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이탈리아의 작곡가. 후기 바로크 시대에 기악 음악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
〔생 애〕 1678년 3월 4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그의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 Vivaldi)는 어려서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이발사가 되었으나 바이올린 연주를 잘하여 성 마르코 성당의 관현악단 단원이 된 인물이었다. 후에 그는 아들 안토니오와 함께 베네치아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명단에 들기도 하였으며, 10세 된 아들을 자신의 대리 연주자 겸 후임 연주자로 악단에 입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레그렌치(G. Legrenzi, 1626~1690)로부터 오르간과 음악 이론을 배우게 하였다. 당시 베네치아는 성 마르코 성당의 화려한 교회 음악, 10여 개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던 오페라 작품들, 불우 미혼 여성들을 보호하던 기숙사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Ospedale della Pieta)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악 음악들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 음악의 거장들인 레그렌치, 폴라롤로(C.F.Pollarolo, 1653~1722), 롯티(A. Lotti, 1667~1740), 가스파리니(F.Gasparini)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런 여건 속에서 성장한 비발디는 이 세 분야 모두에서 매우 의욕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25세 이전의 그에 대한 기록은 음악적인 면보다는 성직자로서의 기록이 더 많다. 1693년 9월 19일에 사제가 되기 전의 첫 단계인 수문품(ostianus)을 받고, 1700년에 부제품, 1703년 3월 23일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부제 기간이 3년이나 된 것은 아마도 베네치아 밖에서 음악 공부를 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에서 활동 중이던 코렐리(A. Corelli, 1653~1713)의 경향이 그의 초기 작품에 엿보이기 때문이다.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그는 약 1년 동안 정상적인 사제 생활을 하였지만, 선천적인 심장 질환(협심증)으로 사제 직무에서 면제를 받았다. 그러나 붉은 색 머리카락 때문에 '빨강 머리 신부'(il prete rosso)라고 불렸던 그는 사망할 때까지 사제의 신분으로 살았다.
1703년부터 비발디는 여성 기숙사 '오스페달레 델라피에타' 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많은 일들을 하였다. 1709년에 완성된 <작품 2>(Op. 2)에서 그는 스스로 '관현악단의 악장 (maestro de concerti)이라는 칭호를 썼
지만 사실 공식적으로는 7년 뒤에 이 직책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가 정식 직원으로 채용된 것은 1711년이었고, 그때는 바이올린 교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그는 젊은 처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고, 소나타 모음곡집 <작품 1>과 <작품 2>를 출판하였으며, 수많은 협주곡들과 교회 음악 작품들도 작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1710년부터는 그의 작품들이 독일에서, 몇 년 뒤에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유명해졌고, 그의 협주곡 모음집인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 Op. 3)이 출판된 것은 1712년 암스테르담에서였다.
1713년 비천차에서 첫 오페라 작품을 공연한 후, 1714~1718년에는 베네치아에서 여덟 개의 오페라 작품들을 공연하였는데 공연 때마다 비발디는 직접 연주를 하였다. 오라토리오 <모세>(Moyses Deus pharaonis, 1714)와 <유딧의 승전>(Juditha triumphans, 1716), 그리고 몇 개의 교회 음악곡들이 이 기숙사의 관현악단을 위해서 같은 시기에 작곡되었으며, 1713년에 그의 전임자인 가스 파리니가 기숙사를 떠나자 비발디는 자연 강력한 후임자
로 떠올랐다. 오페라와 교회 음악곡에 집중했음에도 그의 기악곡들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1717년까지 여러 곳에서 출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오페라들은 1718~1721년에 플로렌스, 뮌헨, 비천차, 파르마, 밀라노 등지에서도 연주되었다. 그는 독일 음악가들의 방문도 받았는데, 특히 드레스덴의 한 음악가 모임의 회장이었던 작센 영주의 아들을 동반하여 비발디와 친교를 맺게 한 피센텔(Pisendel)은 1717년에 귀국한 후에는 비발디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독일의 헤센-다름슈타트(Hessen-Darmestadt)의 영주인 필립(Philipp) 공을 위하여 만투아에서도 활동하였는데, 이때 친분을 맺게 된 안나 지로(Amna Giraud)는 후에 비발디의 제자가 되어 그의 오페라에서 주연을 맡았다. 여성 기숙사와의 관계는 1723년에 비발디의 높은 명성을 인정하는 조건에서 계약 갱신이 되었으나, 2년 뒤에 해제되어 10년 동안의 공백기를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페라 작곡으로 유명해진 그는 외국으로부터 많은 초대와 초빙을 받았고, 작곡을 위촉받기도 하였으며, 1724년에는 오페라 <롬바르디의 취향>을 교황 앞에서 연주하여 큰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1725년에는 협주곡 <사계>(Four Seasons, Op. 8, No. 1~4)를 작곡하였고, 같은 해에 루이 15세의 결혼식을 위해서 작곡을 의뢰받고 <글로리아>(Gloria)를 완성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그는 1727년에 프랑스 대사가 개최한 축제에서 기악곡들과 함께 <테 데움>(TeDeum)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1729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빈, 프라하, 드레스덴 등을 여행하였고, 1731년에는 베로나에서 다시 오페라를 공연하였으며, 1735년부터는 다시 여성 기숙사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교회 기관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신부이면서도 미사를 봉헌하지 않고, 또 안나 지로와의 관계를 의심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와중에도 그는 국내외의 연주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기숙사에서의 위치뿐 아니라 베네치아 도시에서의 명성도 흔들리고 있었다. 1739년에 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이 베네치아에서 공연된 후, 이듬해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여행을 떠났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카알 6세 황제의 도움을 기대했던 것 같은데, 황제의 죽음과 이에 따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그의 기대를 꺾었던것 같다. 1741년 7월 28일 빈에서 사망하여 빈의 성 스테파노 성당에서 조졸한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평 가〕 비발디의 음악 수준이나 음악사적인 의미는 20세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독일 바로크 음악에 끼친 영향은 독일인들에게 의하여 재평가되고 있는데, 특히 독일이 자랑하는 바흐(J.S. Bach, 1685~1750)가 그의 작품을 가지고 BWV(바흐 작품 번호) 593, 594, 972, 973, 976, 980 등을 썼다는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바흐의 부흥 운동이 활발해짐과 더불어 비발디의 연구와 재평가도 이루어졌으며, 리토르넬로(ritornello) 형식, 즉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 구성을 기반으로 협주곡을 확립한 공적도 공인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1710~1730년에 독일 기악곡에 끼친 그의 영향은 대단히 크며, 간접적으로는 고전파 교향곡의 선구자로도 인정받고 있다.
엄청난 양의 기악곡들에 비하면 그의 교회 음악곡으로는 미사곡>, <글로리아 D장조>, <마니피캇>, <통고의 성모>(Stabat Mater) 등이 있고, 오라토리오로는 <모세>, <유딧의 승전>, <동방 박사 세 사람> 등이 있으며, 그 외에 몇 곡의 모테트가 전해지고 있다. (→ 가톨릭 음악)
※ 참고문헌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mwart, Deutscher Taschenbuch, Bärenreiter, 1989/ The New Grove Dictionary ofMusic and Musicians, Macmillan Publischer, 1980. 〔白南容〕
비발디, 안토니오 루치오 Vivaldi, Antonio(1678~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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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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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