성과 책임성이 강조되고 있다. 1950년에 출판된 교의 신학 제2권 《그리스도교 창조론과 구원론》(Die Christliche Lehre von Schoepfung und Erloesung)에서는 하느님의 본성과 의지의 역사적 실현을 다루었다. 여기서도 브루너는 바르트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가 모든 창조물에 대한 가능적 지배라는 입장을 거부하였다. 국가의 본질은 예수의 사랑과 모순되므로 국가에 대한 예수의 지배는 없다는 것이다. 사회 윤리는 바르트처럼 그리스도론에서가 아니라 율법과 창조 질서에서 근거했다. 교의 신학 제3권 《교회론, 신앙론, 종말론》(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Kirche, vom Glaube und von der Vollendung, 1960)에서는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역사적 자기 현현을 설명하면서 교회론과 신앙론을 다루었으며, 종말에 하느님 자기 현현의 영원성을 언급하면서는 하느님 왕국과 종말론을 다루고 있다. 그의 교의 신학의 원리는 바르트의 경우와 같이 '하느님의 자기 계시' (die Selbstoffenbarung Gottes)이다.
교의 신학 집필 시기에 브루너는 하느님의 빛을 지닌 현대의 비신앙인들과의 대화를 시도한 《하느님 말씀과 현대인》(Das Wort Gottees und der moderne Mensch, 1947)을 발표하였으며, 1948년도의 강연을 모아 출판한 《그리스도교의 걸림돌》(Das Aergernis des Chistentums)에서는 현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장애가 되고 있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 진리를 신약성서 입장에서 변증법적으로 설명하였다. 또 1951년에 펴낸 《교회의 오해》(Das Missver-staendnis der Kirche)에서는 신학과 교회의 형식적 구조 속에서 초대 교회의 특징인 공동체성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고 지적하였다. 1954년 브루너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초청을 받고 '미래와 현재로서의 영원'(Das Ewige als Zukunft und Gegenwat)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서 그는 신약성서의 종말론을 죽음을 넘어선 불멸성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으로 이해하였고, 생명의 종말을 인류사와 우주의 목적과 연결시켰다.
〔평 가〕 니부르(R. Niebuhr, 1892~1971)는 브루너를 탁월한 신학교 신학자'라고 불렀다. 그만큼 그는 현대주의 신학의 도전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지키려고 투쟁하였고, 현대의 무신론적 · 인본주의적 사상의 도전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변호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프로테스탄트 사상가였다.
브루너는 바르트와 함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붕괴시키고, 신학을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기초한 하느님 말씀의 신학으로 복귀하도록 하였다. 그는 성서의 하느님은 인간 이성이 고안한 철학의 하느님이 아니라 역사적 계시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인격적 하느님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이 인격의 하느님은 사랑과 거룩함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라고 하였다. 바르트의 신학은 보편 구원론을 지향하고 있지만, 브루너의 신학은 하느님의 사랑과 심판의 메시지가 지닌 변증법적 구조를 수용하고 있다. 바르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을 강조한 데 반하여 브루너는 하느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동시에 강조하였으며, 바르트가 자연 신학을 도외시하고 현대의 종교를 우상 숭배라고 평가 절하한 데 반하여 브루너는 자연신학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교적인 자연 신학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브루너의 신학은 논쟁적 신학이었다. 그는 공산주의, 현대 무신론, 진화론, 현대인의 사상, 종교 철학, 현대 지성인들의 회의적인 입장등에 대해 그리스도교적인 입장을 개진하였다. 특히 공산주의에 대해 자유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그의 입장은단호하였다. 《정의와 자유》(Justice and Freedom in Society)는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명료한 민주적 자유주의 신념을 보여 주고 있다. 또 그는 인격주의 신학을 정립하였는데,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교리적 체계가 아닌 보고(報告)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 보고는 중성적 ·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증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브루너는 가톨릭 신학과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원리에서 그리스도교 윤리를 정초하려고 하였다. 그는 창조 질서와 자연법에 연관된 사회 윤리론을 정초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브루너는 현대의 역사 비판학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역사적 근거가 결여된 신화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역사 비평학의 영향을 지나치게 수용하여 하느님의 강생 사건과 결부되어 있는 동정녀 탄생을 거부하였고, 창세기에 나타나는 인간 타락 이해에서 강생 사건을 바라봄으로써 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약화시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 변증법적 신학 ; 프로테스탄트 신학)
※ 참고문헌 The Japan Christian Quarterly, 1966. 7, p. 154/ J. Edward Humphrey, BobE. Patterson ed., Emil Brunner, Word Books, Waco, Texas, 1976, p. 20/ E. Brunner, Das symbolische in der Religioesen Erkenntnis, Tübingen, J.C.B. Mohr, 1921/ 一, Die Mystik und das Wort, Tübingen, J.C.B. Mohr, 1924/ 一, Der Mittler, Tübingen, J.C.B. Mohr, 1927/ 一, Gerechtigkeit, S. 20, 22, 100/ 一, Dogmatik Ⅰ , S. 174, 180, 205/ 一, Dogmatik Ⅰ , S. 374/ 一, Erlebnis, Erkenntnis und Glaube, Tübingen, J.C.B. Mohr, 1921. 〔金英漢〕
브루너, 하인리히 에밀(1889 ~ 1966)
Brunner, Heinrich E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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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하인리히 에밀 브루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