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비엔(Vienne)에서 1311~1312년에 개최된 제15차 세계 공의회.
〔도시의 역사〕 프랑스 남동쪽 론(Rhone) 강변에 위치한 비엔은 이제르(Isere) 주에 속한 작은 도시이지만, 정치적 · 그리스도교적으로 매우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갈리아 시대에 알로브로제스족(Allobroges)의 수도였던 이곳은, 3세기 말에는 갈리아 비엔 주의 수도였고 민족 대이동 이후로는 부르군디 왕가를 비롯한 독일 황제들의 거주지였다가 1349년에 프랑스 도피네(Dauphiné)의 영지가 되었다. 로마 시대 유적으로 아우구스투스 신전 · 원형 극장 · 돌 · 피라미드 등이 남아 있는데, 특히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아우구스투스 신전은 가장 훌륭한 로마 시대의 기념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도교는 2세기 중엽에야 인근 지역인 리용으로부터 전해졌지만, 177년에 이미 '리용의 순교자들' 가운데 상투스(Sanctus)라는 부제가 비엔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리용의 주교좌에 이어 비엔과 툴루즈(Toulouse), 아를(Arles) 등이 250년 이후에 주교좌가 되었는데, 바오로 사도의 제자였던 성 크레센스(Crescens)가 비엔의 초대 주교였다고 한다. 비엔은 곧 수도 대주교좌로 승격되어 한때 많은 관구와 교구들을 두었으나, 아를 등 이웃 수도 대주교좌와의 우위 경쟁에서 밀려나 1801년에 그르노블(Grenole)에 통합되었다. 교회 유적으로는 성 베드로 성당, 주교좌 성당, 성 안드레아 성당 등이 있다. 6세기경에 성 베드로 성당 일부가 건축되었으며, 10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1860년에 또다시 로마 · 갈리아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그리고 옛 주교좌 성당인 성 모리스 성당은 12~14세기에 건축되었다. 비엔이 공의회 장소로 선택된 것은 이 시기가 교황의 아비뇽 시대(1309~1377)가 시작된 직후였기에 프랑스 왕권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아직 프랑스에 예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도시로 남아 있었다는 특수한 상황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연구 업적〕 비엔 공의회에 대해서 19세기 말엽까지는 공의회에서 의결한 법령들만 알려졌을 뿐, 공의회의 기원과 목적, 그 진행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공의회의 기록들이 대부분 유실되었고 그 밖의 자료들도 인멸되거나 위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886년부터 에를레(F. Ehrle) 추기경에 의해 공의회의 기록들이 발견되기 시작하였고(Zur Vorgechi-chte des Konzils von Vienne), 1907년에는 핀케(H. Finke)의 연구가 발표되었으며(Papsttum und Untergang des Templerordens), 물러(Edward Müller)의 본격적인 연구가 발표됨으로써(Das Konzil von Vienne, Seine Quellen und Geschichte) 비엔 공의회에 대한 내용이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공의회의 준비〕 배경 : 성전 기사 수도회(Templarii)의 처리 문제, 그 당시 다시 긴급해지고 중요해진 성지 탈환 문제, 교회 개혁 문제 등 세 가지가 비엔 공의회를 소집하게 된 요인이다. 그중에서 성전 기사 수도회 문제가 지배적인 이유였으므로, 이의 처리 문제가 비엔 공의회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그러나 성전 기사 수도회 문제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Philippe le Bel, 1285~1314), 소위 미왕(美王)이 교황권을 지배하려는 계속적인 투쟁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전의 투쟁에서 해결되지 않은 또 다른 문제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와 성직자 과세를 둘러싸고 대립하면서 투쟁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교황이 사망한 후에도 투쟁을 계속한 필리프 4세는 신임 교황 베네딕도 11세(1303~1304)에게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자신에게 내린 파문을 해제하게 하였고, 그 후임 교황인 글레멘스 5세(1305-1314)에게는 그가 리용에서 즉위할때 이미 사망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재판하기 위한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4년 후에는 교황을 아비뇽에 정착하게 하였다.
