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대구시 서구 비산1동 677 소재. 1927년 11월 1일 대구(현 계산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 바오로. 관할 구역은 비산1 · 2동 전 지역과 비산3 · 5 · 6동 일부 지역. 〔교 세〕 1937년 1,108명, 1958년 2,352명, 1968년 2,719명, 1988년 4,012명, 1996년 3,603명. 〔역대 신부〕 초대 미알롱(Louis A. Mialon, 孟錫浩) 알로이시오(1927. 11~1928. 11), 2대 아몽(Jean-Marie Hamon, 河濟安) 요한 마리아(1928. 11~1929.4), 3대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1929. 5~8), 4대 이종필(李鍾弼) 마티아(1931. 11~1943. 2), 5대 를뢰(P. Leleu, 노) 베드로(1943. 2~1948. 6), 임시 프로와드보(R. Froidevaux, 趙文道) 라이문도(1945.4~10), 6대 이기수(李己守) 야고보(1948. 6~1950. 1), 7대 정수길(鄭水吉) 요셉(1950. 1~1955. 6), 8대 김영제(金永濟) 요한(1955. 6~1956. 4), 9대 이기수(1956. 4~1960. 9), 10대 이창호(李昌鎬) 안드레아(1960. 9~1961. 12), 11대 조상익(趙相益) 베드로(1961. 12~1964. 7), 12대 신현옥(申鉉玉) 치릴로(1964. 7~1967. 12), 13대 최병선(崔炳璇) 요한(1967. 12~1972. 10), 14대 이상호(李相浩) 베드로(1972. 10~1976. 2), 15대 박춘식(朴春植) 야고보(1976.2~1977.3), 16대 박상태(朴相泰) 루도비코(1977. 3~1983.1), 17대 최병선(1983. 1~3), 임시 김경식(金烱式) 보니파시오(1983. 3~5), 18대 이정추(李正秋) 바오로(1983.5~1986. 5), 19대 김상규(金尙奎) 필립보(1986. 5~1990.7), 20대 맹봉술(孟奉述) 요한(1990. 7~1993. 10), 21대 조성택(趙成澤) 요한(1993. 10~현재).
〔공소 시대〕 비산 즉 날뫼는 대구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곳으로, 1868년 서울 절두산에서 순교한 이(李) 루도비코 곤자가의 가정이 이미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이전부터 이곳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상주 땅에서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체포되어 대구 관덕당에서 순교한 성 이윤일(李允一, 요한)의 매부 이응칠(李應七, 토마스)도 이 무렵에는 날뫼에 살고 있었다. 그 후 날뫼에 뿌리를 내린 신앙은 이씨 집안에 의해 꾸준히 이어져 오게 되었으며, 신앙의 자유기에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1909년 대구 본당의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에 의해 '날뫼 공소' 가 설립되었다. 이때 날뫼 공소의 강당 설립을 위해 대구 본당 신자 송기택(宋基擇, 프란치스코)이 대지 46평을 희사하였다. 날뫼 공소는 이후 교세가 확대되면서 새 강당 건립 계획을 수립하여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신부 재임기인 1923년 4월 9일에 이를 완공하고,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는데, 당시 결정된 강당 주보 성인이 바로 '성 바오로' 였다.
〔본당 승격과 정착〕 계산동 본당의 신자수가 증가하게 되자 본당을 분할하기로 결정한 드망즈 주교는, 1927년 11월 1일 날뫼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미알롱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미알롱 신부는 병으로 인해 이듬해 6월 12일에서야 본당에 부임하였다. 게다가 3대 주임 이필경 신부가 부임 3개월 만에 경남의 문산(文山)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1929년 8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비산동 본당은 대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그 후 4대 주임으로 이종필 신부가 부임함과 동시에 비산동 본당은 부활되었지만, 일제 말기인 탓에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5대 주임 를뢰 신부는 성소 계발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많은 신학생과 수도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던중 1945년 3월 일제 총독부에 의해 를뢰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다른 프랑스 선교사들과 함께 남산 본당에 연금되면서 스위스 출신인 프로와드보 신부가 잠시 본당의 사목을 담당해 주었다.
본당 신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게 된 것은 이기수 신부가 6대 주임으로 부임한 뒤부터였다. 그는 신자들의 신심과 전교 활동을 위해 1949년 4월 24일에 성모회를 설립하였으며, 이어 7대 주임 정수길 신부는 1952년 10월 28일에 성모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본당 신자들은 레지오 마리애를 비롯하여 평신도 사도직 단체들을 꾸준히 설립해 나갔다. 한편 9대 주임으로 재부임한 이기수 신부는 성당 신축 계획을 수립하고 본당 신자들과 열심히 노력한 결과, 1959년 1월 29일 새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본당의 성장과 현재〕 10대 주임 이창호 신부는 본당의 발전을 예상하고 현 교육관 남쪽에 있던 약 40평의 부지를 새로 매입하였는데, 14대 주임 이상호 신부가 부임하여 1975년 7월 21일에 본당 구역 밖에 있던 수녀원 부지 754평을 매각하는 대신 새로 매입한 부지 위에 수녀원을 건립했다. 또 이상호 신부는 수녀원 완공 이전부터 노원 본당 설립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성당 완공 직전인 1976년 2월 19일에는 노원 본당을 분리했다.
