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룸하르트, 크리스토프 고트리프 Blumhardt, Christoph Gottlief(1842~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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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사. 사회주의자. 정치가. 1842년 6월 1일 독일 밖 르템베르크(Württem-berg) 지방 작은 마을 뫼트링겐(Mötlingen)에서 루터교 목사인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 1805~1880)의 아들로 태어나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중등 교육을 받은 후 1862년부터 5년 동안 튀빙겐(Tübingen)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869년 가을부터 받볼(Bad Bol)에서 아버지를 도와 목회 활동을 하다가 1880년 2월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후임 목사가 되었다. 그가 목회하던 독일 서남부 지방은 괴핑겐(Göpingen)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 독일 산업화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사회 정치적인 문제들, 즉 노동자의 권익 문제와 환경 오염 문제 등을 그는 자신의 목회 과제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1899년 6월 19일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대중 집회가 괴핑겐에서 개최되었을 때, 블룸하르트는 이 집회에 참석해서 연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동 운동에도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을 이끄는 '사회 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에도 가입하였으나, 목사가 무신론 정당이자 노동 운동 단체인 사회 민주당에 가입하였다는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1900년 12월 뷔르템베르크 지방 의회 선거에서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가로서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서 활동한 블룸하르트는, 6년 뒤 정계에서 물러나 다시 받볼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생애 말년에는 주부 근로자들의 자녀들을 돌보는 어린이 집을 운영하다가 1919년 8월 2일 사망하여 받볼에 있는 묘지에 묻혔다.
〔사 상〕 블룸하르트의 신학 사상은 그의 아버지 요한크리스토프의 정신 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경건주의, 특히 벵겔(J.A. Bengel, 1687~1752)과 외팅거(Ötinger)의 경건주의에 젖어 있었는 데, 아들의 신학 사상 또한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의 독특한 신학 세계는 기도로써 한 젊은 처녀(Gottliebin Dittus)의 병을 치유하는 사건으로 시작되고 발전되었다. 이 치유 사건을 통해서 그는 하느님나라가 성서에 약속된 대로 지금 여기에 도래하였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는 물론 아들인 블룸하르트에게도 가장 중요한 신학 주제가 되었으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학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블룸하르트는 차츰 경건주의를 비판하게 되었고, 더불어 아버지의 정신 세계와도 점차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는 경건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경건주의자들의 영원한 세상에 대한 동경, 그리고 이 세상 현실에 대한 부정적 자세를 비판하였고, 경건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주관주의 및 개인주의적인 신앙 경향이 이기적인 신앙 자세로 변하였음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아버지의 신학도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성서를 중요시하는 일과 고상한 이론만 거론하는 신학을 거부하는 성향은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하게 하였다. 그는 가르침과 제도로 굳어진 교회는 '죽은 그리스도교 라고 비난하였으며, 이러한 교회는 결코 하느님 나라와 같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함께, 사도 시대의 교회를 강조하면서 문자로 굳어진 교리와 신조 및 신앙 고백을 비판하였으며, 하느님 나라는 교회의 모든 제도와 모든 가르침을 심판하고 교회를 새롭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통주의 및 경건주의를 공격하면서 이 세상 현실 안에 세워질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의 독일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입장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기존의 모든 것을 심판하고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이른바 종말론적 하느님나라에 대한 이해는 자유주의 신학이 설명하는 하느님나라, 즉 개인 윤리 및 사회 도덕의 성숙을 통해서 이 세상 안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는 하느님 나라와 많은 차이가 있다.
블룸하르트의 신학 사상은 20세기 초,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스위스 종교 사회주의 운동과 변증법적 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 종교 사회주의 역시 그의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신학 사상은 특정된 신학적인 구조 속에 맞추어져 있지 않은 까닭에, 이 시기의 많은 신학자들, 특히 라가츠(L. Ragaz), 쿠터(H. Kutter), 바르트(K. Barth), 투르나이젠(E. Thurneysen), 브루너(E. Brunner) 등은 그의 사상을 각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다양하게 자기의 사상으로 소화하였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의 정신 세계는 그리스도교 외의 타종교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의 저서를 통해서, 그리고 불교 승려와의 대화를 통해서 아시아의 종교를 이해하였으며, 아프리카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를 통해서 아프리카의 민속과 종교를 이해하였다. 또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한 사위 빌헬름(Richard Wilhelm)을 통해서는 중국의 전통 종교들을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서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배타적인 요소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진리를 타종교와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서유럽 제국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교를 비판하면서 선교 현장에서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모습과 전혀 다른 새로운 토착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가르침과 제도와 관습으로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교 외의 타종교들도 그리스도교와 함께 비판하면서, 종교와 하느님 나라의 뚜렷한 구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가 이제 온 세상에 우주적으로 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평 가〕 근세와 현대의 대부분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데카르트(R. Descartes)의 영향 아래에서 자연을 신학의 주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블룸하르트는 산업 사회의 발전이 빚어 낸 생태계의 위기를 염두에 두 고 새 창조 ·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자연 이해는 당시 독일 관념론과 같은 맥락이었는데, 자연을 있는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인간이 인식하는 자연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데카르트적 유산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인간 중심적인 자연관, 그리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그릇된 자연 인식을 비판하였다. 또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이 계약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생태계에 창조주 하느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희망하였다.
(→ 변증법적 신학 ; 브루너, 에밀 ; 프로테스탄트 신학)
※ 참고문헌  K.-J. Meier, Christoph Blumhardt. Christ-Sozialist-Theologe, Bern · Frankfurt am M · Las Vegas, Peter Lang, 1979/ G. Sauter, Die Theologie des Reiches Gottes beim älteren und Blumhardt, Ziurich, 1962/ H.-K. Lim, Jesus ist Sieger! bei Christoph Blumhardt. Keim einer kosmischen Christologie, Bern · Frankfurt am M · Las Vegas, Peter Lang, 1996. 〔林熙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