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모, 마리 피에르 폴 Villemot, Marie Pierre Paul(1869~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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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모 신부(왼쪽)와 1942년 3월 12일 경성 가톨릭 성가대원들과 함께한 그의 금경축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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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모 신부(왼쪽)와 1942년 3월 12일 경성 가톨릭 성가대원들과 함께한 그의 금경축 기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바오로. 한국 이름은 우일모(禹一模). 1869년 6월 28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2년 3월 12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비에모 신부는, 그 해 4월 28일 파리를 출발하여 6월 18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서울의 주교관에 머무르며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제물포(濟物浦, 현 답동) 본당에서 사목하던 르 비엘(Le Viel, 申三德) 신부가 요양차 홍콩으로 떠나게 되자 9월 23일 임시 주임으로 부임하여, 약 7개월 동안 이곳에서 사목하면서 임시 성당을 건립하는 한편, 학교 설립을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1893년 4월에는 전라도 지방으로 파견되어 일명 차돌배기(현 백석, 完州郡 雲洲面 九梯里)에 정착하였다가 이듬해 초 되재(華山面 昇峙)로 거처를 옮기고 즉시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1894년 동학란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전주(全州)에서 사목하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와 함께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복귀하였다. 중단되었던 성당 신축 공사를재개하여 얼마 후 전통 한옥 양식의 성당을 완공한 비에모 신부는, 전교에도 힘써 전라도 북부 산간 지대에까지 순방하였다. 그 후 1898년에 서울교구 재정 담당 신부로 임명되어 2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잠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신부를 겸임하기도 하였다. 1916년 약현(藥峴, 현 중림동) 본당 주임으로 임명된 후에는 교세 신장과 함께 본당 내의 남녀 가명학교(加明學校) 운영에 역점을 두었으며, 1926년 3월에는 서울교구 부주교 겸 명동(明洞)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목하다가 1942년 고령으로 현직 사목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비에모 신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지도신부로 재임하던 중 1950년 한국 전쟁 발발로 7월 11일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다른 외국인 성직자 · 수도자들과 함께 서울 소공동(小公洞)의 삼화 빌딩에 감금되었다. 그런 다음 인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여러 날 심문과 모욕을 당한 뒤 평양으로 이송되어 7월 19일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9월 5일 만포(滿浦)를 출발하여 11월 7일 중강진(中江鎮) 부근의 하창리(下昌里) 수용소에 수용되는 '죽음의 행진' 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고령인데다가 행진 도중에 겪은 고초와 수난으로 그 해 11월 11일 하창리 수용소에서 82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 우일모 ; → 고산 본당 ① ; 죽음의 행진 ; 중림동 본당)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Ⅰ~Ⅲ, 천주교 명동 교회, 1986~1993/ 韓國敎會史研究所 역편, 《서울교구연보》 Ⅰ . Ⅱ , 천주교 명동 교회, 1984 · 1987/ 천주교 인천교구 답동교회, 《답동 대성당 100년사》, 1989/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 편찬위원회 편,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1.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