당시 비산동 본당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강화하는 등 내적 쇄신을 위해서도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13대 주임 최병선신부가 재임하던 1969년에는 황소 신용 협동 조합이 설립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본당 운영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황소 신용 협동 조합은 그 후 1973년에 해체되었다가 1976년 11월 26일에 다시 '비산 신용 협동 조합' 으로 부활되었다. 아울러 신심 단체 설립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18대 주임 이정추 신부에 의해 본당의 숙원 사업인 교육관 건립 계획이 수립되어 1983년 9월 30일부터 공사에 착수, 이듬해 7월 7일 4층 규모의 교육관을 완공하고 이문희(바오로) 대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가졌다.
19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상규 신부는 본당 설립 60주년을 맞이하여 《본당 60년사》를 발간하고 한티 성지 개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내실화에 역점을 둔 사목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20대 주임 맹봉술 신부는 반 모임의 활성화와 신자 재교육 지침을 마련하였고, 21대 주임 조성택 신부는 개인과 가정, 본당 공동체의 성화를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다. (→ 대구대교구)
※ 참고문헌 천주교 비산 교회 편, 《본당 60년사》, 1988/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 총람》,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천주교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대구 본당 백년사》, 대건출판사, 198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편찬실〕
② 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안양시 비산1동 540-1 소재. 1978년 10월 4일 안양(安養, 현 중앙)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착한 목자. 관할 구역은 비산1 ~3동 전 지역과 안양1 · 2 · 7동 일부 지역. 〔교세〕 1978년 931명, 1984년 4,261명, 1988년 7,912명, 1992년 11,298명, 1996년 15,537명. 〔역대 신부〕 초대 김창린(金昌麟) 필립보(1978. 10~1985.2), 2대 윤석원(尹錫元) 요셉(1985. 2~1997. 2), 3대 임충승(林忠承) 시몬(1997. 2~현재).
현 비산동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안양 본당 6대 주임 양병묵(楊柄默, 루가) 신부가 본당을 분할하기 위하여 1972년 7월 11일에 비산동 548번지 일대의 부지 784평을 매입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이듬해 7월 1일자로 안양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이 부지가 도시 계획으로 묶여 성당 신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8년 7월에 다시 현 성당 부지 600평을 매입하여 그 해 10월 4일 비산동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김창린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김창린 신부는 비산동 556-7번지의 주택을 개조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는 한편, 이듬해 3월 24일부터는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했고, 1981년 3월 21일에는 성모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82년 3월 4일에는 과천(果川) 본당을 분리하여 127세대 500여명의 교적을 이관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30일에 성당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1985년에 들어 평촌 신도시 개발이 발표되면서 신자수 증가가 예견되자 2대 주임 윤석원 신부는 다시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12월 25일에 548번지 일대의 196평과 12월 31일에 540번지 일대의 부지 246평을 추가로 매입한 후, 1989년 10월 23일 수녀원을 증축함과 동시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년여만인 1990년 12월에 1,150평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경수 산업 도로(京水産業道路) 확장 공사로 인하여 성당 부지 일부가 편입됨에 따라 1991년 2월에는 성모유치원을 휴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울러 주일학교 학생수가 2,000여 명에 달해 교실이 부족하게 되자, 같은 해 4월 비산1동 478-10번지 일대의 부지 328평을 매입하여 1992년 10월에 교육관(750평)을 완공하였으며, 이듬해 5월 28일 성당 봉헌식 및 교육관 · 수녀원의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비산동 본당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평촌 신도시 입주가 본격화되면서 본당 사목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관양동(冠陽洞) 지역을 분리시킬 목적으로 1993년 2월 2일에 현 인덕원(仁德院) 성당 부지 928평을 매입하여 이듬해 2월 21일에 2,200평 규모의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고, 또 1996년 6월 28일에는 호평(虎平) 성당 부지로 동안구 호계2동 893번지 일대의 853평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1997년 2월 14일자로 인덕원 본당과 호평 본당을 분리하면서 인덕원 본당으로 1,526세대 4,250명을, 호평 본당으로는 1,333세대 3,850명의 교적을 이관하였다. 같은 날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임충승 신부는 두 본당을 분할한 이후에도 신자수 증가가 계속됨에 따라 또다시 본당 분할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분할에 따른 부채 상환에도 주력하고 있다. (→ 수원교구 ; 중앙 본당 ③)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수원교구 3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1993. 〔편찬실〕
비산동 본당
飛山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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