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비오 5세(1504~1572) : 성인. 교황(1566~1572) 축일은 4월 30일. 본래의 이름은 안토니오 기슬리에리(Antonio Ghislieri). 1504년 1월 17일에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 근처 보스코(Bosco)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양을 치며 어린 시절을 보내던 기슬리에리는, 14세때 보게라(Voghera)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1521년 5월 18일 수도 서원을 하였다. 수도명이 미카엘이었던 그는, 그 후 볼로냐에서 공부한 다음 1528년 제노아(Genoa)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파비아(Pavia)에서 16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1550년
에 이단자들의 피신처로 스위스와의 접경 지역에 있던 코모(Como)와 베르가모(Bergamo)의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되어 주교와 총대리, 참사 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으며, 검사성(檢邪省, Romane Universalis Inquisitionis Congregatio) 장관 가라파(Giovanni Pietro Carafa) 추기경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교황 율리오 3세(1550~1555)에게 추천됨으로써 1551년에 검사성의 수석 대표(commissionary general)로 임명되었다. 1555년 가라파 추기경이 바오로 4세 교황으로 선출된 이듬해에 그는 네피(Nepi)와 수트리(Sutri)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557년 3월 15일에는 추기경으로, 그리고 이듬해에는 검사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560년 이후로는 바르나바회(Bamabiees)의 후원자로서 그리고 몬도비(Mon-dovi)의 주교로서도 활동하였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 교황 선출 : 1565년 12월 19일부터 1566년 1월 7일까지 개최된 교황 선거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비록 마지못해 교황직을 수락하기는 하였지만-기슬리에리 추기경은 자신의 교황명을 비오5세로 정하였다. 모든 영역에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결정을 실행에 옮기고자 노력한 비오 5세 교황은 항상 영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였으며, 교황이된 후에도 수도자의 절제된 생활 양식을 바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예를 들면 교황 홀로 식사하는 것으로, 이는 20세기 중반까지 관습이 되었다-계속해서 교황복 안에 수도자의 옷을 입고 지냈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교황 비오 5세가 로마를 하나의 수도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교황은 자신의 조카 아들이며 도미니코회 회원인 보넬리(M. Boneli)를 추기경으로 임명해 자신의 국무 비서(secretary of state)로 임명하기도 하였지만, 족벌주의를 배척하였고 친척들에게는 최소한의 도움만을 주었다.
교회 개혁 : 교황 비오 5세는 추기경단의 개혁을 철저하게 시작하면서 종교적 ·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 교회 개혁 사업을 완전히 책임지게 하였으며, 자신의 선임자인 비오 4세(1559~1565)에 의하여 1564년에 구성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집행과 준수성' (Congregatio super exsecutione et observatione S. Concilii Tridentini)에 공의회의 교령을 해석하는 권한까지 부여하였다. 그리고 1568년에는 신앙의 선포 및 신앙의 유지를 위한 새 추기경위원회를 설립하였고, 사목 방문과 교회 회의의 시행을 전 교회에 공표하여 공의회 개혁 규정을 각 교구에서 도입하도록 하였으며, 성직자 특히 주교들의 상주 의무를 강화하여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록과 재치권(裁治權, jurisdiction)을 박탈하였다. 수도회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고 1571년에는 억겸파(抑謙派, Humiliat)의 활동을 금지시키도 한 교황 비오 5세는, 신학교를 세우고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1567년 5월 3일에는 주교 선출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러한 개혁 조치는 보로메오(C. Borromeo, 1538~1584) 추기경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단행하였다.
교황 비오 5세가 교회 개혁에 있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전례서의 개혁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1566년에 《로마 교리서》(Catechismus Romanus adparochos)를 출판하면서, 젊은이에 대한 교리 교육은 모든 본당 사목자들의 의무이며 성인들은 세례받기 전에 충분한 교리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1568년에는 개정된 《로마 성무 일도》(Breviarium Roma-num)를, 1570년에는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을 출판하였다. 한편 1569년에는 불가타(Vulgata) 성서를 개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대사 사용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속죄 규정을 재작성하였으며,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의지를 추진하기 위해 로마의 대성전들을 개인적으로 방문하였다. 또한 교황령과 나폴리에 교황 특사를 파견함으로써 트리엔트 공의회의 훈령이 멕시코, 고아(Goa) 그리고 콩고(Congo)에까지도 알려지게 하였다.
이단을 없애기 위해 종교 재판소에 과도하게 의지하였던 교황 비오 5세는, 새 건물을 짓고 규칙과 실천 사항들을 엄격하게 제시하였으며, 종교 재판소 회의에 직접 참석하기도 하여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교황은 유대인들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었는데, 상업적인 이유로 로마와 안코나(Ancona)의 게토(ghetto)에서 사는 것은 허용했으나 그 외의 다른 이유로는 교황령에서 추방하였다. 또한 1571년 3월에 '금서 목록 개정 및 서적 교정성' (Congre-gatio de reformando indice et corrigendis libris)을 설립하여 책검열을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1576년 10월에는 원죄와 은총의 필요성에 대하여 비관적인 주장을 폈던 바유스(Michael Baius, 1513~1589)의 79개 명제를 단죄하였다. 한편 교황은 1567년 4월 11일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대외 정책 : 세계 정세에서 교황 비오 5세가 직면하였던 커다란 세력은 오토만(Ottoman) 제국과 프로테스탄트였다. 후자에 대항하기 위하여 교황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종교 재판소를 설립하였으며,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회칙 <주님의 식탁에서> (In coena Domini)를 통해 교황권이 세속권보다 더 상위에 있음을 재천명하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화해하고자 다각도로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자 1570년 2월 25일 회칙 <레난스 인 엑스첼시스>(Regnans in excelsis)를 통해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고 폐위시킴으로써,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또다시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또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Huguenos)에 대항해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왕비인 가타리나 드 메디치(Caterina de Medici)를 재정적 · 군사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루터교에 대한 교황의 입장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와 충돌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579년 3월 5일에는 코시모 드 메디치(Cosimo de Medici)를 토스카나의 초대 대공으로 임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황제의 영역을 침범 하게 되어 관계가 더욱 심각해졌다.
교황 비오 5세가 가장 야심적으로 성공시킨 일은 터키에 대항하기 위해 베네치아, 스페인과 함께 연합군을 형성한 것이었다. 1570년 솔리만 2세(Solyman Ⅱ)가 키프로스(Cyprus)를 공격하여 서유럽 그리스도교 전체를 위협하자,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연합군은 1571년 10월 7일 고린토 만에서 터키군과 대적하여 레판토(Lepanto)에서 크게 격퇴함으로써 지중해에서 터키인들의 우위권이 사라지게 되었다. 바로 그날 로마의 매괴회(Confraternitas SS. Rosarii)는 도미니코회 본부인 미네르바 성 마리아 성당(S. Maria Sopra Minerva)에서 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성모 마리아에게 전구하고 있었는데, 승전 소식이 로마로 전해지자 교황은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 로 선포했다. 훗날 이 축일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에 의해 '로사리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또한 교황 비오 5세는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마리아' 라는 칭호를 로레토(Loreto) 호칭 기도에
삽입시켰다.
수십 년 동안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훈령들을 실행하려고 노력했던 교황 비오 5세는 "오 주여, 저에게 고통과 인내를 더하여 주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1572년 5월 1일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는 1588년 1월 9일 그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모 마리아 대성전(St. Maria Maggiore Basilica)으로 옮겨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1672년 5월 1일 교황 글레멘스 10세(1670~1676)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712년 5월 22일 교황 글레멘스 11세(1700~1721)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전에는 교황의 축일을 5월 5일에 거행하였었다.
〔평 가〕 엄격한 법률가의 모습 외에도 온화함과 교회의 안녕을 위한 열정을 지녔던 교황 비오 5세는 이단과 이슬람교 세력에서 교회를 보호하면서 선교를 통해 복음이 각 지역에 전해지도록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 특히 교회 학문의 수호자 역할에 충실하였다. (→ 미사 경본 ; 시간 전례 ; 이단 심문)
※ 참고문헌 A.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4판, 1990)/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Oxford Univ. Press, reprinted ed., 1986/ Enzo Lodi,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trans. and adapted by Jordan Aumann, New York, Alba House, 1992/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Oxford Univ. Press, 2nd ed., 1987/ H.H. Davis, 《NCE》 11, pp.396~398/ A. Franzen, 《LThK》 8, pp. 531~532/ P. Levillain, Dictiom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1994, pp. 1328~1330. 〔邊宗燦〕
② 비오 6세(1717~1799) : 교황(1775~1799). 본래 이름은 조반니 안젤로 브라스키(Giovanni Angelo Braschi). 1717년 12월 25일 이탈리아의 체세나(Cesena)에서 마르코 아우렐리오(Marco Aurelio Braschi)와 안나 데레사(Anna Teresa)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1735년에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페라라(Ferrara) 대학에서 법학을 계속 공부하다가 이곳의 교황 대사인 루포(T. Ruffo)의 비서로 임명된 브라스키는, 1740년에 새 교황으로 베네딕도 14세(1740~1758)가 선출되면서 루포가 오스티아(Ostia)와 벨레트리(Velletri)의 주교로 임명되자 그의 교구를 대신 관리하였다.
로마나 나폴리 왕국 사이의 관할권 분쟁을 조정함으로써 외교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1753년에 교황 베네딕도 14세의 수석 비서가 되었으며, 1758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766년에는 교황 글레멘스 13세(1758~1769)의 신임을 얻어 교황청 회계 책임자가 되었고, 1773년 4월 26일에는 교황 글레멘스 14세(1769~1774)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논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수회의 폐지에 관한 가톨릭 국가들과 교황청 사이의 논쟁에 가담하였으며, 1774년에 교황 글레멘스 14세가 사망하자 이듬해 2월 15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 초기 활동 : 1775~1789년에 교황은 교황청에 대한 악의나 적대적인 견해에 맞서야했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지식인층과 상류층, 성직자들까지 교황의 절대적인 권한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으며, 교황 지상주의(ultramon-tanism)에 반대하는 견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교황 비오 6세는 당시 계몽주의 사상을 비난하는 첫회칙 <인스크루타빌레 디비네 사피엔시에)(Inscrutabile divinae sapientiae)를 1775년 성탄에 발표하였는데, 그는 이 회칙에서 근대 사상이 무신론을 퍼뜨리며, 국가들과 교회 사이의 전통적인 조약을 깨뜨리는 것으로 사회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교황이 활동 초기에 채택한 정책은 비타협적이고 완강하면서도 능숙한 것이었다. 그는 예수회에 대한 공공연한 입장 표명이 없이, 예수회의 적대자들과 얀센주의자들이 교황의 권위를 존중하여 가톨릭적인 일치를 수용하도록, 즉 그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황 지상주의와 수위권에 대한 그의 명확한 주장은 얀센주의자들과 맞서는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교 문제 : 1763년에 트리어(Tier)의 보좌 주교인 혼트하임의 니콜라오(Nikolaus von Hontheim)는 페브로니우스(Febronius)라는 가명으로 공의회 우위설(conciliarismus)과 국가주의 교회적인 원칙을 기반으로 에피스코팔리즘(episcopalism)의 사상을 종합한 저서를 발간하였다.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ism)로 불린 이 사상은 급격히 보급되어 쾰른, 트리어, 마인츠, 잘츠부르크의 독일 대주교들은, 1786년에 엠스(Ems)에서 개최된 잠정 협정에서 교황의 모든 교서가 독일에서 발행될 때는 사전에 주교단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교황의 전권(全權)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교회 분열의 조짐은 1789년 이후에야 진정되었다.
