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낭만주의 시대 최고의 가톨릭 교회 음악가. 1824년 9월 4일 오스트리아의 안스펠덴(Ansfelden)에서 11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나 마을 학교의 교사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에게 오르간을 배웠으며, 11세에는 린츠(Linz) 근교의 교사였던 사촌 형 바이스에게서 오르간과 계속 저음(繼續低音, basso continuo, 저음부에 나타낸 숫자나 부호를 따라 즉흥적으로 화음을 붙여 하는 반주로 通奏低音이라고도 한다)을 배웠다. 13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르네트 수도원장의 추천으로 플로리아노 수도원 성당의 소년 성가대 대원이 된 브루크너가 음악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것은 그가 학교를 떠난 15세때까지였다. 1840~1841년에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교사 연수 과정을 이수한 데 이어 1845년에 모교인 플로리아노의 교사 겸 임시 오르간 주자가 된 그는, 1851년에 정식 오르간 주자가 되었으며, 1855년에는 고등학교 교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였지만 이를 포기하고 린츠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13년 간 활동하는 동안 1861년까지 빈 음악원의 제히터(S. Sechter, 1788~1867)로부터 대위법을 배웠고, 37세 때에는 키츨러(O. Kitzler)에게서 교향곡 작곡을 지도받았다. 이때 그는 19세기의 새로운 작곡 경향을 익혔으며 특히 바그너(W.R.Wagner)의 작품에도 심취하였다.
1868년 제히터의 후임으로 빈 음악원의 계속 저음 · 대위법 · 오르간 교수와 빈 궁정의 오르간 연주자가 됨으로써, 44세의 브루크너는 당대 제일의 오르간 연주자로 공인되는 명성을 얻었다. 이후 여행으로 잠시 떠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빈에서 작곡에 몰두하였던 브루크너는, 1891년에 빈 대학교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성 플로리아노 수도원 성당의 '브루크너의 악기 즉 오르간 밑에 묻히기를 희망하며 1896년 10월 11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교회 음악가로 남기를 바라는 그의 유언은 자신이 빼어난 오르간 주자였음을 인정한다는 차원을 넘어 그의 깊은 신앙심을 보여 주는 한 실례이다.
〔작 품〕 브루크너의 작품은 무게 있고 두드러진 교회 음악 창작에 정열을 쏟았음을 보여 준다. 그는 전생애에 걸쳐 교회 음악을 만들었고 이 작품들은 그를 작곡가로 인정받도록 하였는데, 편의상 그의 교회 음악은 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플로리아노 시대(1837~1855) : 하이든의 <천지 창조>와 <사계절>, 모차르트의 <미사곡>들을 듣고 작곡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낀 이 시기에 그는 바흐의 <푸가의 기법>과 <평균율>, 알브레히츠베르거(J.G.Albrechtsberger)의 <푸가> 등을 사보(寫譜)하였고, 빈 고전 시대의 교회 음악을 분석하며 계속 저음과 대위법을 독습하였다. 교회음악 창작에 몰두하였던 이 시기의 합창곡들로는 성체성가 <판제 린과>(Pange lingua, 1835, 1891 개작), 7곡의 <탄툼 에르고>(Tantum ergo, 1843~1854), 2곡의 <리베라메>(Libera me, 1843, 1854경), 2곡의 성수 예절 성가 <아스페르제스 메>(Asperges me, 1845) , <시편 114편>과 <시편 22편>(1850경) 등 아 카펠라와 오르간 혹은 트롬본의 반주에 의한 4~5성부의 작은 교회 작품들이 있다. 또한 독창자 · 합창 · 관현악단을 위한 4개의 대규모의 미사곡, 즉 <다장조 미사곡>(1842) <코랄 미사곡>(1844), 라단조 <레퀴엠>(1849, 1894) ,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1854), 내림 나단조의 <장엄 미사곡>(1854) 등이 작곡되 었다. 1850년의 <사순절 미사곡>과 <내림 마장조 미사곡>은 현재 스케치로만 남아 있다.
린츠 시대(1855. 11. 14~1868. 9. 30) : 2곡의 <아베 마리아>(1856, 1861), <시편 146편>(1860경), <시편 112편> (1863) 등 10곡의 작은 합창곡들과 관현악단 반주에 의한 3개의 대규모 미사곡을 비롯하여, 독창자 · 합창 · 관현악단을 위한 <라단조 미사곡>(1864, 1876 개작), <바단조 미사곡>(1868, 1876 1차 개작, 1890 2차 개작), 린츠 성당의 기공식을 위한 8성부 <마단조 미사곡>(186, 1882개작)이 있다. 마지막 미사곡은 야외 연주 때문에 이중합창과 관악기만으로 작곡되었다.