그런데 필리프 4세는 이보다 앞선 1307년에 프랑스의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을 모두 체포하고 그 재산을 압수하였다. 본래 이 수도회는 팔레스티나의 순례자 보호 및 성지 방위를 목적으로 1118년에 8명의 프랑스 기사들에 의해 창설된 것으로, 이슬람교 신자들에게 성지를 빼앗긴 이후로는 본래의 이 임무가 상실되었다. 그러나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수도회는 필리프 4세에게 탐욕의 대상이 되었으며, 필리프 4세는 이 수도회의 도덕적인 타락-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을 구실로 교황도 모르게 불의의 습격을 하였던 것이다. 교황 글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이러한 처사를 교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로 간주하고 그 수도회에 대한 재판을 교황이 직접 장악하는 동시에 조사 위원들을 직접 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4세는 교황에 대한 압력을 늦추기는 고사하고 또다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재판하기 위한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는 1308년 푸아티에(Poitiers)에서 교황 글레멘스 5세와 필리프 4세가 비밀리에 가진 회합에서 받아들여져 공의회의 소집이 결정되었다. 교황은 이 사실을 1308년 8월 12일 대칙서 <레젠스 인 첼리스>(Regens in coelis)를 통해 발표하였고, 이어 1310년 4월 칙서 <알마 마텔>(Alma Mater)을 통해 비엔에서의 공의회 개최일을 그 해 10월 1일로 확정 · 발표하였다. 그러나 성전 기사 수도회에 대한 조사가 지연됨으로써 공의회는 예정보다 1년이 늦은 1311년 10월 1일에 가서야 개최되었다.
참석자 : 글레멘스 5세 교황은 관례대로 모든 주교들을 공의회에 초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본래 교황이 선정한 공식 인원 231명 가운데 필리프 4세의 압력으로 165명만이 지명을 받아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공의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지명 초청된 주교라 할지라도 당시의 사정이 여비를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고위 성직자들도 많았다. 참석자는 110~120명 정도로 매우 적었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프랑스인들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추기경 20명, 총대주교 4명, 대주교 29명, 주교 79명, 대수도원장 38명이 참석하였다고 밝힌 역사가도 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참석자는 170명이 된다. 또 왕과 제후들도 초대되어 직접 참석하거나 사절들을 보냈는데 특히 필리프 4세는 플레지앙의 기음(Guillaume de Plaisians), 마리니의 앙그랑(Enguerrand de Marigny) 같은 그의 유명한 고문 법률가들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내 용〕 공의회는 1311년 10월 16일 글레멘스 5세 교황이 비엔의 주교좌 성당에서 직접 집전한 전례 개회식으로 장엄하게 시작되었다. 주교들과 교황이 입장하고 시작 성가와 기도가 있은 후, 개회사에서 성전 기사 수도회 · 성지 탈환 · 교회 개혁의 세 가지 문제가 공의회의 의제임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밝힌 교황은, 참석자 모두에게 축복을 주고 개회식을 끝맺었다. 이어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위원회 단위로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각 위원회의 심의 결과들은 최종적으로 전체 회의에 상정되어 의결을 거쳐 공포하도록 결정되었다. 전체 회의는 공의회 기간 동안 세 번 개최되었다.
성전 기사 수도회 문제를 심의하기 위해 열린 특별위원회는 이 수도회에 대한 심의와 재판을 1311년 12월에 끝냈는데, 심의 때에 고문으로 고백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수도회측에도 해명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2월 이후 몇 달 동안 중단 상태였던 이 문제는 이듬해 2월 중순경 글레멘스 5세 교황과 필리프 4세의 사절들 사이에 이루어진 비밀 협상에서 교황의 양해 아래 수도회를 해산시키기로 합의하였고, 또 예정되었던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재판도 개최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어 같은 해 3월 20일에는 필리프 4세가 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3월 22일에는 제1차 전체 회의가 개최되어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산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 교황은 이 사실을 칙서 <복스 인 엑스헬소>(Vox in excelso)를 통해 발표하였으며, 4월 3일에 개최된 제2차 전체 회의에서는 이 수도회의 해산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산은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황의 행정적 조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교황은 수도회의 전재산이 필리프 4세의 요구와는 달리 요한 기사 수도회(또는 몰타회)에 넘겨졌음을 5월 2일자 칙서 <앗 프로비담>(Ad providam)을 통해 발표하였다.
제2차 전체 회의에서는 성전 기사 수도회 문제 외에 성지에 관한 문제도 심의되었는데 이 토의는 5월 6일에 개최된 제3차 전체 회의에서도 계속되었다. 여기서 그동안 이교도 정복이라는 본래의 십자군 사상이 약화된 반면 선교 정신이 강화되었음이 드러났는데, 왜냐하면 공의회는 륄(Raymond Lulle)의 제안에 따라 유대인이나 이슬람교 신자에 대한 선교의 전제 조건이 히브리어나 아랍어에 대한 지식이었기 때문에 이 언어의 강좌를 신설할 것을 각 대학에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이러한 언어들을 가르칠 만한 인재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어느 대학에서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또 십자군의 파견 문제도 토의되어 프랑스 국왕과 영국 국왕이 파견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였고, 십자군 파견을 돕기 위한 십일조 징수 방법도 토의되었다. 특히 교황은 모든 고위 성직자들에게 십일조의 징수를 지시하였다.