1780년에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된 요셉 2세(1780~1790)는 혼인의 허락과 관계된 새로운 규정, 수도원들의 폐지와 신자 단체의 쇄신, 축일과 전례 및 순례지의 감축, 유대교인들과 비가톨릭교도들에 대한 관용, 본당의 재조직 등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주의적 국가 권력 제도인 요셉주의(Josephinismus)는 국가 교회를 창설하려는 의도였으며, 교회의 재치권을 국왕의 권리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782년에 직접 빈을 방문한 교황 비오 6세는, 황제의 교회 정책을 뒤바꾸지는 못하였지만 대중적인 각성을 일으키는 성과를 얻었다.
프러시아와 러시아와의 싸움 : 교황 글레멘스 14세에 의해 1773년 7월 21에 반포되었던 예수회의 해산에 관한 교서의 적용을 거부한 프러시아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교황청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프로이센의 왕 프레데릭 2세(1740~1786)와 러시아의 황후 가타리나 2세(1762~1796)는 예수회를 보호하려 하였으며, 그들의 교육적인 영향력을 높이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가타리나 2세는 예수회의 수련소를 자신의 왕국 내에 설립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비오 6세 교황은 글레멘스 14세 교황의 교서를 적용하도록 촉구하였으며, 폴란드 주재 교황 대사들이 중재 활동에 나섰다. 또 교황은 두 군주들의 정책으로 인해 당시 반성직주의 정책이 점차로 사라지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호전시키기도 하였다.
피스토이아 교회 회의 : 피스토이아(Pistoia)와 프라토(Prato)의 얀센주의 주교인 스치피오 데 리치(Scipio de Ricci)의 영향으로, 요셉 2세 황제의 형제인 토스카나(Toscana)의 대공 레오폴드 2세(1790~1972)는 토스카나에 국가 교회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요셉주의의 조처들에 비해서, 스치피오의 개혁주의는 1783년에 본당의 배당금을 만들기 위하여 교황청 재산 관리처의 자금을 요구하였다. 1786년 9월에 개최된 피스토이아 교회 회의에서는 국가 교회를 설립하려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결정되었는데, 교황 비오 6세는 스치피오 주교를 퇴임시키고, 1794년에 교서 <아욱토렘 피데이>(Auctorem fidei)를 통해 피스토이아 교회 회의의 84개 논제를 비난하였다. 나폴리에서도 페브로니우스주의와 얀센주의자에 힘입어 관할권주의 정책과 극단적인 특권주의가 활성화되었는데, 이는 결국 나폴리 왕국을 사도좌로부터 분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화의 시도 : 바티칸에 비오-글레멘스 박물관을 설립하고, 수비아코(Subiaco) 대학과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비아 아피아(Via Appia)에 고대의 기념비들을 세우는 등 로마 내에 많은 사업을 시행한 비오 6세 교황은 국가 경제적인 분야에서도 중재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예산 부족과 축적된 거대한 부채의 해결을 목적으로 한 그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1770년 중반 무렵부터는 경제학적인 문헌과 잡지의 발간을 시도하였고, 농업과 농경 기술의 근대화와 개발을 위한 노력을 강화하였으며, 수많은 이론가와 개혁가들, 대체로 교황청의 관리들과 지방 행정관들의 발행물들은 당시 유럽의 경제 문화를 모방하도록 부추겼다. 1780년대에는 중상주의(重商主義) 노선을 채택하였는데, 이 계획은 공장과 상업을 발전시키고 토지 개혁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귀족들과 교회와 자본가들의 이익과 특권을 줄이는 이러한 정책은 하층 계급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 : 프랑스 혁명(1789~1799)이 일어나자 교황 비오 6세는 처음에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으나, 1790년 4월에 교회 재산의 몰수와 국유화에 관한 법률이 발표된 데 이어 7월에 성직자 공민 헌장이 발표되자, 이듬해 교서 <구옷 알리관툼>(Quod aliquantum)을 발표하여 프랑스의 정책은 가톨릭 교회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또 얼마 후 발표한 교서 <카리타스>(Caritas)를 통해서는 교회에 관한 것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서약을 거부하라고 하였으며, 교황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주교들의 임명을 무효화하였다. 프랑스와의 외교관계는 공식적으로 1791년 5월에 결렬되었으며, 프랑스는 교황의 항의를 무시하였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약 4만 명의 신부들이 투옥 · 유배 · 처형되었으며, 1793년 11월에는 그리스도교가 폐지되었고, 1795년에는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가 법제화되었다. 이에 교황 비오 6세는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혁명이라고 비난하였으며, 혁명을 반가톨릭적인 방대한 음모의 결산이라고 고발하였다.
1796년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침공하자, 프랑스 혁명에 대항할 십자군을 형성하도록 촉구한 교황은 국민들과 통치자들에게 신앙을 지킬 것을 호소하였는데, 이러한 호소는 대중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하였다. 그 해 6월 볼로냐에서 휴전이 이루어진 후 나폴레옹은 미술품과 배상금을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혁명으로 망명한 귀족들의 추방을 요구하였다. 1797년 2월에는 톨렌티노(Tolentino)에서 프랑스 군대와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볼로냐 · 페라라 · 모데나 · 로마냐 등의 교황령을 잃게 되었으며, 1798년에 로마가 점령되고 로마 공화국이 선언되자 교황 비오 6세와 교황청은 로마에서 쫓겨났고 남아 있던 다른 교황령마저 잃고 말았다.
이후 피렌체에 머무른 교황 비오 6세는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교적인 문제에 몰두하였으며, 외교적인 관계를 지속하면서 신자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공화국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절하였고, 새 정부의 군주제를 혐오하였다. 토스카나 대공국이 프랑스에 의해 점령당하자 프랑스 군대에 의해 1799년 3월 28일 피렌체를 떠나 프랑스 남부에 있는 발랑스(Valence)로 끌려간 교황은, 그곳에서 같은 해 8월 29일에 사망하였으며, 1802년 2월에는 그의 유해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이장되었다.
〔평 가〕 18세기 교황 중 재임 기간이 가장 길었던 교황 비오 6세는 가톨릭 교회가 매우 위태로웠던 혼란기를 보내면서 조카들의 중용으로 내적으로는 족벌주의 정책을 펼쳤다는 비판을 받았고, 외적으로는 계몽주의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에 의해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19세기에 종교적인 위신의 쇄신과 가톨릭 정신의 각성에 이바지하였으며, 사회 속에 종교와 교회의 역할을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에서 교황 비오 6세는 구베아 북경 주교로부터 조선에 복음이 기묘하게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1792년에 조선 교회에 대한 보호와 지도를 북경 주교에게 위임하였다. 이래 조선 포교지는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될 때까지 북경 주교에게 속하게 되었다. (→ 성직자 공민 헌장 ; 에피스코팔리즘 ; 페브로니우스주의 ; 프랑스)
※ 참고문헌 A. Latreille, 《NCE》 11, pp. 398~400/ L. Trenard, 《Cath》 11, PP. 258~261/ H. Raab, 《LThK》 8, PP. 532~533/ P. Levillain ed., Dictiom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1994, Pp. 1330~1334/ Jean Mathieu-Rosay, La véritable histoire des Papes, Paris, 1991, Pp. 296~2981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86, pp. 301~302. 〔邊宗燦〕
③ 비오 7세(1742~1823) : 교황(1800~1823). 본래 이름은 바르나바 키아라몬티(Barnaba Chiaramonti). 1742년 4월 14일에 이탈리아 에밀리아(Emilia)의 체세나(Cesena)에서 태어나 8세 때인 1750년에 아버지를 여읜 후, 이듬해 체세나의 산타 마리아 델 몬테(Santa Maria del Monte deCesena)의 베네딕도 수도원에 맡겨졌으며, 1756년 14세의 나이로 베네딕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레고리 오라는 수도명으로 1758년에 첫 서원을 하고, 1760~1763년 파두아(Padua)의 산타 주스티나(Santa Giustina)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은 다음, 1765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편 그는 1763~1766년에 로마의 성 안셀모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얀센파 개혁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1766~1775년에는 파르마(Parma)의 산 조반니(San Giovanni) 수도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775~1781년 로마의 성 안셀모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그는 교황 비오 6세(1775~1799)의 신임을 얻어 1782년에 티볼리(Tivol)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785년에는 이몰라(Imola)의 관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당시 그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영성적인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으나, 1796년에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오자 체세나와 이몰라에서 주민들이 프랑스 군대와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중재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1797년에 교황 비오 6세가 톨렌티노(Tolentino) 협정의 조인을 지지하였을 때는 이몰라의 신자들에게 사목 서한을 보내 주어진 상황에 따를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그는 그 해 성탄절에 발표한 교서에서, 복음에 반대되지 않는 민주 공화국은 인정하지만 그 정부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종교를 무시한다면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좋은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 훌륭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임으로써 보수주의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1799년 교황 비오 6세가 프랑스에 붙잡힌 상황 속에서 과도한 반프랑스적 행동을 비난하며 용서와 평화를 설교하였던 그는, 자신의 교구로 도망 온 프랑스 추기경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그 해 8월 교황 비오 6세가 프랑스에서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의 보호 아래 1799년말부터 14주 동안 베니스에서 개최된 교황 선거 결과, 1800년 3월 14일 만장 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 전반기의 활동 : 58세의 나이에 교황이 된 비오 7세는 교황 비오 6세의 희생을 마르티노 1세와 같은 순교라고 칭송하면서, 박해와 혼란 속에서도 교회는 영원히 존재함을 강조한 회칙 <디우 사티스>(Diu Satis)를 1800년 5월 15일에 공표하였다. 그리고 7월 3일에는 그때까지도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점령된 상태인 로마로가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교황 비오 7세는 전쟁으로 와해된 교황청을 내부적으로 복원시키는 일을 단행하였는데, 우선 국무원장에 콘살비(Ercole Consalvi, 1757~1824) 추기경을 임명하여 전임 교황 비오 6세가 시작하였으나 미처 끝내지 못한 개혁들을 근본적으로 단행하도록 하였고, 개혁을 주장하는 고위 성직자들을 지원하였으며, 혁명 지도자들을 사면하는 특사를 베풀어 과도한 반발을 막았다. 또 4개의 성(省)을 설치하여 개혁과 재건을 증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활동이 근본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비오 6세 교황의 교회 정치 체제를 재건하는 일임을 밝힌 교서 <포스트디우투르나스>(Post Diuturnas, 1800. 10. 30)를 발표하였으며, 나아가 귀족들이 선택한 평신도 관리들을 일부 행정에 참여시켰고, 행정 개혁, 사법 체계의 단순화, 법정의 재건 등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1801년의 교서에서는 자유 무역과 자유 산업에 관한 법을 발표하였고, 조세 체제를 개선함으로써 재정적인 문제를 회복시키려 하였으며, 농업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교황 비오 7세와 콘살비 추기경의 개혁 노선이 교황청 내의 고위 성직자들, 특히 젤란티(Zelant)파와 관료 정치의 반대에 부딪힘으로써 1801년의 개혁은 폐지되었고, 콘살비 추기경은 1806년에 프랑스의 압력으로 국무장관직을 사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교황 비오 7세는 프랑스에 가톨릭을 복원시키기 위하여 협상을 시도하였는데, 나폴레옹 역시 자신의 통치를 지지받기 위해서는 성직자들의 협력뿐만 아니라 종교를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1800년 6월부터 협상에 들어가 13개월 만인 1801년 7월 15일에 프랑스와의 정교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가톨릭이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신앙임을 확인하였고, 몰수된 교회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가 본당 신부의 봉급을 지급하기로 규정하였으며, 프랑스 내의 각 교구들을 조정하여 새롭게 설립하기로 하였다. 또 이 협정으로 가톨릭 전례의 자유롭고 공적인 시행이 보장되었으며 교황청의 관할권이 인정되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협정의 체결을 비준하였던 교황 비오 7세는 교서 <파스토랄리스 솔리치투도>(Pastoralis Sollicitudo)를 통해 종교적 평화를 위하여 주교들이 사임할 것을 촉구했고, 1801년 11월 29일에 발표된 교서 <귀 크리스티 도미니>(Qui Christi Domini)로 135명의 주교들이 사임하였다.