빈 시대(1868. 10. 1~1896.9.4) : 1865년부터 시작한 교향곡 창작의 시기로, <이곳은>(Locus iste, 1869), <아베 마리아>(1882), <시편 150편>(1892) 등 11곡의 작은 합창곡들과 대규모의 <테 데움>(Te Deum, 1884)이 작곡되었다.
회갑을 얼마 앞둔 원숙한 작곡가가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의 표현으로 작곡된 브루크너의 <테 데움>은 오늘날에도 초연 때와 같이 독립된 곡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작곡가의 뜻을 따라 그의 마지막 <라단조 교향곡>의 4악장으로 연주되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그의 <교향곡 9번>을 1887년부터 1896년에 걸쳐 3악장까지 완성한채 마지막 4악장-4악장은 스케치만 전해진다-을 끝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브루크너는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 9번>을 베토벤의 <교향곡 9번>처럼 합창 음악으로 마감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그의 음악이 지속적으로 상승되어 마지막 악장이 전 작품을 종합하는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1886년 리히터(H. Richter)에 의해 빈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에 대한 신앙인 브루크너의 희망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평 가〕 교향곡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 브루크너는 바그너와 명지휘자 니키슈(A. Nikisch)가 지적한 대로 '베토벤 이후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 였다. 그는 <교향곡 0번>(1863~1864)을 제외하고도 9곡의 대규모 교향곡들(1865~1896)을 작곡하며 교향곡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브루크너의 진가는 이러한 양적인 것보다는 독창적인 그의 음악관에 있다. 브루크너는 "새 시대는 새 음악을 요청한다"는 시대 정신을 거슬러 올라가며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이 완성된 1824년 이래 40여 년 동안 단절되었던 절대 음악의 맥을 이었지만, 브람스나 한슬릭(E. Hanslick) 등의 보수파에도 속하지 못하고, 바그너나 리스트 등의 진보파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양측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는 브루크너의 절대 음악적 태도와 주관적인 표현 의지가 교향곡안에서 충돌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고전적 교향곡의 전통 안에 머무르고자 하였던 그의 신념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브루크너의 이러한 절대 음악적 사고는 브람스로 이어지며 그의 4개의 교향곡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근본적으로 브루크너는 인위적인 모든 꾸밈을 싫어하였다. 자연스러운 모티브와 옥타브, 4도 · 5도의 원초적 음정들을 사용하여 비감정적 음향을 추구하였던 그가 음악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은 자연스러움이었다. 음악이 자연과의 일치를 통해 순수하고 자연스러울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주관적 표현을 강조하던 그 시대에서는 분명 예외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낭만 시대의 바로크적 인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현대의 음악학자들이 브루크너를 '조숙한 천재' 모차르트와 비교하여 '대기 만성형의 노력가'라 하며 그의 고전적 정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오르간의 두터운 편성과 명상적이고 비감정적인 음향 등 브루크너 음악의 특징들이, 브루크너가 가톨릭 교회 음악의 전통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브루크너가 실천 신앙인이었다는 증언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독일 음악학자인 블루메는 그의 순수한 교회관을 설명하면서 "브루크너만큼 교회 직무를 겸허하고 성실하게 수행하였고, 기도 · 자기 성찰 · 참회 · 성사적 삶을 충실히 살아온 작곡가는 19세기에는 찾아볼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브루크너에게 창작은 곧 신앙의 표현이었는데 그가 작곡을 마치고 끝에 자주 기록하였던 'O.A.M.D.G."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Omnia ad Majorem Dei Gloriam)라는 머리글자이다. 또한 브루크너는 개작의 명수였다. 그는 제자나 친구들의 충고로 여러 번 작품들을 수정하고 개작하였다. 신뢰할 만한 판본은 1930년경 하스(R.Haas)가 이끄는 빈 국제 브루크너 협회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자필 악보의 처음 판본들은 오르간 음향이 뛰어나고, 1930년대의 수정판본(1차 인쇄본)은 바그너와 리스트적 음색 혼합적 사고가 두드러진다. 목관 · 금관 · 현악의 그룹별 분리 편성이 없어지고, 바로크적 층계적 강약이 점진적 강약으로 바뀌고 템포도 자주 변하였다. 그의 작품 전집은 1930년부터 하스에 의해 출판되기 시작하여 1944년에 11권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으며, 1945년에 노박(L. Nowak)에 의하여 재편집되었다. (→ 낭만주의)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편저, 《음악은이》 1~2, 세광음악출판사, 1990~1991, pp. 153, 460~463, 492f/ F. Blume, 《MGG》 2, pp. 341~382/ D. Cooke · L. Nowak, 《NGDMM》 3, pp. 352~371/ W. Gurlitted.,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1, Schott's Söhne, 1959, pp. 237~239. 〔趙善字〕
브루크너, 요제프 안톤(1824~1896)
Bruckner,Josef Anton
글자 크기
6권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