또한 제3차 전체 회의에서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내부의 문제를 심의하고 해결하였다. 이 수도회는 일찍부터 회칙과 청빈의 준수 문제를 둘러싸고 두 파가 대립되어 있었는데, 소위 엄격주의자(spin-tualees)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창설자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주류파들이 본래의 청빈 이상을 버렸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주류파는 엄격주의자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올리비(Petus Joannis Olivi, 1248/1249~1298)의 저서 가운데서 7개의 오류를 지적하며 반격하였다. 이 내분(內紛)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를 비롯한 여러 역대 교황들이 관여해 왔지만 끝내 해결이 되지 않자 글레멘스 5세 교황과 공의회가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게 된것이다. 이에 공의회는 극단을 피하며 현명하게 해결하기 위해 올리비의 주장 중에서 그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은 채 세 가지 명제(命題)를 배척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동시에, 청빈에 관해서는, 주류파가 그 이상을 저버렸다는 비난은 사실 무근한 것이지만 청빈 이상을 계속 실천하도록 명하는 또 다른 교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교회 개혁에 관한 의제를 중점적으로 심의하였는데, 개혁은 두 관점에서 취급되었다. 하나는 성직자의 윤리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자유수호 문제였다. 교황은 이 점에 관해 공의회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사전에 주교들에게 각기 교구 내에서 일어나는 폐해들과 이에 대한 시정안을 제출하도록 지시했었다. 이것이 바로 소원(訴願, gravamina)이고 개혁안(remedia)들이다. 이들 소원에 따르면 교회의 자유 침해에는 속권이 교회 영역에 간섭하여 교회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와 교황의 면속(exemptio)으로 주교의 권리를 침해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전자는 그간 국가 권력이 상승하였다는 증거이고 후자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중앙 집권이 진행된 결과였다. 1312년 1월 중순부터는 주교들이 제출한 많은 소원과 개혁안들에 대한 심의가 진행되었는데, 이 심의에서 많은 법령들이 나왔고, 그 법령들이 제3차 전체 회의에서 낭독된 후 공의회는 폐막되었다. 미완성의 법령들은 공의회 이후 교황의 수정을 거쳐 공포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1314년 4월 20일에 글레멘스 5세 교황이 사망함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후임 교황 요한 22세(1316~1334)에 의해 실현되었다. 즉 교회 개혁에 관한 법령들을 수정한 교황은 1317년 10월 25일 이것을 각 대학에 보냄으로써 비로소 법적 효력이 주어졌는데, 이것이 이른바 《글레멘스 법령집》(Decretum Clementinae)이다. 그리고 그 후 《교회법 대전》(Corpus Iuris Canonici, 1580)에도 삽입되었다.
〔공의회의 법령들〕 비엔 공의회에서 채택된 법령들이 몇 개인지 확실한 숫자는 알 수 없다. 38개 정도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글레멘스 법령집》에 수록된 것은 19개 뿐이다. 이 법령들은 크게 교의적 법령과 규율적 법령으로 구분된다. 교의적 법령으로는 올리비의 주장과 베긴 회의 오류를 배척한 것 그리고 고리 대금을 단죄한 교령등 세 가지가 있으며, 규율적 법령으로는 프란치스코회의 내분에 관한 것과 교회 개혁에 관한 것 두 가지가 있다.
교의적 법령 : ① 올리비의 주장 가운데 세 가지 명제를 단죄한 교령 (Fidei Catholicae, Denz. 480~483) : 우선 첫번째로 그리스도가 하느님으로서 성부와 함께 계속하여 영원히 존재함을 주장한 후,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 영혼과 육신을 취하였고, 인성(人性)으로 고통을 받고 죽으시기를 원하였으며, 죽은 후에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기를 원하였다고 하면서 이를 부인하는 올리비의 주장을 배척하였다. 두 번째로 교령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에 관한 유명한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이성적 영혼의 본질이 그 자체로서 또한 본질적으로 육신의 형상(形相)이 아니라는 가톨릭 신앙에 위배되는 모든 그릇된 교리를 배척하기 위해, 교황은 공의회의 승인을 얻은 후 이성적 영혼이 육신의 형상이 아니라는 주장은 이단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올리비의 반대파들은 올리비가 "어린이들은 세례 때 은총도 덕행도 받지 않는다" 고 말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하여는 그 당시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일치된 견해가 없었으므로 교황은 공의회의 승인을 얻은 후 어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린이들에게도 세례로 죄가 사해질 뿐만 아니라 덕행도 주어진다는 것이 보다 개연성 있는 견해라고만 선언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오류를 올리비의 반대파들은 올리비에게 돌렸으나 교령은 이 오류들을 단죄하였을 뿐 그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올리비가 이단자로 선언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② 베긴회의 오류에 관한 법령(Denz. 471~478) : 베가르회(Bégards)나 베긴회(Béguines)의 공동체 생활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수도 생활이 아니었다. 특히 12세기 말 이래 열렬한 종교 운동의 하나로서 주로 게르만 국가들에게 전파되었던 베가르 여자 공동체는, 처음에는 정결을 이상으로 내세우다가 13세기 중엽에 들어 청빈을 이상으로 추가하였는데, 이들이 이단 교리를 퍼뜨리자 교회 당국은 13세기 말경부터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비엔 공의회는 독일 주교들의 요청으로 베가르와 베긴 공동체를 배척하는 두 가지 법령, 즉 그들의 공동체 생활 방식을 금지하는 내용의 <쿰 데 귀부스담 물리에리부스>(Quum de quibusdam mulieribus)와 그들의 교의적 오류를 단죄하는 <앗 노스트륨>(Ad nostrum)을 발표하였다. 이들의 오류들은 서로 모순되는 점들도 있어서 하나의 교리 체계를 이룬다고는 볼 수 없었으나 수도 생활에 끼칠 위험이 있었으므로 이단으로 단죄를 받게 되었다.