그러나 1802년에 프랑스가 교황이 정부의 허락 없이 프랑스에 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등 77개의 '기초 조항' 을 일방적으로 첨가한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한 교황 비오 7세는, 1804년 파리에서 거행된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여서도 이 조항들을 수정하려 하였지만 실패함으로써, 나폴레옹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다. 1805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의 왕으로 밀라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자, 교황은 전 유럽 교회를 프랑스 제국에 예속시키려는 나폴레옹의 종교 정책을 내심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염려는 나폴레옹이 이혼법을 포함한 시민법을 이탈리아 왕국에 도입하고, 교황령 안코나(Ancona)를 점령함으로써 가시화되었다.
1808년 1월에 로마와 교황청을 점령하고 귀리날레(Quirinale) 궁에 교황을 감금한 나폴레옹은, 3월에는 교황청 군대를 나폴레옹의 군대에 병합하였으며, 1809년 5월에는 교황령을 프랑스 제국에 합병시키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교황 비오 7세는 그 해 6월 10일 나폴레옹을 파문하는 교서 <괌 메모란둠〉(Quam Memorandum)을 작성하였는데, 미완성된 채 프랑스와 유럽에 비밀리에 유포된 이 교서를 빌미로 나폴레옹은 7월에 교황 비오 7세를 프랑스의 그르노블(Grenoble)로 납치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 다시 사보나(Savona)의 작은 마을로 보내짐으로 써 교황은 이곳에서 1812년까지 3년 동안 고립된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1810년 파리로 추기경들을 소집한 나폴레옹은, 제국에 예속된 교회를 세우려 하였으며 1810년 10월에는 파리좌가 설립되었다. 이에 교황은 사보나에서 11월 5일자 교서를 통해 이를 금지시켰고, 두 번째 교서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 모리(Maury) 추기경의 모든 행정 조치를 무효화하였다. 하지만 모리 추기경은 이를 거부하였고, 나폴레옹은 제국의 주교들의 국가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1811년 5월 사보나에 파견된 대표 사절이 고립생활로 허약해진 교황 비오 7세로부터 대교구 주교들에 의해 설정된 파리좌에 동의한다는 교서를 받아 냈지만, 교황은 곧바로 그 동의를 취소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1812년 6월 교황을 파리 근처의 퐁텐블로(Fontainebleau)로 이송시켰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후 1813년 1월 25일 굴욕적인 내용이 담긴 정교 조약(퐁텐블로 조약)에 서명하였으나, 2개월 후 교황은 이 서명을 철회하였다. 1814년 1월 퐁텐블로를 떠나 사보나로 되돌아간 교황은 이듬해 6월 7일 대대적인 환호를 받으며 로마로 귀환하였다.
후반기의 활동(1814~1823) : 교회의 재건을 시도한 시기이자 교황청의 세속적이고 영성적인 권위의 복권을 꾀하던 이 시기에, 교황 비오 7세는 국무원장으로 콘살비 추기경을 재임명한 후 젤란티파의 파카(Pacca) 추기경에게 교회와 교황청의 완전한 복원을 일임하였다. 프랑스의 오랜 점령으로 정신적인 변화와 혁명으로 생겨난 새로운 사상의 위력을 발견한 콘살비 추기경은, 행정적 · 사법적 · 재정적 · 경제적 개혁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이러한 노선은 그들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다.
영국 런던으로 가서 외교적인 문서를 통해 교회의 복권을 요구한 콘살비 추기경은, 이어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유럽의 평화를 위한 국제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빈 회의(1814~1815)를 통해 거의 모든 교황령이 복구되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파카 추기경이 로마 교회와 교황청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재건을 수행하였으며 1773년에 해산되었던 예수회를 1814년에 복원시켰다. 한편 콘살비 추기경은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고 1815년 7월 로마로 돌아왔지만 그의 정치적인 지성과 조직화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교황청 국무원은 매우 급속히 무능한 면을 드러냈다.
1816년에는 교황청의 행정 및 사법 기관들이 재건되었고, 이듬해에는 포교성성이 재설립되었으며, 1818년부터는 새로운 경제 정책이 시행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보수주의자 메테르니히(K.F. von Metternich)의 지지와 콘살비 추기경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교황 비오 7세는 점차 권위를 회복하였다. 한편 교황은 이 무렵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발생한 혁명을 비난하였는데, 이는 남아메리카의 주교들과 스페인 궁정에서 얻은 정보에만 기초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후에 남아메리카의 신생공화국들을 승인하였지만, 남아메리카의 상황을 조사하고 화해를 준비할 선교단을 파견하려는 계획은 그가 사망한 후에야 실행될 수 있었다. 수도회들이 스스로 재조직할 것을 권장한 교황은 전임 교황들과는 달리 교리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프리메이슨에 대해서는 엄격히 단죄하였다. 나폴레옹과 맞서서 교회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던 비오 7세 교황은 1823년 8월 20일에 사망하였다.
〔한국과의 관계〕 180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로 당시 조선의 유일한 목자였던 주문모(周文謨) 신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이후 살아 남은 조선의 신자들은 다시 사제 없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의 수는 점차 늘어났고, 몇몇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조선의 천주교회가 재조직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1811년 12월 9일자로 북경교구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와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여 그이듬해에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에는 조선의 문화 및 정치 상황, 믿음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 목자 파견 요청 등이 담겨져 있었고, 순교자들에 대한 순교 기록이 첨부되었다. 북경의 선교사는 이 편지를 당시 마카오에 있던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J. Souza Saraiva) 주교에게 전달하였고, 그는 이를 모두 포르투갈어로 번역하여 로마로 보냈으며, 1814년 8월 리스본에 도착한 이 서한들은 로마 주재 포르투갈 공사관에서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샤를르 달레(Ch. Dallet)는 비오 7세 교황이 퐁텐블로에서 이 편지를 받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가장 버림을 받은 자녀들이 보내는 호소문을 읽어도 도와 줄 수 없어 괴로웠다"는 내용을 전해 주고 있지만, 교황이 이 편지를 퐁텐블로에서 받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 교우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평 가〕 변화하는 세계에서 근대 세계의 원리를 어기지 않고도 교회의 방침들을 보존할 수 있는 타협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한 교황 비오 7세는, 재위 기간 동안 화해와 이해의 노력과 열망, 그리고 굳건함과 유순함으로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베네딕도회 수사로서 교황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현세적인 관심보다는 영성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았으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결정과 비판의 순간에는 그가 비록 행정적인 세세한 일을 싫어하였을지라도 용감하고 투명하였다. '새로운 시대' 앞에서 교회를 개방하는 일에 다소나마 기여함으로써 교황 비오 7세는 '새로운 시대의 교황' 으로 인정받고 있다. (→ 정교 조약)
※ 참고문헌 J. Leflon, 《NCE》 11, pp. 400~404/ R. Aubert, 《LThK》 8, pp. 533~536/ ㅡ, 《Cath》 11, pp. 261 ~268/ P. Levillain dir., Dictiom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1994, pp. 1334~1342/ J. Mathieu-Rosay, La véritable histoire des Papes, Paris, 1991, pp. 299~302/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Univ. Press, 1986, pp. 302~304/ A.Franzen, Kleine Kirchengeschicte(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달레 교회사》 중, pp. 15~39. 〔邊宗燦〕
④ 비오 9세(1792~1878) : 교황(1846~1878). 본래 이름은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 1792년 5월 13일에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근처 세니갈리아(Senigalli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03년 볼테라(Volterra)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간질병을 얻어 180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강이 회복되자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 대학에서 공부한 후, 1819년 4월 1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때 그는 예수회 회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포기하고 로마의 타타 조반니(Tata Giovanni) 고아원에서 사제로서의 첫 활 동을 시작하였다.
