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세계에 대한 악의 우월함을 체험하고 확신하는 감정, 태도, 신념 및 사유 체계. 낙관주의(樂觀主義, optimism)와는 반대 의미로 '염세주의' (厭世主義)라고도 번역하는 이 개념은, 개인의 성향이나 가치에 대한 경험과 문화적 상황들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용어의 역사적 기원〕 비관주의적 태도와 이론들은 이러한 현상을 묘사하는 용어가 사용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라틴어 형용사 '나쁜' (malus)의 최상급인 '가장 나쁜' 이라는 의미의 '페시무스' (pessimus)에서 유래한 이 용어가 영어로 처음 사용된 것은 영국의 서정 시인인 콜리지(S.T. Coleridge, 1772~1834)의 1795년 서한을 통해서였으며, 일반화된 것은 19세기부터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용어는 악이 선보다 우세하다는 가정에 대한 철학적 근거들을 제시하려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이러한 경험들을 일반화시키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유형 및 분류〕 일반적으로 비관주의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각 개인의 경험 또는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에서 악이 우월하다는 '심리학적 또는 인류학적 비관주의' , 물질적인 세계를 악 또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다는 '현실-세계적 비관주의' , 역사적 · 문화적인 한 시기 또는 역사를 결정하는 세력과 제도들의 악에 대한 '역사적 비관주의' , 전체로서의 우주 속에 악이 우월하다는 '보편적 또는 우주적 비관주의' 등이다.
한편 철학적 입장에서는 비관주의를 여섯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현존하는 인간 존재 즉 세계가 악하다는 관점의 경험주의적 비관주의' , 둘째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며 세계가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훨씬더 좋았을 것이라는 관점으로, 무신론적이고 이원론적인 성격의 형이상학적 비관주의' , 셋째는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대하여 지극히 부정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사회학적 비관주의' , 넷째는 도덕적으로 인간은 근본적인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윤리적 비관주의' , 다섯째는 이 세계의 많은 악은 개인들의 행복을 능가한다는 '쾌락주의적 비관주의' , 여섯째는 문명의 실제적 발전가능성을 철저히 불신하는 입장의 '문화적 비관주의' 등이다.
〔대표적 사상가〕 쇼펜하우어 : 비관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는 세계를 표상(表象)이라고 간주하고 '맹목적 생의 의지'를 강조하는 비관주의를 표명하였다. 그는 현상의 영역은 '인간 개념화' 의 결과에 따른 환상적인 것이며, 참다운 세계란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한 지각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비합리적 생의 의지' 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를 발견한다는 것은 '존재의 궁극적이며 모면할 수 없는 악' 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였다.
인간의 삶이란, '생의 의지' 라는 본능에 사로잡혀 있는 영원히 저주받은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인간 생명의 핵심적인 본성은 욕망이며 이러한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욕망이 충족된다 하더라도, 그 욕망의 충족은 더욱더 커다란 욕망이나 권태를 증가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지로서의 세계는 완전히 악한 것이며, 선이란 결국 환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환상을 넘어 그 자신의 지성이라는 본성을 통해 자기 속의 동물적 본성을 느끼며, 필연적인 죽음에 직면해서도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상들 중에서 최악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속에는 아무런 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의 길은 '생의 의지를 포기' 하는 것뿐이며, 이는 오직 위대한 예술가, 사상가 및 예언자들에게만 가능하고, 그것 또한 지극히 제한적이며 일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 상황의 비관주의에도 윤리는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 윤리란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동정(함께함)과 그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르트만 :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와는 대조적으로 하르트만(K.R.E. von Hartman, 1842~1906)은 자신의 비관주의를 "행동의 기쁨으로 가득 찬 강력하고 정력적인 비관주의" 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상들 중에서 최악의 상태는 아니며, 논리적인 요소들이 이 세상은 가능한 최상의 세계임을 보장해 주지만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르트만은 인간의 동기(動機)와 행위 속에서 쾌락과 불쾌 간의 상호 작용을 고찰하면서 경험적 비관주의 또는 행복론적(eudaemonistic) 비관주의에 대해 주장하였다. 또 점점 그 강도가 깊어져 가는 12개의 논증들이 쾌락에 대한 고통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하여 제시되었는데, 이러한 논증들은 '행복론적 비관주의' 를 확증해 주는 '불쾌의 과다' (excess of Unlust)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지지를 받는 데 오랜 시일이 걸렸던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와는 달리 하르트만의 《무의식의 철학》(Die Philosophie des Unbewusten, Berlin, 1869)은 19세기 후반기의 지적 · 문화적 변화로 인하여 곧바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하르트만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그의 비관주의를 허무주의(nihilism)로 변질시켰는데, 반센(J. Bahnsen, 1830~1881)은 증오와 불만과 공포에 의해 찢겨진 '손상된 정신의 지배' 를 분석하였으며, 바츠(P. Batz, 1841~1876)는 비관주의를 '전적인 절멸' 이라는 결론으로까지 이끌어 냈다. 바츠는 또한 자신의 저서 《구원의 철학》(Philosophie der Erlösung, vols. 2, Berlin, 1876~1886)에서 '절멸에의 의지' (Vernichtungswile) 속에 유기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유기적인 모든 개인의 본성까지 포함시켰으며, 개인의 윤리도 결국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세계 구원의 한 수단으로 동정을 지키고 자살하라고 암시하였다.
