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안네, 장 밥티스트 마리 Vianney, Jean Baptiste Marie(1786~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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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네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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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네 성인.

성인. 신부. 본당 신부들의 수호 성인. 축일은 8월 4일. '아르스의 본당 신부' (curé d' Afs)라고도 불린다.
〔생 애〕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용 근처의 다르디이리(Dardilly)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 농부인 마태오(Matthieu Vianney)와 마리 블루즈(Manie Beluse Vianney)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비안네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5세 때에는 파리에서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추방되고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비안네는 어린 시절을 주로 부친의 농장에서 양을 치면서 지냈다. 정규 교육은 몇 개월밖에 받지 않았지만, 신앙 생활을 충실히 하여 비밀리에 첫 고해(1794)와 첫영성체(1796)를 받았다. 한편 비안네의 가족은 '성직자 공민 헌장' (Constitution Civile du Clergè)을 거부하는 사제들을 지지할 정도로 신앙심이 돈독하였다.
사제직의 소명 : 18세 때 부친의 허락을 받고 에퀼리(Écully) 본당 발레(Balley)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개인적으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기초 교육이 부족하고 수학 능력도 많이 떨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라틴어 공부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1806년에 라 루브슥(La Louvesc)에 있는 레지스(John Francis Regis) 성인의 무덤을 순례하고 이듬해 견진성사를 받은 후부터는 사제 서품을 받고자 하는 열의와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신학생이었던 비안네는 1809년에 징집을 당하게 되었다. 사제가 되기 위하여 어렵게 걸어왔던 길을 갑자기 중단한 것에 대해 견딜 수 없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영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던 그는, 끝내 병이 들어 스페인 원정 부대에서 제외되었다. 병원에서 회복하자마자 로안(Roanne)으로 간 비안네는 병이 재발하여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듬해 클레르몽으로 이동 명령을 받았지만 함께 떠날 동료들을 놓치고 말아 군법 회의에 고발당할 경고를 받게 되었다. 결국 혼자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는, 가는 도중에 다른 군 복무 이탈자를 만나 그와 함께 레 노에(Les Noës)로 갔다. 망명자와 도망병들의 피신처였던 그곳에서 비안네는 그 해 4월 25일 일반 사면이 선포될 때까지 숨어 지냈다. 1811년에 베리에르(Verrières)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과정을 공부하고 1813년에는 리용의 대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으나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아 1년 만에 퇴학당한 비안네는, 발레 신부에게 개인 교수를 받았지만 라틴어 성적은 향상되지 않았으며 다른 과목의 점수 역시 좋지 못하였다. 발레 신부의 도움으로 신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신심과 성품을 인정받은 비안네는 사제 서품 자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아 1815년 8월 13일 그르노블(Grenoble)에서 시몽(Simon)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 생활 : 발레 신부가 있는 에퀼리 성당에서 2년동안 보좌 신부로 생활한 비안네 신부는 1818년에 230여 명의 주민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아르스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더 열심히 참회와 기도 생활을 한 비안네 신부는 수년 간 감자만을 먹으며 생활하는 등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아르스는 부도덕하거나 수준이 낮은 마을은 아니었지만, 종교 의식이 없었고 특히 사람들이 주일 미사를 잘 지키지 않았으므로, 그는 우선 성당을 재건하고 각 가정을 방문하며 예비자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지나친 음주나 거친 말투, 신성모독, 음란함, 그리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 등에 대하여 일깨워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비안네 신부의 노력으로 8년 후 아르스는 종교적인 분위기의 마을로 변모하였다. 한편 1821년에 정식으로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임명된 비안네 신부는, 1824년에는 라사뉴(C. Lassagne)와 라르데(B. Lardet)와 함께 '섭리' (La Providence)라는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비안네 신부는 고해 신부로도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1827년부터 수천 명의 고해자들이 그에게 성사를 받기 위해 찾아올 정도로 그의 명성은 아르스의 이웃 마을을 넘어 널리 퍼져 나갔다. 매년 2만여 명의 신자들이 비안네 신부를 찾아왔기 때문에, 그는 오전 11시에 설교를하고 성무 일도와 식사, 특별한 상담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약 18시간 정도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다. 이러한 명성을 인정받아 비안네 신부는 블레(Belley) 주교좌 성당의 명예 참사 위원이 되었으며, 정부로부터는 레종 도뇌르(Legion d'Honeur)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이 훈장을 팔았다.
신심 : 1824년 이후 34년 동안 비안네 신부는 한밤중에 들려 오는 소음으로 고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침대에 불이 난 적도 있었는데,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그는 악마의 공격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자신의 엄격한 생활로 인해 그의 초기 설교는 엄격주의적이고 다소 얀센주의적인 경향이 있었으므로,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동료 사제들로부터는 10여 년 동안이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정설이나 지옥설을 극복하고 더욱 많은 경험을 하면서, 엄격주의적인 경향에서도 벗어나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사랑과 교회 전례 때 공동 기도의 효험을 더욱 많이 강조하였고,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얻어지는 자비로움과 단순성도 지니게 되었다. 비안네 신부는 특히 성 필로메나(St. Philomena)에 대한 신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성인에 대한 그의 신심은 현대의 성인전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주민들이 다른곳으로 옮겨 가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아르스에서 42년 동안 사제 생활을 한 비안네 신부는, 열심한 성무에 지친 나머지 1859년 8월 4일 73세의 나이로 아르스에서 사망하였다. 생전에 비안네 신부는 세 차례나 아르스를 떠나 수도자가 되려는 뜻을 밝혔으나, 교구장의 허락을 받지 못하자 순명하는 마음으로 이를 포기하였다고 한다.
〔시성과 공경〕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1903~1914)에 의해 복자가 된 비안네 신부는,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 시성되었고, 1929년에는 '본당 신부의 수호 성인' 으로 선포되었다. 비안네 신부에 대한 공경은 오늘날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에 대한 신심은 특별히 전세계 교구 성직자들에게 깊게 퍼져 있다. (⇦ 요한 마리아 비안네 ; → 수호 성인)
※ 참고문헌  T.F. Casey, 《NCE》 14, pp. 636~637/ U. Turck, 《LThK》 10, pp. 761~762/ 《EC》, p. 386/ Enzo Lodi, Saints ofthe Roman Calendar, trans. by Jordan Aumann, O.P., pp. 211~213/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1987, pp. 422~4231 C. Stevens, The One Year Book of Saints, Our Sunday Visitor Pub., 1989, p. 224.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