1822~1824년에는 칠레와 페루의 교황 대사인 무치(G. Muzi) 주교를 보좌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이해
와 사도적인 열성을 얻고 돌아온 그는, 1825~1827년에 로마 산 미셀(SanMichele) 구호원의 관리 책임을 맡았으며, 1827년에는 스폴레토(Spoleto)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반성직주의와 교황의 세속권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던 이몰라(Imola) 교구의 교구장으로 전임되었다. 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은 1833년에 라벤나의 대주교 팔코니에리(Falconieri)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과 1845년에 작성하여 로마로 보낸 <교황령 행정에 관한 고찰들>(Pensieri relativi all' Amministrazione pubblica delllo Stato Pontificio)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자유 사상과 행동을 배격하면서 바른 그리스도교적인 환경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밝혔다. 1840년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조반니 마리아는, 1846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가 사망했을 때는 후보자로 거론 조차 되지 않았으나, 그레고리오 16세의 체제를 계승하려는 보수파들의 대표자 람브루스키니(L. Lambruschini)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이들에 의해 교황 후보자로 강력히 부상되었다. 그리고 교황 선거가 시작된 지 이틀 만인 1846년 6월 16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이몰라의 주교였던 비오 7세 교황(1800~1823)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비오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 초기 활동과 보수주의 노선 : 1846년에 교황 비오 9세는 회칙 <귀 풀루리부스>(Qui Pluribus)를 통해 사제 지원자들의 엄격한 선발과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 같은 해에는 수도회성을 설립하여 수도회의 개혁을 촉진시키려 하였으며, <우비 프리뭄>(Ubi Primum)을 발표하여 수도회 총장들에게 입회 허가와 양성을 엄격히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1847년 8월에는 라틴 전례와 비잔틴 전례의 가톨릭 교회에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며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은 준수되지 않다가 1866년에 러시아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1847년에 예루살렘에 총대주교좌를 설립한 교황은, 이듬해에는 회칙 <인 수프레마페트리 세데>(In Suprema Petri Sede)를 발표하였는데, 이회칙에서 교황은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 양측의 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회피한 채 단지 통합과 일치를 위한 동방 교회의 귀환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의도는 시기상조였고 또 충분한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의 독립과 해방을 주장하는 혁명이 1848년에 일어났는데, 이 여파로 인해 교황령에서는 철저한 군주제를 고수하기 어렵게 되었다. 교황은 양원제 의회를 수립하는 내용의 헌법을 발표하여 교황령 내에서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당시 교회가 처한 어려움에서 탈피해 보고자 하였으나, 이탈리아에 교황의 중립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결국 국가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교황은 이 문제를 로시(Pellegrino Rossi)에게 맡겼으나 그는 11월 15일 암살당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9세는 이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귀리날레 궁으로 피신하였다가 프랑스 대사와 바이에른 대사의 도움으로 그 해 11월 24일 나폴리 왕국의 가에타(Gaeta)로 피신하였다. 그가 없는 동안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 의회는 1849년 2월 9일에 민주 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하면서 교황의 세속 통치권이 끝났음을 선언하였다. 가에타에 머물러 있던 교황은 가톨릭 국가들에 협조를 호소하여 프랑스의 대통령인 루이 나폴레옹이 로마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가 로마에 입성하자 그해 8월 나폴리 근처의 포르티치(Porici)로 거처를 옮긴 교황은, 자신이 없는 동안 이루어진 모든 법령을 폐지시키고 세속 통치권을 회복한 후인 1850년 4월 12일에는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1850~ 1859년에는 여러 가지 활동들이 전개되었다. 교황은 수도자들이 1850년에 창간된 잡지 《가톨릭 문화》(Civilità Cattolica)를 이용하여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까 우려하였으며, 1854년 12월 8일에는 대칙서를 통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포함으로써 마리아 신심을 증진시켰는데, 이 새로운 교의는 신자들의 마리아 신심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교황은 또 여러 국가들과 많은 조약을 체결하여 1850년에는 영국에, 1853년에는 네덜란드에 교계 제도를 재설립하였으며, 스페인과는 1851년에 정교 조약을 체결하였고, 1855년에 체결된 오스트리아와의 조약은 요셉주의와 자유주의 원리들을 폐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가 자유국가가 됨으로써 1870년에 무효화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과는 1852~1862년에 조약을 체결하였고, 미국에 새로운 교구들과 대목구를 설립하였다.
로마 문제 :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1861년 3월에 로마가 통일된 이탈리아 반도의 수도로 선포되었는데, 이는 1852년 이후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이었던 카부르(C.B. Cavour, 1810~1861)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통일은 경제적 · 정치적 · 문화적 요인으로 파생된 역행할 수 없는 절차였지만, 이 통일은 로마의 동의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었다. 비오 9세 교황과 대다수의 주교들은 교황령이 교회와 교황의 독립을 지키는 데 효율적이고 가시적이며 필요한 보증이라 생각하였으므로 이러한 생각은 교황청의 비타협적인 입장을 굳히게 하였다.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보장법' 이 발표되었다. 이에 교황은 5월 15일에 보장법의 수용을 거부하며 스스로 '바티칸의 포로' 가 되어 교황령 강탈에 대한 동의로 여겨질 수 있는 어떤 접촉도 삼갔으며, 이 갈등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다.
근대 사상의 비판 : 비오 9세 교황은 1864년 12월 8일에 발표한 회칙 <관타 쿠라>(Quanta Cura)에 당시의 주요 오류 80가지를 나열한 <오류 목록>(Syllabus)을 덧붙여 발표하였다. 이 문서는 국가의 긍정적인 역할, 교회의 세속적인 영향력, 종교의 자유로 인해 생긴 악폐 등을 환기시키면서, 가톨릭적이 아닌 문화의 자유와 국가의 무종교주의, 사상과 인쇄의 자유 등을 오류로 간주하였다. 특히 "교황은 진보와 자유주의, 그리고 현대 문화에 적응하고 동의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견해를 비판함으로써 자유주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반면,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이 교황과 교회의 견해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 가톨릭 자유주의는 교회의 권위와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교황 지상주의' (ultramontanismus)가 젊은 신부들과 평신도 지성인들 사이에서 다시 등장하였다. 그들은 강력한 교황 중앙 집권 체제를 주장하며,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을 함께 지닌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849년 이래 공의회의 소집을 생각하고 있던 교황은 1864년에 일부 추기경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고, 이후 공의회가 다룰 의제에 대한 검토 작업이 시작되었다. 교황 수위권의 정의는 확실히 19세기의 교황 지상주의 운동의 결과로서 공의회 이후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으며, 교황 무류성의 정의는 1869년에 《가톨릭 문화》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안되었다. 이러한 정의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1869년 12월 2일에 공의회가 개회되어 여기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에 대해 논의되었다. 이듬해 4월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규명한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하느님의 아들>(Dei Filius)이 만장 일치로 통과되었고, 교황권의 보편적인 수위권과 개인적 무류성에 관한 또 다른 헌장 <영원한 목자>(Pastor Aeternus)가 7월 18일에 승인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61명의 주교들은 항의의 표시로 최종 투표 전날 로마를 떠났다. 몇 개월 후 18명을 제외한 주교들이 결국 동의함으로써 두 개의 헌장은 교황의 권위와 위신을 강화시켜 주었다.
이후 교황은 8년 간을 더 재위하면서 이탈리아 정부와 더 멀어졌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로 발생한 이교(離敎)인 구가톨릭교(Altcatholizismus)와 서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반성직주의 운동을 목격하였다. 또 독일에서 비스마르크에 의해 시작된 '문화 투쟁' 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 교황은 1875년 2월 5일 회칙 <구옷 눈구암>(Quod Nunquam)을 발표하여 단죄하였다. 1878년 2월 7일 사망한 교황 비오 9세의 유해는 1881년 7월 13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 로렌초 성당(S. Lorenzo fuori le Mura)으로 옮겨졌으며, 1985년부터 그의 영웅적인 삶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함께 시성을 위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 비오 9세 때인 1857년에 조선 순교자 82명이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S.F. Berneux, 1814~1866) 주교는 1861년 10월에 비오 9세 교황에게 조선 교회의 상황을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당시 교황이 겪은 고통에 대한 위로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으며, 교황은 1866년 초 조선에서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발생하였을 때, 그 해 12월 19일자 편지를 통해 교우들을 위로하고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언약된 보상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선교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교황은 샤를르 달레(Ch. Dallet, 1829~1878)가 《한국 천주교회사》(Histoire de L' Église de Corée, 1874)를 발행하였을 때 축하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평가와 의의〕 정치적이지도 외교적이지도 않았던 교황 비오 9세는 본질적으로 사목자였다. 하지만 그가 재임기에 처하였던 역사적인 상황, 즉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국가 통일 운동)의 시기는 그를 정치와 연루시켰다. 다시 말해서 이탈리아의 영토적 · 정치적 통일과 프랑스 혁명의 원리 즉 자유와 평등의 원리 위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능력 부족이었다. 그는 근대 세계와 문명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모든 면에서 그리고 교회의 문화에도 뒤떨어져 있었다. 정치적인 계획에 실패하였고, 이후 로마와 교황의 세속권을 상실하였으며, 결국 이탈리아 왕국의 형성을 방해하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교황 비오 9세는 영성과 교회의 엄격한 수도회의 부활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반얀센주의 신심을 일깨우고 재속 성직자와 수도자를 개혁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세속화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였고, 교회 특히 교황의 자주와 독립을 확립하였다. (→ 로마 문제 ; 무류성 ; 바티칸 공의회, 제1차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 수위권 ; 이탈리아)
※ 참고문헌 R. Aubert, 《NCE》 11, pp. 405~408/ ㅡ, 《LThK》 8, pp.536~538/ 一, 《Cath》 11, pp. 272~278/ P. Levillain, Diction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1994, pp. 1343~1348/ Jean Mathieu-Rosay, La véritable histoire des Papes, Paris, 1991, pp. 305~308/ J.N.D.Kelly,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Univ. Press, 1986, pp. 309~311. 〔邊宗燦〕
⑤ 비오 10세(1835~1914) : 성인. 교황(1903~1914). 축일은 8월 21일. 본래 이름은 주세페 멜키오레사르토(Giuseppe Melchiorre Sarto). 1835년 6월 2일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리에제(Riese)에서 우체부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아 1850년 파두아(Padua)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58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어 톰볼로(Tombolo)의 보좌 신부를 시작으로 살차노(Salza- no) 본당 신부까지 17년 동안 교구 사제로 활동하였으며, 1875~1884년에는 트레비소(Treviso) 주교좌 성당의 참사 위원으로 있었고, 그곳 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로도 활동하였다. 1884년 9월에 만투아(Mantua)의 주교로 임명된 후, 많은 사제들과 평신도들과 접촉하면서 교구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던 그는, 1893년 6월 추기경으로 서임됨과 동시에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임명받았다. 사르토 추기경은 가난의 영성과 사도적 열성, 전례에 대한 관심, 가톨릭 운동 단체에 대한 지도 등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특히 1887년에 발표한 사목 서한에서는 후대에 근대주의(Modernism)라고 불린 원리와 경향들에 대하여 비난하였다. 1903년 7월 20일 레오 13세 교황(1878~1903)이 사망하자 국무장관이었던 람폴라(Rampolla) 추기경이 유력한 교황 후보로 떠올랐으나,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황제가 그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레오 13세 교황과는 다른 경향의 교황을 선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결국, 교황선거가 시작된 후 일곱 번째 회의가 개최된 8월 4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 교황의 입장과 계획 : 교황 비오 10세는 즉위 후 교황청의 외교 활동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메리 델 발(R. Merry del Val, 1865~1930)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교회 내의 문제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선임 교황 레오 13세가 추구하였던 사회 개혁 문제에는 관심이 적었고 전적으로 영성적인 사명에 헌신하는 일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으므로, 사목과 교리 교육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신자들이 보다 충만한 기도 생활과 자주 성사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례와 교회 음악을 개혁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목 경험을 토대로 교리 교육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교리 교육을 위한 교리서를 쉬운 용어로 작성하였다. 한편, 자유주의 학문 연구에 대해 끊임없는 불신을 가졌던 그는, 이것이 성서와 신학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요소라 여기고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완고한 입장을 보였는데, 특별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항에 관련될 때에는 평신도들이 교회의 입장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무리(R. Murri)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 민주주의자들의 정치적인 입장과 계획들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반대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입장은 1903년에 발표한 회칙의 제목이기도 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갱신하라' (Instaurare omnia in Christo)로 요약된다.
