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신부. 카르투지오회(Carthusians)의 창립자. 축일은 10월 6일. 1032년경 독일 쾰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좋은 교육을 받은 것 외에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지만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쾰른의 성 구니베르토(St. Cunibert) 학교를 거쳐 프랑스의 랭스(Reims)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1055년경 다시 쾰른으로 가 사제 서품을 받고 1056~1057년경에 랭스의 학교로 돌아온 브루노 신부는, 그곳에서 문법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주교좌 성당 참사 위원으로 임명된 그는 약 18년 동안 교편 생활 중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가르친 학생들 가운데 하나가 훗날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가 된 외드(Eudes de Châtillon)였다. 브루노는 이곳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개혁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교회 쇄신에 앞장섰으며, 당시의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의 비도덕적인 생활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런데 1067년에 성직 매매로 마나세(Manassès de Gournay)가 랭스의 대주교로 임명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브루노는 앞장서 비판하였으며, 마나세는 브루노의 반대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1075년에 그를 랭스 대교구의 상서국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마나세는 교회의 재산을 사유화함으로써 많은 저항과 비난을 받았고, 이러한 반대에 브루노도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나세에 대한 문제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도 그를 비판하였다. 마나세는 이러한 저항에 부딪히자 자신을 비판한 사람들의 재산과 교회록을 빼앗았다.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브루노는 1076년에 쾰른으로 피신하였다가 마나세가 파면된 뒤인 1080년에 랭스로 돌아왔다. 교구 성직자들과 교황사절은 브루노를 랭스의 새로운 대주교로 추천하였으나 그는 극구 사양하고 그리스도의 가난한 생활을 본받는
수도 생활을 택하였다.
카르투지오회의 설립 : 세속을 떠나 고독 속에서 가난과 참회의 관상 생활을 하는 은수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브루노는, 1082년에 2명의 동료들과 함께 랭스를 떠나 몰렘의 성 로베르토(St. Robertus Molesme, 1027?~1111)를 찾아갔다. 그의 조언을 받은 브루노는 몰렘과 가까운 세셰퐁텐(Sèche-Fontaine)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그가 바라던 진정한 은수 생활이 아니었기에 성 로베르토를 다시 찾아가 은수 생활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 그리고 1084년에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은수 생활에 맞는 장소를 찾아 그레노블(Grenoble)로 가게 되었다. 그레노블의 주교인 샤토뇌프의 성 위고(Hugo)는 샤르트뢰즈(Chartreuse)라는 장소를 브루노에게 제공하였는데, 이곳은 해발 1,067m에 위치한 작은 골짜기로서 주변은 험준한 산맥들로 둘러싸여 인적이 없는 광야였다. 이곳에 경당이 세워졌으며, 브루노는 6년 동안 기도와 묵상, 노동생활을 하며 청빈을 지키고 엄격한 침묵 생활을 하였다. 카르투지오회는 이렇게 창설되었는데, 회원들은 이집트와 팔레스티나의 초기 수도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고독과 청빈, 금욕이 강조되는 은수 생활을 지켜 나갔다.
교황의 소환 : 1090년에 브루노는 옛 제자였던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교황은 당시의 어려운 교회 상황에 대한 스승의 자문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교황의 명에 순명하여 은수처를 떠난 브루노는, 이후 교황의 고문으로서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1092년에는 대립 교황 글레멘스 3세(1080~1100) 문제로 교황과 함께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Calabria)로 가기도 하였다. 당시 교황은 그를 레조(Reggio) 대주교로 임명하려고 하였지만, 브루노는 이를 거절하고 다시 은수 생활로 돌아가게 해줄것을 간청하였다.
제2의 은수 생활 : 로마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칼라브리아에 정착한 브루노는, 이곳에서 샤르트뢰즈에서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들의 생활에 감명을 받은 시실리아의 영주 로제(Roger) 백작으로부터 라 토레(LaTome)의 땅을 기증받아 이곳에 '라 토레의 성 마리아'라는 은수처를 설립하였다. 또 1094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이곳 성당을 축성하였다. 각각 떨어져 있는 독방에서 생활한 브루노와 동료들은 매일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시간에만 만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침묵과 고독 가운데 지냈으며 대축일에만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의 주요 일과 가운데 하나는 성서 사본의 필사였다.
1101년 7월 27일 교황 파스칼 2세(1099~1118)로부터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의 생활 방식을 인가받은 브루노는, 이듬해 10월 6일 라 토레 수도원의 분원으로 보스코(Bosco)에 있는 산 스테파노(San Stefano) 은수처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 그가 사망하기 전에 형제들 앞에서 행한 신앙 고백은 당시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의 이교를 반대하여 의도적으로 행한 것이었다. 그의 유해는 1122년에 라 토레의 성 마리아 수도원으로 옮겨졌다가 1193년에 다시 보스코의 산 스테파노 성당에 안치되었다.
〔작품과 공경〕 특히 교직 생활 중에 많이 남긴 브루노의 작품들은 당시의 동명 이인이었던 브루노(Bruno de Segni, ?~1123)에 의해 편집되었다. 15세기경에 카르투지오회에서 작성한 브루노의 설교집이 있었으나 화재로 모두 없어졌고, 오직 <풍요로운 명상>(De contemptu divitia-rum)라는 설교만 남아 있다. 또한 몬테 카시노의 베드로(Pierre Diacre)는 브루노가 직접 작성한 몇 가지 작품들을 전해 주고 있는데, 브루노가 자신의 옛 동료이자 랭스교구의 신부인 라울 르 베르드(Raoul Le Verd)에게 보낸 편지와 카르투지오회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베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은수자의 고독과 침묵의 기쁨과 은총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후자는 순명과 금욕에 대하 여 언급하였다. 그리고 브루노가 죽기 전에 받아쓰게 한 신앙 고백서도 그중 하나이다. 그 밖에 1509년에 발행된 시편과 바오로 서간에 대한 주석서들은 당시 괄목할 정도의 충실하고 박학 다식한 작품으로 불가타 성서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브루노는 동료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묘사하는 시적 감정도 풍부하였으므로, 그의 작품에는 영성적인 의미와 문학적인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
브루노는 카르투지오회의 회칙을 쓰지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수도원을 설립할 의도도 없었다. 그리고 베네딕도회와 같이 수도자들에게 서원을 하도록 의무를 부과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베네딕도회의 회칙을 수정하여 마련한 생활 규범들을 제시하였으며, 은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고독을 강조하였을 뿐이다. 카르투지오회는 교회 역사상 한 번도 개혁이 없었던 유일한 수도회이다.
브루노가 사망한 후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1514년에 교황 레오 10세(1513~1534)가 그를 구두로 시성하여 카르투지오회 내에서 브루노에 대한 공경 예절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1623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1621~1623)에 의해 축일이 10월 6일로 정해졌으며, 1674년에 교황 글레멘스 10세(1670~1676)는 모든 교회가 브루노의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다.
※ 참고문헌 B. Bligny, 《NCE》 2, Pp. 836~837/ 《EC》, p. 200/ H. Wolter, 《LThK》 2, p. 730/ R. Aigrain, 《Cath》 2, pp. 291 ~293/ D.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1987, pp. 63~64/ 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 Saints, Great Britain, 1983, p. 72/ Enzo Lodi, trans. by Jordan Aumann, OP,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New York, 1992, pp. 299~300/ 배문한, <성 브루노 사제>, 《경향잡지》 1435호(1987. 10), pp. 110~111. 〔편찬실〕
브루노(1032?~1101)
Br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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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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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