③ 고리(高利, usura)에 관한 교령(Ex gravi, Denz. 479) : 현재 전해지는 공의회 기록에는 이 교령을 공포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단지 교령 첫머리에 고리 대금업자들에 대한 사회 단체들의 하소연들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교령은 고리 대금업자들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고리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를 이단자로 처벌할
것을 선언하였다.
규율적 법령 : ① 프란치스코회 회칙과 청빈에 관한 교령(Exivi de paradiso) : 이 교령은 엄격주의자들에 대한 재판과 관련된 문헌의 일부이다. 공의회는 교리 문제 외에 그들의 회칙과 청빈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논쟁을 화해시키고자 이에 관한 규율을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성서에 나오는 모든 복음적 권고를 실천할 의무가 없고, 다만 규칙이 명하는 청빈 · 정결 · 순명의 세 가지 권고만 지키면 된다. 그러나 그것도 규칙과 분리되어서가 아니라 규칙 전체와 함께 고려되어 실천해야 한다. 모든 규칙은 똑같은 방법으로 의무를 지우는 것이 아니다. 대죄로 의무화하는 것은 직접 명하는 규칙들이다. 교령은 이렇게 청빈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언급하였다. 그러나 공의회는 두 파의 주장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기 보다는 화해를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양파의 대립이 이것으로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내분은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5세기 중엽에 가서 엄격주의파가 소멸됨으로써 비로소 끝이 났다.
② 교회 개혁 교령 : 이 공의회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교회 개혁이었다. 교회 개혁의 과제 중 하나는 성직자의 윤리와 신분을 개혁하는 일이었고, 더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제는 대내외적으로 교회의 자유를 보증하는 일이었다. 성직자와 교회 생활의 개혁, 수도회의 개혁, 교회법에서의 소송 절차, 종교 재판, 법의 개정, 교회록과 교황청의 재정 등 당면한 문제 또는 건의된 많은 개혁안이 제3차 전체 회의에서 심의되고 결정되었다. 그 결과 공의회는 교회 개혁에 관한 규율적인 법령 30개를 제정하였다. 그러나 이 법령들의 본문이나 그 수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망드(Mende)의 주교 뒤랑(Guillaume Durand)은 자신의 저서 《공의회론》에서 전개한, 예컨대 주교의 권한을 계획적으로 증대하는 것, 교황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 고대 교회의 교회 회의를 부활시키는 것, 성직자의 교양을 향 상시키는 문제들을 포함한 자신의 진보적인 개혁안을 비엔 공의회에서는 구체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혁안은 이미 새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전조(前兆) 구실을 하였다. (→ 공의회 ; 베긴회 ; 성전 기사 수도회 ; 이자 ; 프란치스코회)
※ 참고문헌 Mansi, Concil., tom. XXV/Regesta Clementis Ⅴ , vols. 9, Roma, 1885~ /F. Ehrle, Zur Vorgeschichte des Konzils von Vienne, Arch. 2, 1886, pp. 353-416/ H. Finke, Papsttum und Untergang des Templeror-dens, Miinster, 1907/ E. Miiller, Das Konzil von Vienne, 1311~1312, Miinster, 1934/ J. Leclerq, 《DTC》 15-2, pp. 2973~2979. 〔崔奭祐〕
비엔 공의회 - 公議會 〔라〕Concilium Viennense 〔영〕Council of Vie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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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 공의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