교회 내의 개혁 활동 : 교황 비오 10세는 사도 헌장 <사피엔티 콘실리오>(Sapienti Consilio, 1908. 6. 29)를 통하여 교황청을 11개의 성(Congregatio)과 3개의 법원, 5개의 사무처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1904년에는 가스파리(P. Gasparri, 1852~1934) 대주교에게 《교회법전》의 편찬 책임을 맡겨 그의 후임자인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에 의해 1916년 12월 4일 반포되었다. 그는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생활과 학습의 새로운 과정을 신학교에 도입시켰으며, 신학교의 교수들과 학장들의 임명권을 교황청이 갖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신학교 교육의 수준을 향상시키려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각 교구장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교황은 1909년부터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를 발행하도록 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강화시키는 학문의 발전을 꾀하여 1909년 5월 7일에 '교황청 성서 연구소'(Pontifical Biblical Institute)를 설립하였다.
교황은 전례적인 개혁도 시도하였는데, 그가 본당 신부로 사목할 당시에 작성한 교리서가 《비오 10세 교리서》라는 제목으로 전세계에 유포되었다. 회칙 <아체르보니미스>(Acerbo nimis, 1905)에서 교황은 종교 교육과 교리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교령 <사크라 트리덴티나 시노두스>(Sacra Tridentina Synodus, 1905. 12. 20)를 통해서는 영성체를 자주 할 것을 권장하였으며, 신자들의 공동기도와 미사를 중요시하여 미사 때에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로써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교령 <괌 싱굴라리>(Quam singulari, 1911. 8)를 통해 교황은 첫영성체를 할 수 있는 연령을 앞당겼는데, 이러한 그의 영성체 강조로 그에게 '영성체를 자주 하는 교황' 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교황은 <트라 레 솔레치투디니>(Tra le sollecitudini, 1903. 11. 22)를 통하여 교회 음악의 규범을 제시하면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장려하였고, 1911년에는 헌장 <디비노 아플라투>(Divino afflatu)로써 성무 일도서를 개정하였다.
사회 · 정치적인 노선 : 당시 이탈리아는 국가와 교회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으며, 교회는 신자들에게 어떠한 선거에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 조치를 내린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오 10세 교황은 신자들이 사회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거대한 연합 단체를 형성하기를 원하였으며, 평신도들은 정치에서 교회 지도자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교서 <일 페르모 프로포시토>(Ⅱ fermo proposito, 1905. 6. 11)에서 교황은 가톨릭 운동(Catholic action)을 격려하면서 신자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도록 권고하고 가톨릭 신자들도 투표하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가톨릭 정당을 구성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피에니 라니모>(Pieni I'animo, 1906. 7. 28)를 통해서는, 이탈리아 성직자 가운데 불순명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내리고 '전국 민주 연합' 에 가입한 사제들에게는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내렸다.
교황은 또한 일부 교회 단체들의 불순명이 근대주의자들(modermists)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이들을 비판하였다. 특히, 상니에르(Marc Sangnier)가 일으킨 프랑스 청년 가톨릭 신자들의 민주주의 운동인 시용(Sillon) 운동을 비난하였는데, 이 운동은 민주주의 정치 형태에 가톨릭을 동화시키려는 운동으로, 교황청 방침과 때때로 반대되는 사회적 · 시민적 심지어는 종교적인 주장을 펼치면서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에 교황은 회칙 <싱굴라리 과담>(Singulari quadam, 1912)을 발표하여 시용 운동을 단죄하였지만, 그는 이 회칙에서 특수한 지
역 상황에서 교조적 특성을 지닌 조직들을 수용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 원칙적으로는 순수하게 가톨릭적인 연합체를 선호함을 분명히 하였다.
국가들과의 관계 : 교황 비오 10세의 재임기는 프랑스에서 반성직주의가 성장한 시기였다. 1905년에 개정된 프랑스 헌법은 1801년의 정교 조약을 무효화하였으며, 국가로부터 교회를 분리하였고, 교회의 재산을 평신도 협회에 이전시켰다. 이에 교황은 회칙 <베헤멘테르 노스>(Vehementer Nos, 1906. 2. 11)로 이 법을 단죄한 데 이어, 회칙 <그라비시모 오피치 무네레>(Gravissimo officii munere, 1906. 8. 10)를 통해서는 교회 재산의 관리 및 재정을 관리하는 평신도 협회를 증진시키려는 모든 계획에 반대하였다.
외교에 관심이 없었고 정교 분리를 철저히 고수하려고한 교황 비오 10세는 모든 형식의 자유주의에 반대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1910년에는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고, 미국과 독일 및 러시아와도 갈등을 초래하였다. 성 보로메오(St. Charles Boromeo)에 대해 언급한 회칙 <에디태 새페>(Editae saepe, 1910. 5. 26)로 인해서는 종교 개혁에 관해 엄격하게 해석한 구절 때문에 독일에서 다소 좋지 않은 감정을 일으켰다. 한편 회칙 <암두둠인 루시타니아)(Jamdudum in Lusitania, 1911. 5. 24)에서 교황은, 포르투갈 공화국이 교회로부터 국가를 분리시키는법을 제정하였다고 비난하였는데, 이로 인해 포르투갈에서 심각한 종교 박해가 일어났다. 또 회칙 <라크리마빌리 스타투>(Lacrimabili statu, 1912. 6. 7)를 통하여 교황은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에게 인디언들의 생활과 교육을 개선시키도록 권고하였다.
근대주의에 대항한 활동 : 20세기 초에 성서와 신학연구에서 등장한 새로운 경향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교황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몇 개월 후에 근대적 성서 비판 방법을 주장한 프랑스 주석학자 르와지(Alfred Loisy)의 다섯 작품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키는 교령을 승인하였으며, 근대적 · 진화적 철학을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도덕 분야에 도입한 라베르토니에르(Laberthonnière)와 르 르와(Le Roy)의 작품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켰고, 이러한 노선을 추종한 미노키(Minocchi)를 단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회에서 티렐(Tyrrell)을 추방하였다. 또 1907년 7월에는 교령 <라멘타빌리 사네 엑시투>(Lamentabili sane exitu)를 통하여 성서와 신학에서 근대주의가 주장한 65개의 명제를 단죄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회칙 <파쉔디>(Pascendi)를 통하여 근대주의를 모든 이교의 종합이라고 표현하면서 근대주의에 대한 비난을 재확인시켰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비판에서, 근대주의자를 이단자로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 두 문서에서 근대주의는 불가지론과 내재주의와 반지성주의에 토대를 둔 사상이라고 규정되었다. 두 문서는 계시를 논리적이고 인간적인 인식 차원으로 축소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사의 흐름과 법칙에 흡수시키는 것을 비판하였다.
교황 비오 10세의 근대주의 비판은 철학적 · 신학적 · 성서적인 경향에 대한 것이었으나, 정치적인 경향에 대한 것이기도 하였다. 즉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교황은 신학자와 역사가들과 성서학자들에 대해 보고하는 정보 제공자들의 비밀 연락망을 형성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학자들의 교수직을 박탈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가톨릭 신자 가운데에서도 학자들이 부당한 단죄를 받았으며, 교회 학문 연구에서 좌절의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세 번에 걸쳐 이들 정탐 기관을 격려하는 교황의 서한이 보내졌지만, 교황이 공식적으로 그들의 활동을 승인한 적은 없었다. 교황은 1910년 9월 1일 모든 사제들에게 '반근대주의의 선서' 를 요구하는 자유 교서 <사크로룸 안티스티툼>(Sa-crorum antistitum)을 발표하여 사목과 교직에 종사하는 모든 사제들에게 이 선서를 하도록 하였는데, 성품성사를 받기 전에, 교직을 받기 전에, 본당 신부나 고위 성직자등 교회법적인 직책 임명을 받기 전에 이 선서를 하도록하였다. 이 선서는 1967년에 폐지되었지만 시행 초기에는 독일에서 상당한 거부 반응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교황은 재임 말년에도 다소 완곡한 방법으로 근대주의자들을 계속 비난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22일 후인 1914년 8월 20일에,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것을 개탄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1951년 6월 3일 복자품에 올랐으며, 1954년 5월 29일 시성되었다.