니체 :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니체(F. Nietzsche)는 인생이 고난과 악의 우세로 가득 차 있다는 그의는 동의하였지만, 이 견해에 근거한 '체념과 동정의리' 는 거부하였다. 또한 의지에 대한 형이상학적(Dionysian'man) 또는 '초인' 을 통하여 '낙관주의 연약한 주장들'도 거부하면서, 그 대신 '디오니시오적 인간' (Dionysianman) 또는 '초인' 을 통하여 '낙관주의 연약한 주장들'과 형이상학적 위로의 기술' 로써의 비극 모두를 초월할수 있는 삶과 힘에 대한 강력한 긍정을 요청하였다. 비록 '선악을 초월한' 삶에 대한 니체의 사상이 애매하고 오해하기 쉽지만, 그가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에 대한 전통적 개념들을 초월하여 개념적인 것부터 개인적인 삶과 가치의 영역으로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음은 분명하다. 현대 문명을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던 니체는 그의 윤리학이 선악을 초월하였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비관주의를 초월한다. 선과 악의 균형에 대한 추상적인 이론들은 권력 위에 미래의 문명을 세워야만 할 현대인의 곤경과 기회를 반영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산타야나와 프로이트 : 인간 문제들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과 실천적인 접근에 있어서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였던 산타야나(G. Santayana)와 프로이트(S. Freud)는 쇼펜하우어와 유사성을 보이는 비관주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산타야나는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모든 영속성과 힘, 삶의 궁극적인 근거와 그에 따라 발견된 이성과 정신의 삶을 살려는 인간의 노력 속에 담긴 비극의 궁극적인 근거를 발견하였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통찰을 통하여 산타야나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에 대한 논쟁을 초월하였는데, 니체와는 달리 초인의 자기 중심적인 이상 속에서가 아니라 '금욕적인 수용과 자족의 이상' 속에서 악의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해답을 발견하였다.
프로이트는 《문화와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 London, 1930)에서 인간의 고통이 자연의 월등한 힘, 육체의 부패와 사망, 그리고 사회 관계와 제도의 결핍에서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들 중 처음의 두 가지는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며, 세 번째는 인간의 문화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불행과 소외라고 하였다. 여기서 윤리적 판단들이란 단지 논증으로 착각을 뒷받침하기 위한 노력' 일 뿐이다. 때때로 주관적인 상상과 사상으로 이루어진 환상의 세계는 성공적인 승화와 교정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의하면, '건강함' 에 이르는 궁극적인 길은 정신 분석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우리 존재의 자연적이며 문화적인 근원으로 돌아감으로써만 발견될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초기 저서인 《환상의 미래》 (The Future ofan Illusion, London, 1928)에서 프로이트는 '종교의 소멸' 을 통해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질 이상에 대한 많은 희망을 제시하였다.
〔비관주의와 현대 철학〕 현대에서 비관주의에 관한 논의의 특징은 선 · 악에 대한 가치 평가로부터 한 개인에 대한 유명론적 · 현상학적인 분석으로의 변천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인간의 삶과 가치관의 혼란과 붕괴, 과학 기술의 진보로 인한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제기되는 도덕적 · 문화적 불확실성 및 공포, 인류 사회의 분열과 투쟁 등으로 인하여, 비관주의 문제는 상대적인 선과 악을 규정하려는 시도로부터 선을 성취할 수 있는 인간의 상황과 능력, 자원의 문제로 그 방향이 바뀌었다. 제임스(W. James)와 듀이(J. Dewey)의 업적을 통해서 도덕적 낙관주의가, 화이트헤드(A.N. Whitehead) 등에 의해서는 합리성과 창조성 및 보편 가치의 발견에 대한 형이상학적 토대가 제시되었고,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자 또는 러셀(B. Russell) 등을 통한 비관주의적 견해 역시 도덕적 낙관주의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러셀은 《자유인의 신앙》(A Free Man's Worship, 1903)에서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단순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지만, 그 자신과 동료의 능력에 대해서 살아 숨쉬는 그리고 힘찬 신앙의 힘을 다하여 '자연주의적 비관주의' 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즉 선과 악에 대한 자연의 질서를 중립적인 것으로 무시하고, 주어진 역사적 상황 속에 '던져져 있는 자의식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현대의 실존주의는 쇼펜하우어에게서 시작된 내향적(inverted) 낭만주의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그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살도록 '내던져진' 실존 자체는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이며, 운명적이고 부조리하다고 한다. 또한 문명에 대한 루소(J.J. Rousseu)의 비판은 그 영역이 확대되고 변천되었다. 즉 인간을 전락(轉落)시키는 것은 문명뿐이 아니라, 인간이 발견하는 전체 상황이 현존재(Dasein)에게 고독과 소외와 절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비관주의가 아니다. 여기서 개념적 이론은 그 타당성을 상실한다. 한 개인의 응답은 의지의 맹목적 긍정이건 혹은 대결에서의 굴복을 선택하건 '실존적' 임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을 따른다면, 세상의 선에 대한 그 어떠한 이론도 타당성이 없으며 그것은 단지 '비합리적 희망' 에 불과할 뿐이다. 비록 하이데거(M. Heidegger)와 사르트르(J.P. Sarttre)의 저술들이 비관주의에 대한 주제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은 세상의 선과 악의 상대적 우월성에 대한 논쟁을 거부하였다. 