〔평가와 의의〕 교황 비오 10세는 본질적으로 다정다감하고 이해심 많은 사목자였다. 주일마다 교황청에서 그날의 복음 메시지를 모든 방문자들에게 들려주기를 좋아하였던 교황은, 단순성과 오직 한결같은 선한 마음과 가난의 정신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모습으로 그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스스로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 고 말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랑하였다. 또 그의 전례 개혁과 그 성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의 길을 닦은 것으로 평가된다. 교황 비오 10세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그의 생애 동안에 그가 대중들에게 성인으로서 존경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근대주의에 대항한 것에 대해 비오 10세 교황의 재임기가 곧 근대주의자의 위기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그의 전반적인 개혁 활동을 지나치게 도외시한 결과이다. 그가 교회를 위해 행한 개혁 활동의 좋은 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시도된 변화와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 (→ 가스파리 ; 근대주의 ; <라멘타빌리> ; 메리델 발, 라파엘)
※ 참고문헌 C. Ledré, 《NCE》 11, pp. 408~411/G. Urbini, 《EC》9, pp.1523~1530/ É. Amann, 《DTC》 12, pp. 1716~1740/ R. Aubert, 《Cath》 11, pp. 279~287/ ㅡ, 《LThK》 8, pp. 538~540/ Philippe Levillain dir., Dictiom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1994, pp. 1349~1351/ Jean Mathieu-Rosay, La véritable histoire des Papes, Paris, 1991, pp. 312~313/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1987, p. 358/ Donal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Saints, Great Britain, 1983, pp.279~280/ Enzo Lodi, trans. by Jordan Aumann, OP,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New York, 1992, pp. 236~238/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86, pp. 313~314/ A.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邊宗燦〕
⑥ 비오 11세(1857~1939) : 교황(1922~1939) . 본래의 이름은 암브로조 다미아노 아킬레 라티(Ambrogio Damiano Achille Ratti). 1857년 5월 31일에 밀라노 근처의 데시오(Desio)에서 비단 공장 지배인의 아들로 태어나 1867년 세베소(Seveso)의 산 피에트로 마르티레(San Pietro Martire)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후 몬차(Monza)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874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 재속회원이 되었다. 1875~1879년 밀라노 대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1879년 그레고리오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한 그 해 12월 27일 라테란 대성전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882년까지 로마에 머무르면서 신학과 교회법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82~ 1888년 밀라노 파두아(Padua) 신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888년 11월에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도서관 관장으로 임명을 받았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밀라노 교회의 행전》(Acta Ecclesiae Mediolanensis, 1890~1899)과 《암브로시오의 두 개의 미사 경본》(Missale Duplex Ambrosianum, 1913)을 편집 · 간행하였다. 또 다른 많은 사목 저서들도 간행했는데, 대부분 성 보로메오(C. Borromaeus, 1538~1584)와 밀라노 교회에 관한 것들이었다. 1912년에 바티칸 도서관 부관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914년에 관장으로 정식 취임한 그는, 이곳에서 예전에 간행되었던 여러종류의 법전을 복구하고 사본을 간행하는 작업을 했다.
1918년에는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에 의해 교황 특사로 폴란드에 파견되었다. 당시 폴란드는 정치와 종교 관계가 극도로 복잡한 상황이었는데, 그는 가톨릭 교회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이듬해 10월에는 폴란드 교황 대사이자 레판토(Lepanto)의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폴란드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던 그는 국가주의적인 경향을 경계하였지만, 볼세비키 혁명의 여파로 더 이상 폴란드에서 교황 대사로서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1921년에 그를 밀라노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폴란드를 떠나도록 하였다. 그는 밀라노에서 발표한 사목 교서로 인해 정치적인 면에서는 타협적인 주교였지만 사목적인 면에서는 매우 적극적인 주교로 알려지게 하였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 노선과 문헌 : 14번에 걸친 비밀 선거 후에 1922년 2월 6일 교황으로 선출된 그의 성품은 위엄 있고 엄격하면서도 매우 정감적이었다. 그의 영성에는 성 암브로시오와 성 보로메오의 영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지도자의 정신을 갖추고 사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극도로 민감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구체제가 붕괴된 이래, 교황 비오 11세는 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공동체를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왕국에 인류를 통합시키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1922년 12월 23일에 발표한 회칙 <우비 아르카노 데이>(Ubi arcano Dei)에서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평화' (Pax Christi in regno Christi)를 그의 교황직의 목표로 발표하였다. 그리스도 왕국 사상에 대한 이 생각은 결국 1925년 12월 11일 발표된 회칙 <과스 프리마스>(Quas primas)를 통해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 로 제정하게 하였다. 정치 · 경제 · 사회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에 적대적인 현 세계 안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기를 원하였던 교황의 계획은, 점차 법적인 틀을 형성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통치를 개인과 가정과 국가 안에 침투시키기 위한 특별한 가르침들을 담은 문서들로 발표되었다. 또한 회칙 <미세렌티시무스 레뎀토르)(Miserentissimus Redemptor, 1928. 5. 8)를 발표하여 성심(聖心) 공경을 통해 기도의 효험과 보상개념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세상의 구세주께로 마음을 전환하라는 메시지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대체로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교회 권위에 관해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즉 회칙 <모르탈리움 아니모스>(Mortalium animos, 1928. 1.6)를 통해 교회 일치 운동을 중지시키고, 갈라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로마 교회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확실히 그의 관심은 로마 교회에 중점을 둔 것이었으며, 이러한 교황의 확신은 그리스도교 혼인에 대한 회칙 <정결한 혼인>(Casti connubii, 1930. 12. 31)에서도 재확인되었다. 교황은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드 살 등의 성인들을 기념하는 회칙을 발표함으로써 가톨릭의 일치를 재확인하려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 가니시오(1925) , 십자가의 요한(1926), 벨
라르미노(1931), 대 알베르토(1932) 등의 성인을 교회 학자로 발표함으로써, 20세기 교회에 필요한 가르침을 제 시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와 같은 취지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시성되었으며, 한국 순교자 79위가 시복된 것도 1925년이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회칙 <앗 가톨리치 사체르도시이> (Ad catholici sacerdotii, 1935. 12. 20)에서 사제직을 다루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들은 신앙심과 순결과 학문과 활동력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영성 생활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성 이냐시오의 영성수련을 권장한 <멘스 노스트라>(Mens nostra, 1929. 12. 20)와 로사리오 기도를 권장한 <인그라베첸티부스 말리스> (Ingravesentibus malis, 1937. 9. 29)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을 기념해서는 회칙 <룩스 베리타티스>(Lux veritatis, 1931. 12. 25)를 발표하였다.
평신도와 선교 정책 : 교황 비오 11세를 '가톨릭 운동의 교황' 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이 운동을 가장 대중화시킨 교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및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평신도들을 조직하는 데 관심을 두었던 교황은, 이것이 '전문화된 운동' 이 되기를 요청하였다. 특히 노동자 계층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가톨릭 노동 청년회' (Jeunesse Ouvrière Chrétienne, J.O.C.)를 격려하였으며, 가톨릭 운동을 '교회의 교계적 사도직에서의 평신도들의 협력과 참여' 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사도직의 개념은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을 새롭게 고찰하게 하였고, 교황은 그들의 활동을 통하여 사회를 그리스도교화하려고 하였다.
교황은 또한 선교 활동에 있어서도 평신도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해외 선교에 모든 수도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그의 재위 기간 중 선교사들의 수가 배로 증가하였고, 역사가들과 전례학자들에게 동양 그리스도교를 연구하게 하였으며, 동방 교회법전을 편찬하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회칙 <레룸 에클레시에>(Rerum ecclesiae, 1926. 2. 28)를 통해 현지인 성직자 양성과 토착 교회의 발전에 주교들의 역할이 큼을 강조한 후부터 선교학이 중요한 학문으로 부각되었으며, 서방 지역 그리스도교의 활성화와 지역 교회의 토착화가 선교에 관한 활동 축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이 효과를 거둔 대표적인 예가 1926년 로마에서 중국인 신부 6명을 최초로 주교로 서품시킨 것과, 1930년에 인도의 말란카르교회가 로마와 일치한 것이다.
시대 참여 정책 : 교황 비오 11세는 가톨릭 정기 간행물들이 폭 넓은 계층의 견해를 포용하도록 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들의 엄격한 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언론이 자유롭게 남도록 장려하였다. 그러므로 정기 간행물인 《이탈리아》(L' Italia) 《이탈리아의 장래》(L' Avvenire d' Italia)에 대한 교황의 지지는 그 의의가 매우 깊다. 1929년부터 라디오의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있던 교황은 1931년에 바티칸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여 같은 해 2월 12일 개국하였으며, 회칙 <비질란티 쿠라>(Vigilanti cura, 1936. 6. 29)를 통해서는 신앙과 도덕에 반하는 영화를 보지 말라고 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대중 매체에 대한 관심은 그의 현대 의식에 대한 표시였으나, 대중 매체 영역을 분석하는데에 있어서 교황은 분명한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가정과 교회에서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교 교육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원칙들을 회칙 <디비니 일리우스 마지스트리>(Divini illius Magistri, 1929. 12. 31)를 통해 주지시켰는데, 여기서 교황은 국가의 역할 역시 분명히 규정하면서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 의해 통제를 받는 교육을 경계하였다. 교회의 학문 연구에 있어서도 우려를 하던 교황은 사도 헌장 <데우스 쉬엔시아룸 도미누스>(Deus scientiarum Dominus, 1931. 5. 24)를 발표하여 신학교에서의 학문 연구의 틀을 명확하게 세웠고, 그리스도교 고고학 연구소' (1925)와 '교황청 학술원' (1936)을 설립하는 등 학문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으며, 신앙의 교사와 학문의 교사가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세계대전으로 경제 불황과 사회 불의 문제가 대두되자 교황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노동 헌장>(Rerum novarum)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래서 <노동 헌장> 반포4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회칙 <사십 주년>(Quadragesimoanno, 1931. 3. 15)에서 새로운 사회 질서의 재건을 요청하였는데, 사회적인 반성을 야기시킨 이 회칙으로 보조성의 원리와 같은 기초적인 요소들이 싹트게 되었다.
국제 관계와 화해 : 교황 비오 11세는 회칙 <노바 임펜뎃>(Nova impendet, 1931. 10. 2)에서 경제적인 위기와 실업, 군비 증강 행위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냈다. 평화적인 국제 질서의 재편을 원한 교황은 1929년 2월 11일에 라 테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화해' 정책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그가 표방한 화해 정책은 정교 조약을 승인하는 정책이었으며, 일종의 원리 원칙과 실용주의에 의존한 것으로, 모든 것에 앞서서 교회의 자유와 사도직, 가정과 개개 인간의 권리를 보존하려 하였다. 교황은 이 화해 정책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이념에서 교회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교황은 또 파시스트와의 조약 체결을 통하여 로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고, 교황권에 국제적인 위상을 부여하려 하였으며, 이탈리아 교회와 가톨릭 운동에 대한 승인을 획득하고자 열망하였다. 그 결과 1929년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지만, 1931년에 가톨릭 운동이 파시스트의 억압에 의해 위기를 맞자, 그 해 6월 29일 회칙 <논 압비아모 비소뇨>를 발표하여 국가에 대한 우상 숭배를 강하게 비난하였다. 1931년 9월에 타협을 위한 조약이 있었으나, 가톨릭 운동은 더 이상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교황은 파시즘과의 협상과 조약을 무효로 하지 않고 전체주의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동방 교회에 관심을 가진 교황 비오 11세는, 1922년에 러시아 선교단을 준비하고 제네바 협정을 통해 러시아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박해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정교회를 개종시키려는 그의 의도와 협상 정책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교황은 회칙 <디비니 레뎀토리스>(Divini Redemptoris, 1937. 3. 19)에서 볼셰비즘과 무신적 공산주의의 이념을 비난하였는데, 그에게 있어서 무신적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윤리적인 행위의 정신적 원리를 없애는 거짓된 이념이었다. 이 이념이 전세계에 퍼져 있음을 주시한 이 문서의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무엇보다 당시 스탈린의 공포 정치가 퍼져 있던 러시아의 정세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이 승인된 이후, 1924년 3월 29일에 맺어진 바이에른 주와의 조약으로 교회의 자유와 가르침을 지키게 되었으며, 1929년 6월 24일에는 독일 북부의 프로이센 주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프로이센 주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에 더욱 의의가 컸으며, 독일의 어려운 상황들을 다소 감소시킬 수 있는 적절한 체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권력과 국가 사회주의가 시작되면서 독일 사회에 불안을 야기하였으며, 독일 주교단은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에 교황은 1933년 7월 독일 제국과 정교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같은 해 10월부터 교회의 권리에 대한 박탈과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인간 존엄성이 파괴되는 인종 차별 정책이 시작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독일 제국 안에서의 종교적인 상황' 이라는 부제를 단 회칙 <미트 브렌넨데르 조르게>(Mit brennender Sorge, 1937. 3. 14)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해 정확하게 암시하지는 않았으나 그 원리들 즉 이교주의와 인종 차별주의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인종주의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종교적인 말들의 오용과 비인격적인 신(神)에 대한 믿음 등을 비난하는 한편, 인간의 존엄성을 재확인한 이 회칙을 공포한 직접적인 원인은 정교 조약의 파기에 있었다. 교황은 독일 나치즘(Nazism)이 볼셰비즘과 연관된 것으로 확신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와 교황청의 관계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본질적으로는 개선이 되었다. 회칙 <막시맘 그라비시맘궤> (Maximam gravissimamque, 1924. 1. 18)를 통하여 1905년의 정교 분리법의 조정이 이루어졌는데, 교황은 교구위원회에 권한을 부여하였고, 이 위원회는 국가로부터 교구 재산의 관리권을 위임받았다. 교황의 이러한 정책은 국가주의적이고 군주제적 성격의 '악시옹 프랑세즈 (Action Frangaise) 때문에 난관에 부딪혔지만, 1926년에 이 운동은 교황으로부터 금지령을 받았다. 이후 가톨릭 운동은 프랑스를 다시 개종시키고 스도교화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그 결과 많은 새로운 직업 단체와 청년 단체들이 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프랑스 교회를 새로운 시기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멕시코의 반성직주의적인 박해 정책 안에 공산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스며 있다고 생각한 교황 비오 11세는 3개의 회칙 <이니귀스 아플릭티스궤〉(Iniquis afflictisque, 1926. 11. 18), <아체르바 아니미>(Acerba animi, 1932. 9.2, <피르미시맘 콘스탄시암궤)(Firmissimam constantiamque, 1937. 3. 28)를 통해 멕시코 정부의 과격 행위를 비난하였다. 그는 멕시코 정부를 반대하는 멕시코인들의 저항이 합법적이라고 인정하면서, 멕시코 정권의 과격 행위에 대항하는 방법으로서 가톨릭 운동과 사회 정의를 권장하였다. 한편, 교황은 스페인의 1936년 내란 중에 주교들과 사제들을 살해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격분하였지만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유지하여, 단지 담화문 <라 보스트라 프레센차>(La vostra presenza, 1936. 9. 14)를 통해 공산주의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스페인 공화국과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말년의 활동 : 재임 말년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반면,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인종주의를 반대하는 언급이 자주 등장하였다.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기 전부터 불안을 느꼈던 교황은 이탈리아가 독일과 연계하지 않을까 우려하였으며, 1938년 여름에는 가톨릭 운동을 옹호하면서 국가 사회주의와 이탈리아 인종주의를 비난하는 담화문을 작성하였지만 발표되지는 않았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9년 2월 10일 밤에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 1972년에 프랑스 언론에서 교황이 무솔리니의 명령으로 암살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교황청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평가와 의의〕 세계대전으로 약화된 평화를 민감하게 의식하였던 교황 비오 11세는 평화에 대한 의지를 강화시키고,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생각한 인종주의와 국가주의를 억제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재임 기간 동안에 드러났던 외적인 불행들과 모호한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중들에게 복음의 현존을 재확인시켰던 교황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현대의 교황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유능한 교황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그리스도 왕 ; 바티칸 라디오 ; 라테란 조약 ; 로마 문제 ; <디비니 레뎀토리스> ; 〈디비니 일리우스 마지스트리> ; <사십 주년>)
※ 참고문헌 G. Schwaiger, 《NCE》 11, pp. 411~414/ A. Frutaz, 《EC》 9, pp. 1531~1543/ R. Aubert, 《Cath》 11, pp. 287~300/ G. Schwaiger, 《LThK》 8, pp. 540~542/ Philippe Levillain dir., Dictiom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1994, pp. 1351~1362/ Jean Mathieu-Rosay, La véritable histoire des Papes, Paris, 1991, pp. 315~317/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86, pp. 316~318/ A.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邊宗燦〕
⑦ 비오 12세(1876~1958) : 교황(1939~1958). 본래의 이름은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Eugenio Maria Giuseppe Giovanni Pacelli. 1876년 3월 2일 로마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랫동안 교황청에서 법률가로 근무해 온 집안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필리포(Filippo Pacelli)는 1896년에 추기경 회의의 변호사가 되었으며, 그의 형 프란체스코(Francesco Pacelli)는 1929년의 라테란 조약 체결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비스콘티(Visconti) 국립 중 ·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에우제니오 파철리는, 1894~1899년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과 카프라니카(Capranica) 대학에서 공부한 뒤 성 아폴리나리오(S. Apollinare) 대학(현 라테란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1899년 4월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다시 교회법을 공부하여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1901년에 국무원의 교회 특별 사무국(Extra-ordinary Ecclesiastical Affairs)에 수습생으로 들어가, 1904~1916년에 가스파리(P. Gasparri, 1852~1934) 추기경을 도와 교회법전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이 기간 중 몇 년 동안은 교황청 아카데미(Acc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ci)에서 국제법을 가르쳤으며, 법적인 학식과 외교적 재능으로 인해 교황청 국제 관계 활동의 전문가가 되었다. 1917년 4월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에 의해 뮌헨 교황 대사로 임명되는 동시에 사르데스(Sardes)의 명의 대주교로 서품된 그는, 1920년 6월에 새로운 독일공화국의 교황 대사가 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기간 동안 제국 정부와 1917년에 무산되었던 베네딕도15세의 평화 계획에 대해 협상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인 1924년에는 바이에른 공화국과 교황청 사이의 정교 조약을 체결시켰으며, 1929년에 프로이센과 체결된 정교 조약도 그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1929년 12월 16일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으며, 1930년 2월 7일에는 가스파리 추기경의 후임으로 국무장관이 된 그는, 국무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교황 비오 11세(1922~1939)의 정책에 깊이 관여하였고, 특히 교황의 정교 조약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로 인해 1933년 6월에 오스트리아와, 1933년 7월에 독일과 정교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나치즘(Nazism)에 전체주의적인 성향이 있음을 깨닫고 그에 대항하였다. 이는 1937년에 독일의 인종 차별주의와 나치즘을 비난하였던 회칙 <미트 브레넨데르 조르게>(Mit brennender Sorge)에 담겨져 있는데, 비오 11세 교황의 이 회칙은 사실상 파첼리에 의해 작성된 것이었다. 파첼리 추기경은 1934년에 아르헨티나를 공식적으로 방문한 데 이어 프랑스(1934, 1937), 미국(1936), 헝가리(1938) 등을 방문하였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 교황과 전쟁 : 파첼리 추기경은 교황 선거가 시작된 지 단 하루만인 1939년 3월 2일의 세번째 회의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려운 시기와 더불어 그의 재임기를 시작하였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그는 전쟁을 막기 위하여 외교적인 노력을 다하였으며, '평화의 교황' 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뮌헨 협정 이후에는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유럽열강들과 일련의 접촉을 가졌다. 이러한 시도는 무솔리니(B. Mussolini)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이탈리아를 전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히틀러와의 외교 교섭이 1939년 5월 초에 좌절되고, 같은 해 8월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에 폴란드가 양분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교황은 이를 계기로 "평화와 함께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전쟁과 함께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평화를 호소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러한 평화의 입장을 전쟁 기간 내내 계속 유지하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침묵을 지켰다. 또한 나치의 잔악 행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도 교전국들 사이에서 실제적으로 중립의 입장을 표명하여 어느 한 쪽을 편든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전쟁 동안 끊임없는 접촉과 중재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중재 계획은 좌절되어 이탈리아와의 관계는 이전보다 좀 나아졌지만 독일과의 관계는 어려워졌고, 소비에트 연방과의 접촉은 전무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드골(C.A.J.M. de Gaulle)과 문제가 있었지만 페탱(H.-P. Pétain) 정부와는 유지되었고, 미국과 교황청의 관계는 전쟁 동안 상당히 폭 넓게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의 휴전 이후 독일군에 의해 로마 내에 억류된 교황은, 유대인들과 박해 희생자들을 구호하는 '교황청 구제위원회' (P.C.A. 혹은 P.O.A.)를 통하여 원조 활동을 하였다. 이 위원회에서는 전쟁 동안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 즉 전쟁 포로, 추방자, 수용자, 도망자, 굶주리고 집 없는 사람들과 정치적 · 인종적으로 박해받는 사람들로 그 활동 대상을 확대하였는데, 이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만도 52,000여 명에 이르렀고, 유대인들 역시 교황청으로부터 방대한 원조를 받았다. 교황 비오 12세는 재임 초부터 유대인 특히 독일 태생 유대인들에 대한 비오 11세 교황의 원조 계획을 계속 이어받아 실행하였다. 피난 유대인들은 재정적인 원조를 받았으며, 긴급 상황인 경우에는 교황 자신의 개인적인 기금으로 원조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유대인에 대한 재정적 원조는 총 400만 달러에 달하였다. 또한 라테란 대성전과 바티칸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보호하였지만, 4,447명의 유대인들에게는 수도원의 봉쇄 구역이 피난처로 제공되었다. 이러한 원조 활동 자체가 유대인 박해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의도에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 동안에 교황이 취한 가장 의의 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점점 더 유대인 박해를 노골화하고, 바티칸의 자선 활동마저 방해하자, 교황은 잔악한 행위를 중지하도록 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탄절 메시지(1942. 12. 24)와 추기경단에게 행한 연설(1943. 6. 2)에서 독일의 유대인 말살 정책을 명백하게 비난하였다.