또한 실존주의 운동의 보다 철저한 비합리주의적 추종자들 역시 이러한 전통적 논의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선악의 완전한 전도(顚倒)' 및 '악을 통한 구속(救贖)의 교의' 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관주의와 종교〕 삶의 선 또는 악에 대한 문제는 인간의 안위(安危)가 결정되는 유익한 혹은 해악한 힘들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기 때문에 비관주의 또는 낙관주의가 종교적 신념들의 두드러진 한 측면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적 신념 안에 포함되는 비관주의에는 여러 유형의 비관주의 모두가 포함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에는 낙관주의적인 면과 비관주의적인 면 모두가 발견된다. 종교의 본질을 악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한다면, 비록 모든 개인과 집단이 구원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낙관주의적 요소는 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된다. 종교에서의 주술적 요소는 그것이 바라는 바에 대한 성취를 약속하는 한, 낙관주의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적 의식이나 기도의 좌절은 일반적으로 비관주의를 지지하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하다. 구원은 내세에까지 미루어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는 눈물의 골짜기 또는 선과 악의 역사적 전쟁터, 저항해야 할 욕망의 원천지, 또는 아무런 실체도 지니고 있지 않은 환상의 질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 속에는 또한 공동체적 삶과 신비적 · 예언자적 승화로 표현되는 세상을 긍정하는 기쁨 또한 포함되어 있다. 특히 종말론에 대한 교의 속에는 소멸되어야 할 세상에 대한 비관주의와, 내세에 주어질 새로운 삶에 대한 기쁨의 낙관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종교는 종교의 교의가 인간에게 구원을 제시하고, 세상에 대한 긍정과 세상에 대한 부정의 태도를 환기시키며, 세상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희망에 관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는 한, 비관주의 혹은 낙관주의의 문제와 연관되어질 수밖에 없다. 세계 종교들의 대부분의 교의는 자연적인 악과 역사적인 죄악들 그리고 인간이 감수해야만 하는 인간의 한계들에 관한 심오한 직관을 반영하고 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힌두교와 불교의 교리에서는 비관주의적인 측면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는 낙관주의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주장도 가능하다.
〔비평 및 평가〕 인간의 삶과 환경 안에서 제기되는 선악의 문제는 너무도 복잡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철학적 도구 혹은 개념으로 그 문제의 해결을 바란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과 세계가 과연 그 본질에 있어서 선인지 악인지 혹은 그 둘도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삶과 세계에 대한 체험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감정, 태도, 신념, 사유 체계를 가지게될 뿐이다. 분명한 것은 개인과 그를 둘러싼 공동체, 개인들이 살아가는 사회, 직면하는 역사, 그리고 문화 등등의 종합을 통해서만 한 개인이 이르게 된 비관주의적 경향을 폭 넓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비관주의의 문제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영원히 인류 공동체 그리고 그 구성원들에게 하나의 문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비관주의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마르셀(G. Marcel)이 《여행하는 인간》(Homo Viator, Paris, 1944)에서 낙관주의와 희망을 구분해 보였던 '희망' 일 것이다. (↔ 낙관주의 ; → 니체, 프리드리히 ;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 프로이트, 지크문트 ; 하르트만)
※ 참고문헌 L.E. Loemker, Pessimism and Optimism, 《EP》, pp.114~121/P. Siwek, Optimism in Philosophy and Pessimism in Philosophy, New Scholasticism, vol. 23, 1948, pp. 239~297, 417~4391 J. Sully, Pessimism : A History and a Criticism, London, 18771 R.A. Tsanoff, The Nature of Evil, NewYork, 1931/ H. Vyverberg, Historical Pessimism in the French Enlightenment, Cambridge, Mass., 1958/ R.B. Bailey, Sociology Faces Pessimism : A Study of European Sociological Thought amidst a Fading Optimism, The Hague, 1958/ F. Copleston, Arthur Schopenhauer : Philosopher of Pessimism, London, 1946/ A. Dorner, Pessimismus : Nietzsche und Naturalismus, mit besonderer Beziehung auf die Religion, Leipzig, 1911/ W. Gass, Opimismus und Pessimismus, Berlin, 1876/ G. Marcel, Homo Viator, Paris, 1944(trans. by Emma Craufurd, Chicago, 1951)/M. de Unamuno, Des sentimiento tragico de la vida en los hombres yen los pueblos, Madrid, 1913(trans. by J.E.C. Flitch, The Tragic Sense of Life in Men and in Peoples, London, 1912). 〔吳將均〕
비관주의 悲觀主義 〔라〕pessimismus 〔영〕pessim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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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비관주의의 문제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영원히 하나의 문제로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