교사로서의 교황 :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 10월 20일에 발표한 자신의 첫 회칙 <숨미 폰티피카투스>(Summi pontificatus)를 통해 전쟁으로 이끈 국제적인 급변의 원인을 비판하였는데, 전쟁 중에 나온 교황의 이 발언은 국제적인 새 질서와 평화를 세우려는 시도에서 이루어졌다. <노동 헌장>(Rerum novarum) 반포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1941년 성탄절 라디오 메시지에서도 교황은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1942년 성탄절 메시지에서는 국가들의 내적인 질서에 대하여, 그리고 1944년 성탄절 메시지에서는 그리스도교적인 문명과 민주주의의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이러한 언급들은 인간 인격의 우위와 사회적 생활 조직 안에서 윤리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1943년의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i Corporis Christ,6.29)에서, 교회의 본성을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써 설명하는 교회론을 제시한 이후, 교황은 교회가 교육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고, 이 확신은 1945년 추기경 회의 때 행한 교황 담화에서 교회가 초국가성을 지니며 국제적인 질서의 모형이라고 강조하게 하였다. 교황 비오 12세의 가장 대표적인 회칙 <디비노 아플란테 스피리투>(Divino Afflante Spiritu, 1943. 9. 30)는 성서학자들의 방법론을 대부분 수용한 것으로 가톨릭 성서 연구에 신선한 충격과 방향을 제시해 주었으며, 전례에 관한 회칙인 <메디아토르 데이>(Mediator Dei, 1947. 11. 20)는 20세기 전례 쇄신의 대헌장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전례 개혁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또 교황은 사제직의 거룩함에 대해 언급한 <멘티 노스트레>(Menti Nostrae, 1950)와 새로운 교회 단체인 재속 수도회를 교회법적으로 승인하며 동정성에 대해 언급한 <프로비다 마테르>(Provida Mater, 1950)도 발표하였다. 교황은 가르침을 주는 데에 주력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현 세계 속에 적극적으로 교회가 현존하도록 인도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는 가톨릭 운동들이 정치, 경제, 조합 위원회 등의 영역에서 재건되어 활동하였다.
교황과 공산주의 : 전쟁 동안에 교황청이 걱정하였던 문제는 공산당과 공산주의 체제였다. 전쟁 결과 유럽의 가톨릭 전통을 지닌 국가들, 즉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됨으로써 이러한 사태는 가톨릭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이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국가들에서는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비롯하여 주교들과 성직자들이 투옥되었으며, 교황청으로부터 분리된 국가 교회를 형성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교황은 1946년에 가톨릭 신자들이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1949년 7월에는 공산주의자들을 파문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교황이 보기에, 로마 교회로부터 나타난 그리스도교적 문명은 모스크바가 중심이 된 공산주의 문명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황은 동유럽에서의 반종교적인 박해를 비난하였으며, 서유럽의 가톨릭 교회들이 공산주의 세력에 직면하여 서로 단결하도록 촉구하였다.
교황 비오 12세의 재임 기간 동안 동유럽 교회는 교황청으로부터 멀어져 나갔지만, 서방 세계와의 관계는 강화되어 가톨릭 교회가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황은 이탈리아의 그리스도교 정당 활동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일치된 모습을 강조하였다. 한편 독일에서 가톨릭 교회는 부흥에 주역이 되었고, 프랑스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은 다양하게 이루어졌으며, 1953년에는 스페인 정부와 정교 조약을 체결하여, 가톨릭이 스페인의 국교가 되도록 하였다. 그에 앞서 1940년에 교황청은 포르투갈과 정교 조약과 선교 조약을 맺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의 가톨릭 교회의 특권적인 위치는 오랫동안 보존되었는데, 교황은 이 두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체제의 진보적인 민주화를 도모하였다.
마리아 신심 :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강했던 교황은 파티마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의 요청대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면서 1942년에 세상을 마리아의 티없으신 성심께 봉헌하였다. 이를 계기로 교황은 '성모 성심 축일' (8월 22일)을 1944년부터 로마 전례를 따르는 모든 교회에서 기념하도록 하였으며, 성년(聖年)이었던 1950년 11월 1일에는 교황령 <무니피첸티시무스 데우스)(Munificentissimus Deus)를 발표하여 "원죄없이 잉태되고 평생 동정이었던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는 마리아의 승천 교의를 발표하였다. 또 1954년을 마리아 성년으로 정한다는 내용의 <풀젠스 코로나>(Fulgens Corona, 1953)를 발표한 데 이어 천상의 여왕인 마리아의 중개와 구원 협력에 대한 <앗 첼리 레지남>(Ad Caeli Reginam, 1954)을 발표하였으며,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 100주년이었던 1954년에는 이 칭호를 공식적으로 봉헌하기 위하여 '여왕이신 마리아 축일' (5월 31일)을 제정하였다.
교회의 변혁 : 1952년 2월 10일 라디오 연설을 통하여 교황 비오 12세는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운동'(M.B.W.)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고 격려하면서, 이러한 쇄신의 전망 속에서 교회의 생활에도 변화가 있기를 촉구하였다. 즉 수도자들의 쇄신을 촉구하였으며, 1950년에는 사도적 권고 <멘티 노스트레>(Menti nostrae)를 통하여 사제직 양성 방안을 제안하였고, 이듬해에는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세계 공의회 담화에서 평신도의 사회 참여와 가톨릭 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을 현혹시키는 당시 사조들의 '불길한 경향' 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하였다. 교황은 또 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실시했으며, 전례에서도 <크리스투스 도미누스>(Chritus Dominus, 1953. 1. 16)를 통해 성주간 전례를 포함한 주일 미사의 개혁을 단행하였고, 성찬 전례를 정식화하고 전시 상황 등의 필요성에 따라 저녁 미사를 거행할 수 있다는 <사크룸 콤무니오넴〉(Sacrum Communionem, 1957. 3. 19)을 발표하였다.
반면에 교황은 교회 일치 운동과 새로운 신학적인 노력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1950년 8월 12일에 발표된 회칙 <후마니 제네리스>(Humani generis)를 통해 신학, 특히 프랑스 신학의 역사적 방법을 경계하였는데, 교황은 이 신학이 근대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또 1954년에는 프랑스 주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노동 사제들에게 활동 중지를 지시하였다. 이는 교황이 사도직에서 새로운 형식의 사회 참여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노동 사제들의 생활이 가톨릭 사제직의 일치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당시까지 이탈리아인들이 대다수를 이루었던 추기경단을 모든 민족과 인종에게 개방하여 1946년에 32명, 1953년에는 24명의 추기경 서임을 하였다. 또한, 1939년에 1,696개의 교구가 있었는데, 1958년에는 2,048개로 증가하였으며, 중국(1946)과 미얀마(1955)를 비롯한 여러 아프리카 국가에 교계 제도를 설립하였다.
교황과 제3 세계 : 1951년의 회칙 <에반젤리 프레코네스>(Evangelii praecones, 6. 2)에서 교황은 공식적으로 교회 선교에 보다 많은 노력을 요청한 데 이어 토착 교회 설립을 위한 선교 방향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선교 방침이 식민주의 사회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자, 식민주의 제국들 특히 프랑스의 정치가들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7년의 회칙 <피데이 도눔>(Fidei donum, 4. 21)을 통해 토착 교회의 설립 특히 아프리카에서의 선교 노력의 가치를 재확인한 교황 비오 12세는, 모든 교회의 선교사들에게 새로운 사회 참여를 요구하였으며, 국가주의와 공산주의, 이슬람교와 유물론 등으로 토착 교회가 불안정해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교황은 동방과 서방의 대치 상황이 공산주의자들의 출현이 증진될 가능성이 있는 제3 세계 지역으로 이전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었고, 실제로 중국과 베트남의 가톨릭 교회는 사회주의 체제와 대결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 교황의 입장에서 중국 애국 교회의 설립은 교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근본적인 목적의 실현처럼 보였다. 1949~1951년의 망설임 끝에, 교황 비오12세는 사도좌에서 이탈된 교회 설립의 시도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하였고, 대만에 교황 대사를 파견하여 대만과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였다. 1958년 10월 9일 간돌포성(Castel Gandolfo)에서 사망하였다.
〔평가와 의의〕 교황 비오 12세는 생애 말년에 점점 더 독선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가지 정책과 활동에서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 그는 가톨릭의 지적인 생활 면을 증진시켰으며 수많은 교구를 설립하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현지인 주교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그는 추기경단을 국제화시켰는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인 주제를 미리 준비한 것으로서 인정받아 그의 훌륭한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로마 교회에서 비오 12세 때처럼 더욱 많은 외적인 손실을 겪으면서 동시에 세계적으로 더 큰 명망을 얻은 교황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K.G. Steck)라는 평가를 받는 비오 12세 교황의 연설과 저술은 철저하고 세계적인 영향을 미쳤다. (→ <그리스도의 신비체> ; <디비노 아플란테 스피리투> ; 마리아 축일 ; <메디아토르 데이>)
※ 참고문헌 R. Leiber, 《NCE》 11, pp. 414~418/ Thomas F. Meau, 《EC》, pp. 1005~1006/ R. Aubert, 《Cath》 11, pp. 300~311/ R. Leiber, 《LThK》 8, pp. 542~543/ Philippe Levillain dir.,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1994, pp. 1362~1371/ Jean Mathieu-Rosay, La Véritable Histoire des Papes, Paris, 1991, pp. 318~320/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86, pp. 318~320/ A.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cte(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邊宗燦〕
비오 P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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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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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5세 교황.
